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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완산군 이수함(完山君 李壽諴), 선성군 이흠(宣城君 李欽), 덕림군 이락(德林君 李洛), 현감공 이건, 덕천수 이택(德川守 李澤)/삼충절공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10. 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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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군 장자  완산군 이수함(完山君 李壽諴)

 

 

 

 

嘉德大夫完山君之墓  箕城郡夫人平壤李氏之墓

가덕대부완산군지묘  기성군부인평양조씨지묘

 

 

                           유  조선국종실가덕대부완산군묘비명

완산군 이수함(完山君 李壽諴)

[1500(연산군 6)1557(명종 12)]

는 수함(), 는 성이(誠耳). 견성군의 장남

1544(중종 39) 중종대왕이 승하시 대전관(代奠官).

부인은 기성군부인(箕城郡夫人) 평양이씨로 안분당 이희보의 딸이며

子는 신성군 이흠, 평성부정 이균, 여성군 이석으로 32녀를 두었다.

견성군의 피화로  8살 어린나이에 동생 계산군과 함께 멀리 귀양가 있었으나,

1519년 이홍관이 중종에게 진강(進講) 중에 간곡히 간하여 20살에 귀양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완산군과 계산군 두 형제가 입시하니 중종이 친히 손을 잡고 위로하며 은휼(恩恤)을 베풀었다고 한다.

 

 

완산군출토지비

 

 

 

견성군 장손 선성군 이흠(宣城君 李欽)

 

 

 

 

 

正義大夫宣城君之墓  光山縣夫人金氏之墓                加平縣夫人加平李氏之墓

정의대부선성군지묘  광산현부인김씨지묘                가평현부인가평이씨지묘

 

 

 

 

선성군(宣城君) 이흠(李欽15221562)

완산군(完山君) 이수함(李壽諴)의 아들로 는 중경(仲敬)이고, 군호는 선성군이다.

태어나면서 부정(副正)을 제수받고, 이후 정의대부를 받았다.

묘역은 견성군 묘 아래에 있고,

배위 가평현부인(加平縣夫人) 가평이씨(加平李氏)에게는 자식이 없고,

배위 광산현부인 광산김씨와 합장묘이다. 봉분 앞에는 묘갈이 있고, 비문은 전후 양면에 있으며,

전면에 2열로 正義大夫宣城君之墓 光山縣夫人金氏之墓라 새겼고,

후면에 有明朝鮮國宗室正義大夫宣城君墓碣銘幷序라 쓰여져 있다.

비는 1581년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김귀영(金貴榮)이 찬하고,

병절교위(秉節校尉) 민기정(閔起貞)이 썼다.

광산김씨와 31녀로

장남은 덕림군 이락(德林君 李洛), 차남은 덕평수 이회(德平守 李淮), 삼남은 덕천수 이택(德川守 李澤)이다.

 

 

 

 

선성군 이흠,   완산군 이수함,  견성군 이돈 묘역

 

경민공 견성군 이돈(景愍公 甄城君 李惇)의 증손자  충절공 덕림군 이락(忠節公 德林君 李洛) 묘소

 

 

 

 

 

 

贈正義大夫德林君兼  五衛都摠府副摠管諡忠節公之墓  鷄林縣夫人慶州李氏祔左

증정의대부덕림군겸  오위도총부부총관시충절공지묘  계림현부인경주이씨부좌

 

 

                                충신증정의대부덕림군묘비

덕림군 이락德林君 李洛 [1549(명종 4)1592(선조 25)]

는 낙(), 는 거원(巨源). 선성군의 장남이다. 처음에 명선대부에 오르고 후에 군으로 추증됐다.

부인은 계림현부인(鷄林縣夫人) 경주이씨이며 1남 이건(李楗)을 두었다.

<임진란호종일기(壬辰亂扈從日記)>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592(선조 25) 430일 비가 내리는 사경에 덕림군이 덕평수 · 덕천수 두 동생과 더불어 장황히 입시하니,

임금이 돈의문에 나와 사관(祠官)에게 명하여 종묘의 신주를 받들어 먼저 가게 하고, 세자는 뒤를 따르게 하고,

왕자 신성군(信城君)과 정원군(定遠君)을 데리고 떠날 때 덕림군이 덕평수와 덕천수 두 아우를 데리고 호가하였다.

임금은 융복(戎服)에 붉은 모자 차림으로 말채찍을 친히 잡고 몽진길을 떠났다.

159251일에 임금이 잠시 벽제역에서 휴식할 때 시종하는 관원들이 떨어져서 따라오지 못하였는데

덕림군 삼형제는 힘을 다하여 호가하여 충의를 다하였다.

