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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성주사지聖住寺址. 석등, 석불입상, 낭혜화상비

구름에 달

by 碧巖 2018. 12. 10.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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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保寧 聖住寺址.

사적 제 307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성주사지 석등 聖住寺址 石燈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33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제19) 앞에 놓여있는 8각 석등으로,

석탑 앞에 각부분이 흩어져 있던 것을 1971년 석탑을 수리하면서 현재의 자리에 세워 둔 것이다.

형태는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3단을 이루는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하나의 돌로 다듬어 놓은 바닥돌과 받침의 아랫부분은 그 윗면에 연꽃무늬를 둘렀다.

윗받침돌은 맨아래의 받침을 거꾸로 놓은 듯 서로 대칭을 이룬다.

화사석은 불빛이 퍼지도록 4곳에 창을 내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1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하다.

화사석에 마련된 창의 주변에 창문을 걸기 위한 구멍의 흔적이 없는 점이나,

가운데기둥이 가늘고 길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는 점 등으로 보아

뒤의 5층 석탑보다 시대가 늦어지는 조선시대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保寧 聖住寺址 石佛立像

보령 성주사지 석불입상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73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불입상

성주사지내 강당지 동편에 있는 석불입상으로 얼굴이 타원형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얼굴부위, 목부위, 가슴부위가 일부 훼손되어 있으며

지대석의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른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하며,

조선시대 중·후반기에 조각한 것으로 추정한다.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국보 제 8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에(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명문장으로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전에 선종 불교의 큰 절이였던 성주사선종은 어려운 불경을 모르더라도 수양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로 백성의 지지를 상당히 받았던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이후에 폐사되었다.

 

 

 

 

 

 

 

 

 

성주사지 후면에서 바라본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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