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도봉구-연산군燕山君,거창군부인신씨/ 의정궁주한양조씨,태종후궁/ 능양위구문경,휘순공주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 17. 22:38

본문

728x90

 

 

연산군 이융(燕山君李㦕),거창군부인신씨

1476(성종 7)1506(중종 1). 조선의 제10대 왕.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562-2

 

연산군燕山君, 거창군부인신씨 

재위 14941506.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융(李㦕).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이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후에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었다.

그러나 1483(성종 14)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면서도 세자로 삼았다고 한다.

149412월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함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 12년 동안 무도한 짓을 많이 하여 폐위되었다. 이후 교동(喬桐)에 안치되어 있다가 그 해 11월에 죽었다.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시대 폐주(廢主) 중 한명으로

따라서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실록 첫머리에 있는 사평(史評)도 연산군의 일기에서는

“..만년에는 더욱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하고 패악(悖惡)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남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 단근질하기착흉(斮胸: 가슴 빠개기촌참(寸斬: 토막토막 자르기

쇄골표풍(碎骨瓢風: 뼈를 갈아 바람에 날리기) 등의 형벌까지 있어서……라고 되어 있을 만큼

연산군은 조선조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같은 폐주라 하더라도 광해군에 대해서는 사고(史庫)의 정비라든가 성지(城池병고(兵庫)의 수리,

중국에 대한 현명한 외교정책 등을 들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러한 긍정적 요소가 조금도 없었다.

 

왜인과 야인의 침입을 의식해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만들게 했다든가, 변경지방으로 사민(徙民)의 독려,

국조보감(國朝寶鑑)·여지승람(輿地勝覽)등의 수정 등 치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무도하기 이를 데 없던 폐정(弊政)에 비긴다면 보잘 것 없는 일인 것이다.

즉위 초에는 아직 전조(前朝)의 치평 기운이 남아 있고 또 인재와 사림이 성한 가운데 어느 정도 질서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4년째부터는 드디어 패악한 본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산군은 56년 동안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士類)를 희생시키는 참극을 벌였다.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와 1504년의 갑자사화가 그것이다. 

무오사화는 성종실록편찬 때 그 사초 중에서 김종직(金宗直)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견됨으로써,

이에 관련된 사림학자들이 많이 참화를 입은 사건이다.

이 때 그렇게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데는,

학자들을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 재상들이 교묘히 이용해 정쟁에 이용한 점도 있었다.

갑자사화도 결국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그토록 큰 옥사가 벌어졌다는 측면이 더 큰 비중을 가진다.

연산군은 방탕한 생활에서 오는 재정난을 메우려고 훈구 재상들의 토지를 몰수하려 했다.

훈구 재상들은 왕의 이러한 횡포를 억제하려 했고, 이에 또 한 번 사화가 벌어진 것이다.

이 사화의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으로 소급되겠지만,

이 역시 연산군의 포학한 성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 두 사화의 결과는 참혹했다.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폐비 당시의 두 숙의(淑儀)는 타살당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도 구타당해 죽었다.

그 밖에 윤필상(尹弼商김굉필(金宏弼) 등의 사형을 필두로,

한명회(韓明澮정여창(鄭汝昌)도 모두 부관참시를 당했다.

 

연산군이 그토록 광포하고 난잡한 성품을 가지게 된 동기를 주로 생모를 잃은 사실에서 찾으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실록 연산군일기에는, 원래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 능력도 없는 사람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하여 정계와 연산군 사이에는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문신들의 직간(直諫)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홍문관 등을 없애 버리고, 정언을 하는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다.

그 밖에 온갖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된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켜 버렸다.

당시로서는 가장 패륜으로 생각되던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라는 단상제(短喪制)를 단행한 일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균관·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천사(興天寺)도 마구간으로 바꾸었다.

민간의 국문투서사건을 계기로 한글 사용을 엄금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 9월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의 주동으로 연산군 폐출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옹립되니이것이 중종반정이었다. 

 

居昌郡夫人愼氏거창군부인신씨

본관은 거창(居昌). 영의정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신승선(愼承善)31녀 중 막내이다.

할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신전(愼詮)이며,

아버지 신승선은 세종의 4남 임영 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딸과 혼인하여

신수근(愼守勤신수겸(愼守謙신수영(愼守英)과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愼氏)까지 3남 1녀를 두었고,

신승선의 시호는 장성(章成)이다.

 

거창군부인 신씨는 1472(성종)에 태어나 1488(성종 19) 당시 왕세자였던 연산군과 가례를 올렸다.

51녀를 두었는데,

폐세자 이황(李?), 창녕대군(昌寧大君)이성(李誠)과 휘순공주(徽順公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1494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봉해졌으며,

어질고 온순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 어루만지고 왕이 총애하는 이를 더욱 후하게 대접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의 폭정이 이어져 이를 근심하여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며 연산군은 이를 듣지 않았으나 성내지는 않았다.

또한 주위 사람들을 단속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150692일 중종반정으로 인해

연산군이 폐위당하고 강화도 교동현으로 옮겨지자 따라가려 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926일에 두 아들 폐세자 이황과 창녕대군이 함께 사사되었으며,

118일 연산군이 역질로 사망하자 강화도 교동에 장사지냈는데,

1512(중종 7) 왕에게 양주 해촌(海村)으로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였으며,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의 예로 정중히 개장하도록 하였다.

