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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성비 원주원씨誠妃 原州元氏, 태조의 후궁/성빈 원주원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 20.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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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비 원주원씨지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1-1번지

 

성비 원주원씨(誠妃 原州元氏.?1449.세종 31)

본관은 원주(原州).

할아버지는 고려조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원송수(元松壽)

아버지 원상(元庠) 고려조에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한 후,

조선 개국 후에 벼슬에 종사하지 않다가 태종대에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를 지내고

세종 대에는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희정(僖靖)이다.

원상의 동생 원충(元衷)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시호는 양간(良簡)이다. 

 

                                                         誠妃原州元氏之墓 

                                                         성비원주원씨지묘

성비 원주원씨(誠妃原州元氏)1396(태조 5)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승하한 후,

1398(태조 7) 225일 태조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태조가 행행(行幸)할 때 원씨가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시종하였다고 한다.

1406(태종 6) 태조의 후궁들을 봉작하였는데,

이때 성비(誠妃)로 책봉되었으며 태조의 후궁 중 하나였던 유씨(柳氏) 또한 정경 궁주(貞慶宮主)가 되었다.

원씨의 책봉 소식을 듣고 태상왕이었던 태조가 기뻐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태조의 승하 이후에도 원씨에게 물건을 진상하는 등 어머니의 예로 대하며 극진히 섬겼다.

 

 

이후 국가의 각종 예식에도 원씨는 왕실의 일원으로 계속 참여하였으나,

()에 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았던 당시 원씨의 지위 문제는 계속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태조가 애초부터 원씨를 계실(繼室)이 아닌 첩으로 대우하였다고 하여

예식 당시의 자리 배정을 두고 논란이 있었으며,

원씨를 비()로 봉한 것은 단지 고려조의 습관을 따라 하였을 뿐,

정후(正后)로서 논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또한 원씨의 사망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는 ()하였다고 하여

승하(昇遐)’ 등 존숭의 뜻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지위 문제는 사망 후 상례(喪禮)를 둘러싼 논란으로도 이어졌다.

결국 각종 상구(喪具)는 모두 관()에서 갖추게 하되,

종친으로 품질(品秩)이 낮은 사람을 상주(喪主)로 삼게 하였다.

다만 장례는 종친의 상등(上等)의 예()를 쓰도록 하여 존숭하는 뜻을 나타내도록 하였다.

 

오산군 이주(李澍)가 제사를 담당하였는데

임영대군 이구(李璆)는 세종의 넷째 아들이고, 오산군 이주(李澍)는 임영 대군의 아들이다.

원씨의 후사가 없었던 까닭에 제사를 오산군으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여,

원씨의 묘가 오산군 묘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묘는 단분 단독장으로, 묘표문인석장명등 등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묘표에는 성비원주원씨지묘(誠妃原州元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성비 원주원씨 묘는 전주이씨 임영대군파 묘역 중 가장 오래된 묘소로서,

단분 단독장으로 동남향을 하고 있다.

특히 봉분에는 방형의 호석을 2단으로 쌓아 고려 말에서 계승된 조선 초 무덤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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