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효공 경재 하연 文孝公 敬齋 河演
경기 시흥시 소산서원길 20 (시흥시 신천동 산12)
1376(우왕 2)∼1453(단종 1)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仍令致仕 諡文孝敬齋河先生神道碑銘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세자사잉영치사 시문효경제하선생신도비명
문효공 하연선생 구신도비
大匡輔國崇祿大夫행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 世子師仍令致仕敬齋河文孝公神道碑序
대광보국숭록대부행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잉영치사경제하문효공신도비서
연당하우명효자정려蓮塘河友明孝子旌閭
孝子同知中樞府事 蓮塘晉陽河公旌門記
효자동지중추부사 연당진양하공정문기
하제명은 아버지가 78세로 돌아가자 상례를 극진히 했고, 조석의 제수를 친히 준비하였다고 한다.
거상 (居喪)이 끝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 소래산(蘇來山)의 현재 묘소옆 별장으로 들어가서
세조가 두 번이나 도진무절제사(都鎭撫節制使)의 벼슬로 불렀으나 신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노환으로 식음이 감소하자,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겨 물이나 뭍에서 나는 맛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꿩의 간과 산새 구이를 좋아하였는데, 직접 수풀 속에 그물을 치고 꿩을 몰아 잡아다가 올렸으며,
1465년 76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자 슬퍼하기를 거의 멸성(滅性)하기에 이르렀고,
묘 옆에 영당(影堂)을 지어 기일마다 친히 제수를 갖추었다.
이 영당에 부모님의 모습을 직접 그린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는 생전에 공양하듯이 행동했다고 한다.
하우명의 지극한 정성은 그가 거주한 인천부에서 중앙으로 보고함으로써 알려졌고,
정문(旌門)과 복호(復戶)가 내려졌다.
소산서원蘇山書院
소산서원기실비蘇山書院記實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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