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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성주사지(聖住寺址),오층석탑,중앙삼층석탑,동삼층석탑,서삼층석탑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12. 10.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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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聖住寺址)

사적 제 307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 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 하였다고 한다.

 

성주사지 오층석탑(聖住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 19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양식은 비슷하다.

 

 

 

 

 

 

 

 

 

 

 

성주사지 석계단 石階段.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140

성주사는 백제시대의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해주었다는 전설이 전하여지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건물의 주춧돌을 포함한 많은 석물이 남아 있는데, 이 석계단도 그 중의 하나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것으로 추정하는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절내의 금당을 오르던 계단으로서, 원래는 양쪽 소맷돌에 사자상을 조각해 두었다고 하나

1986년에 도난당하여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금당터 연화좌대

 

 

 

 

聖住寺址 中央三層石塔

성주사지 중앙삼층석탑

보물 제 20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으로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으며,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聖住寺址 東三層石塔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26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4기의 석탑 중 하나이며,

금당터 뒤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석탑 중 가장 동쪽에 있는 탑으로

2중 기단(二重基壇) 위에 만들어진 3층 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옥개석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목각되어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C)의 전형적 3층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1층 탑신석에는 문액(門額)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양각하였으며,

승탑(부도)로 추정되어 오다가 성주사 사적기에 의해서 사리탑으로 알려지고 있다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보물 제 47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基壇)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주며,

3층을 이루는 탑신(塔身)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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