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國守護조국수호 萬世保寧만세보령 盡忠報國진충보국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산로 367-1
호국사에는 임진왜란때 왜구와 싸우다 순국한 구국공신 405분의 위패와 무명용사비가 있으며,
임란공신충의 선양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
조국을 구하신 호국영령들의 업적을 기리고 찬란한 업적을 자손만세에 전하기 위해
매년 음력 4월 13일에 추모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壬亂 宣武,扈聖,淸難 一萬救國功臣 祭壇
임란 선무,호성,청난 일만구국공신 제단
宣祖昭敬大王선조소경대왕
欽差統領浙直水兵遊擊將軍季公淸德碑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계공청덕비
委羽山志≫ 권6에 수록된 계금장군의 시 <友人招游委羽洞作>
携壺探古洞 병을 휴대하고 옛 동굴 찾아나서
雲锁偶逢開 구름 사라지니 우연찮게 탁 터였네
白鶴翀霄去 흰 학이 하늘로 높이 떠나가고
靑猨摘果来 푸른 원숭이가 과실 따오네
牽風瑶草帶 바람에 요초 띠가 흩날리고
暎日玉花臺 햇빛이 옥하대를 비치네
塵俗何時遠 언제 속세를 벗어날고
空嗟歲月催 아아 세월이 빨리 가는구나
보령에 있는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欽差統領浙直水兵遊擊將軍) 계공(季公)의 청덕비(淸德碑)
"명나라의 계금 장군이 전쟁을 치르는 중 부하장수를 잘 보살피고 고을사람들에게 덕을 베풀었다."
"계금장군이 갑자기 바다의 폭풍이 일어 많은 배가 침몰하자 조선의 사공 중 물에 젖어 옷이 언 자를 보고
자신의 옷을 벗어 입혀줄 정도의 인덕과 어린아이일지라도 속이지 않은 청렴함을 지녔다."고 했다.
임란 당시 명나라 장수였던 계금장군의 공덕비인
`흠차통령절직수병유격장군(欽差統領浙直水兵遊擊將軍) 계공(季公)의 청덕비(淸德碑)'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비석(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으로 1598년에 세워졌다
壬亂 宣武,原從功臣尙州黃公佑漢紀績碑
임란 선무,원종공신상주황공우한기적비
壬亂 淸難,宣武,扈聖功臣安大進公功績碑
임란 청란,선무,호성공신안대진공공적비
慕夏金先生諱忠善功績碑
모하김선생휘충선공적비
김해김씨 모하 김충선(慕夏 金忠善,1571~1642), 사야가(沙也可)
1571(선조 4)∼? 조선 중기에 조선으로 귀화한 일본인.
본명은 사야가(沙也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선지(善之), 호는 모하당(慕夏堂).
1592년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 휘하의 좌선봉장으로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하여
경주·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첨지의 직함을 받았으며,
정유재란 때는 손시로(孫時老) 등 항복한 왜장과 함께 의령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러한 전공으로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도원수 권율(權慄), 어사 한준겸(韓浚謙)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았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었다.
뒤에 야인들의 침입으로 변경이 소란하자 종군을 자원하여 10여 년 동안
방수(防戍: 변방 방위)에 봉직하였으며, 1613년(광해군 5) 정헌대부(正憲大夫)가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그 부장 서아지(徐牙之)를 잡아 죽인 공으로
사패지(賜牌地)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수어청의 둔전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스스로 광주(廣州)의 쌍령(雙嶺)에 나아가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1643년 외괴권관(外怪權管)으로 국경수비를 맡고 있던 중 청나라 칙사의 항의로 해직되어
대구의 녹리(鹿里: 목장을 할 수 있는 땅으로 在野를 의미함)로 돌아왔다.
목사 장춘점(張春點)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가훈·향약 등을 마련하여 향리교화에 힘썼다.
저서로는 1798년(정조 22)에 간행된 『모하당집(慕夏堂集)』 3권이 전한다.
광주안씨 접반사 우재 안대진(迂齋 安大進,1561~1604), 서령공후 26세
공은 선조19년(1586) 알성시(謁聖試) 병과5(丙科5), 중시 병과(丙科) 1위급제.
임진왜란 공신으로 선조가 공에게 내린 교지 말미에
“진충보국(盡忠報國) 만세보령(萬歲保寧)”이라고
추기된 것을 계기로 보령(保寧)이란 지명이 처음 생겼다고 한다.(오늘날의 충남 보령시).
공은 1598년(선조 31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에 있는
명나라 계금(季金)장군 공덕비(지방유형문화재 제159호)를 찬 하였다.
상주황씨 대사헌 동산 황우한(東山 黃佑漢, 1541년중종36~1606년선조39)
부 黃世懃(황세근)
1574년(선조 7) 別試 丙科급제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1591년 도승지에 올랐으며, 1600년 지중추부사에 이어 부제학이 되었다.
1605년 호조참판·병조참판을 지내면서 사옹원제조를 겸하였고, 이듬해 대사헌으로 재임 중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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