159252일 어가가 개성을 향할 때 이졸(吏卒)이 다 도망가니 덕림군이 통탄하여 눈물을 흘리며 호가하였다.

그 때 임금이 덕림군에게 말하기를 서울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으니 장차 어찌 하겠느냐?하니 덕림군이 말하기를

 이 망극한 때를 당하여 충성을 다하여 호가하오나

가슴이 찢어질 듯 원통한 가운데 하교가 이러하시니 눈물이 앞을 가려 여쭐 바를 알지 못하옵나이다.하였다.

임금이 또 걱정스럽게 말하기를 너의 가족은 지금 어디 있느냐?하였다.

이에 국사가 황급하여 집을 생각할 겨를이 없기에 가족에게 두어마디 일러 동교 묘하로 가라 하고

 신은 창망히 이곳에 와 있사오니 그간의 사생 안위는 전연 알 길이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경악차탄하고 재삼 말하기를 지극한 충성이로다.

너희 형제의 충의지심을 내 가상히 여기는 바이거니와 지금 국사가 망극한 때를 당했다고 가솔을 돌보지 않고

임금을 위하여 이같이 하니 실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줄 아노라. 내가 심히 경애하는 바이다.

그러나 수일내로 달려가서 가솔을 잘 조치하고 오면 내 마음에 더욱 위안이 되겠노라.하니

덕림군이 감읍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몽진을 하는 이 때에 어찌 감히 사사로운 생각을 하오리까.하였다.

그러나 임금이 누차 하교하므로 덕림군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두 동생과 함께 당일 출발하여 묘하로 달려오니 적들이 이미 닥쳐와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은 가족과 조상 신주들을 사패전장(賜牌田庄)과 노비가 있는 영남 용궁땅으로 급송하였다.

당일로 돌아서서 다시 행재소를 찾아갈 때는 왜적을 피해 숲 사이와 산골짜기의 험난한 길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으면서 159263일에야 겨우 평안남도 중화부(中和府)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공교롭게도 적군을 만났다.   공은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 활을 쏘고 칼을 휘둘러

왜적 수십 명을 죽였으나 마침내 힘이 다하여 두 동생과 함께 순절했다.

이 때 12명의 종들도 또한 주인을 따라 순직하였다. 그 때 칙설이라는 종이 늙고 병들어 좀 뒤떨어졌다가

뒤늦게 당도하여 보니 참혹한 화가 그 지경인지라 겨우 도망하여 용궁으로 달려가 사실을 알렸다.

그 때 덕림군의 나이는 44세였다.

나라에서는 덕림군에게 정의대부 덕림군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하고

특히 1873(고종 10) 3월에 고종황제가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완산군 묘 후 건좌이다. 부인 계림현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견성군 이돈의 현손 증 좌승지 이건(李楗) 묘소

 

 

 

 

      通訓大夫贈左承旨  宣武原從一等功臣諱楗之墓  贈淑夫人淸州韓氏祔左

      통훈대부증좌승지  선무원종일등공신휘건지묘  증숙부인청주한씨부좌

 

 

                                    통훈대부현감공묘비명

 

견성군 이돈의 증손으로 선성군 이흠의 3남  덕천수 이택(德川守 李澤) 묘소

 

 

 

 

                 彰善大夫德川守諡忠節公之墓  愼人南陽洪氏祔左

                 창선대부덕천수시충절공지묘  신인남양홍씨부좌

 

 

                                충신창선대부덕천수묘비명

덕천수 이택(德川守 李澤) [1560(명종 15)1592(선조 25)]

휘는 택(), 는 심원(深源). 선성군의 3남이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두 형 덕림군 · 덕평수와 함께 임금이 파천할 때 노복을 거느리고 호가하던 중

같은 해 63일에 평안도 중화부에서 왜적을 만나 두 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의관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광전리 줄을동 중촌 선성군의 묘하 건좌에 배위 남양홍씨와 합장하였다.

1873(고종 10) 3월에 고종황제가 정려를 명하였다.

 

 

 

 

삼 충 절 공 비

 

三忠節公碑

 

 

贈正義大夫德林君兼  五衛都摠府副摠管  全州李公諱洛諡忠節公碑

증정의대부덕림군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전주이공휘락시충절공비

[15491592]

 

 

 

 

                彰善大夫德平守  全州李公諱淮諡忠節公碑

                창선대부덕평수  전주이공휘회시충절공비

(1551~1592)

 

 

 

 

                     彰善大夫德川守  全州李公諱澤諡忠節公碑

                     창선대부덕천수  전주이공휘택시충절공비

(1560~1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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