1537(중종 32) 신씨가 사망하자 중종은 연향(宴享)을 미루고

왕후(王后)의 고비(考妣)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1512년 신씨가 연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이곳이 거창군부인 신씨의 외할아버지인 임영 대군의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 인근에 임영 대군파 오산군 묘역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한편, 이곳에는 의정궁주 조씨의 묘도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의정궁주 조씨의 제사를 임영 대군으로 하여금 받들도록 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

 

 

 

의정궁주 한양조씨(義貞宮主 漢陽趙氏, ? ~ 1454),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한양조씨(義貞宮主 漢陽趙氏, ? ~ 1454)

태종의 후궁(간택후궁)으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의정궁주(義貞宮主)는 공민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趙暾)의 증손녀이고,

조선건국 개국공신 한산군 조인옥(趙仁沃)의 손녀로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뇌(趙賚)의 딸이다.

 

세종 3(1421) 숙공궁주(淑恭宮主)가 

아버지 김점(金漸)이 평안도 관찰사 시절에 수 많은 뇌물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는데,

상왕 태종은 김점을 국문하고자 숙공궁주(淑恭宮主)를 퇴출시킨 직후인

1422(세종 4) 228일 소헌왕후가 간택을 통해

조뇌(趙賚), 장수(張脩), 신기(愼幾)의 여식들을 궁에 들여 태상왕의 후궁으로 들이길 청하였는데,

태상왕이 "내가 늙었으니 하고 싶지 않다." 하며 이를 거부한다.

하지만 재차 간택하길 청하여 조뇌(趙賚)의 딸을 들이기로 결정하지만, 이내 주저하며 맞아들이지 않았다.

 

나이가 많던 태종은 조뇌의 딸 조씨를 궁에 들이지 않은 채 14225월에 승하하였다.

상중에 조뇌가 지신사(도승지)로 있던 김익정(金益精)을 통해 세종에게 고하기를,

"여식이 비록 혼례식을 올리진 않았지만

택일하여 입궁하란 명이 내려져 있었으니 도리상 당연히 성복해야 합니다" 하고 상고한다.

이에 예조관원에게 물어보니 공자의 말씀에 이와 비슷한 예가 있다 듣고 합당하다 하여

태종을 모시지도 않은 조씨를 궁에 들여 궁주의 태종의 빈소에 성복하고 궁주의 예를 들여 궁에 들인다.

세종은 조씨를 책봉할때 정식 가례색을 통해 입궁하였지만

빈이 못되었고 빈보다 아래인 잉첩으로 취급하여 궁주 작위를 내린다. 

후에 이를 두고 유생 곽장(郭璋)

"동지총제(同知摠制)의 딸 조씨는 태상을 모신지 얼마 안되어 태상이 승하하셨으니 재가가 가능하다."

말을 하여 의금부에 가두고 국문을 하였고, 고문을 견디지 못한 곽장이 의금부에서 자살하였다 

그후 의정궁주는 남편이 없는 혼인으로 인해 자녀도 없을 뿐더러 재가도 못하여

홀로 33년을 지내다 1454(단종 2) 27일 숨을 거둔다.

 

증조부 : 조돈(趙暾)

   조부 : 조인옥(趙仁沃)

아버지 : 조뇌(趙賚)

   숙부 : 조재(趙䝴)

   숙부 : 조관(趙貫)

   숙부 : 조갱(趙賡)

   남편 : 태종

  의정궁주 한양조씨(義貞宮主 漢陽趙氏)

     남매 : 조효생(趙孝生)

     남매 : 조순생(趙順生)

     남매 : 조관생(趙觀生)

     남매 : 조덕생(趙德生)

 

 

 

 

 

======================================================================================================================================================

 

 

휘순공주(徽順公主) 연산군 장녀,  능양위 구문경(陽尉 具文璟)

 

 

능양위구문경陽尉具文璟

본관은 능성(綾城). 구수영(具壽永)55녀 중 넷째 아들이다.

증조할아버지 구양(具揚)은 공주 목사를 역임하였으며,

구양의 장남 구치관(具致寬)이 세조 즉위 시 좌익공신 3,

성종 대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녹훈된 바 있으며 영의정을 역임하였다.

할아버지 구치홍(具致洪)1467(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당시 종사관으로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후 강릉 대도호부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구문경(具文璟)1501(연산군 7) 연산군의 장녀 휘순공주(徽順公主)의 부마가 되었고,

같은 해 7월에 능양위(綾陽尉)로 임명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휘순 공주가 출가할 집을 지어 주도록 하였으며,

이후에도 평시서(平市署)가 휘순 공주의 집을 압박하자 그곳을 공주에게 주고 평시서를 옮기도록 한 바 있다.

중종반정 후 연산군이 폐위되자 구문경과 공주의 직첩을 거두고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연산군이 공주에게 사급(賜給)하였던 물건,가사(家舍), 전민(田民)을  관에 귀속시키도록 하였는데,

구문경의 집은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朴元宗)에게 넘어갔다. 

 

1506(중종 1) 중종반정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던

아버지 구수영은 조정에 연산군과 절혼(絶婚)할 것을 청하여 구문경과 공주는 이혼하게 되었다.

당시 사헌부에서는 구수영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바 있으며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구문경으로 하여금 절혼하게 했다고 비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08년 정광필(鄭光弼)은 경연에서 구문경의 이혼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이어 유순(柳洵) 또한 구문경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중종은 구문경 부부를 다시 합하도록 하였으며,

반정 당시 가사를 모두 몰수하였으므로 빈 집을 사급하여 주거나 그 값을 계산하여 면포를 주도록 하였다.

 

                                                綾城具公之墓능성구공지묘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