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효공 심온 安孝公 沈溫
경기도 기념물 제53호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이의동 산13-10
안효공 심온 安孝公 沈溫
1375(우왕 1)∼1418(세종 즉위).
본관은 청송(靑松). 字는 중옥(仲玉).
할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郞) 심용(沈龍)이고,
아버지는 조선초 영삼사사, 문하부좌정승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의 5남이며, 세종의 장인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아버지와 함께 조선 창업에 참여, 간관의 직무를 맡아보았다.
1408년(태종 8) 첫째 딸이 충녕군(忠寧君: 뒤에 세종)의 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가 되어 백성을 침탈하고 병기 관리에 소홀한
수군첨절제사 박영우(朴英祐)를 파직시키고, 이어 대사헌이 되어서는 관기 확립에 힘썼다.
1414년 변정도감제조(辨正都監提調)·형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고려 후기에 권세가들에 의하여 천민으로 바뀐 양민들의 신분정리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이어서 호조판서·좌군총제·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는데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행동에 연루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그 뒤 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양녕대군을 대신해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이어 세종으로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의정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가까이하기에 이르렀다.
1418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동생 심정(沈泟)이 병조판서 박습(朴習)과 함께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어 현재 인계초등학교 뒷산에서 사사되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강상인의 옥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박은(朴訔)은 대질심문없이 심온을 모반죄로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박은의 발언과 결부되어, 『기재잡기寄齋雜記』 등 야사(野史)에는
심온이 유언으로 후손에게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吾子孫 世世 勿與朴氏相婚也] 전하고 있다.
9세손 심단(沈檀, 1645∼1730)이 쓴
「안효공온신도비명(安孝公溫神道碑銘)」에 이러한 유언을 한 연유가 기록되어 있다.
후에 문종은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안효공온신도비安孝公溫神道碑」
領議政靑川府院君贈謚安孝沈公神道碑銘
영의정청천부원군증시안효심공신도비명
有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府事兼 領經筵書雲觀事靑川府院君 贈諡安孝沈公神道碑銘并序
유 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부사겸 영경연서운관사청천부원군 증시안효심공신도비명병서
九世孫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 致仕奉朝賀 檀 謹撰
구세손 보국숭록대부행판중추부사 치사봉조하 단 근찬
外裔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藝文館提學 徐命均 謹書
외예숭정대부행호조판서겸판의금부사 지경연춘추관동지성균관사예문관제학 서명균 근서
十三代孫 禦侮將軍行虎賁衛 副司果 錥 謹篆
십삼대손 어모장군행호분위 부사과 육 근상
領議政靑川府院君贈謚安孝沈公神道碑銘」
有明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府事兼領 經筵書雲觀事靑川府院君 贈謚安孝沈公神道碑銘并序」
九世孫 輔國崇祿大夫行判中樞府事致仕奉朝賀 檀 謹撰」
外裔 崇政大夫行戶曹判書兼 判義禁府事知經筵春秋館同知成均館事藝文館提學 徐命均 謹書」
十三代孫 禦侮將軍行虎賁衛副司果 錥 謹篆」
公諱溫字仲玉姓沈氏靑松人鼻祖麗朝文林郞衛尉寺丞諱洪孚子諱淵閤門祇侯子諱龍吏曹正郞追封門下侍中靑華府院君於公爲祖考考諱德符位 特進左侍中封靑城伯入我 朝鮮勳不受諡定安妣淸州宋氏淸原君諱有忠女繼妣門氏監門衛郞將諱必大女公以洪武乙卯生門妣出也年十二 中丙寅進士 太祖朝歷兵工曹議即 恭靖即位除保功將軍龍武司大護軍 太宗元年辛已以本職知閤門事四年甲申以大護軍幹判內侍茶房事尋 陞龍驤司上護軍兼判通禮門下事七年丁亥擢承政院同副代言陞左副尋陞嘉善拜左軍同知摠制八年戊子 世宗在潜邸擇名家令德以公長女配 焉十一年辛卯陞嘉靖拜豊海道觀察使入爲叅知議政府事俄拜司憲府大司憲十四年甲午陞資憲拜刑曹判書漢城府判尹議政府叅贊左軍都
摠制加正憲大夫吏曹判書十八年戊戌世宗陞震儲八月 太宗禪位于 世宗尊爲上王公以國舅封靑川府院君 上王曰國君之舅其尊無比宜拜領議 政其位次左右相議啓左相朴訔曰 宜在昌寧府院君成石璘上公以謝恩使赴京師 三殿各遣內侍餞于郊觀者傾都十一月公未及復命姜尙仁事 發初 上王旣禪位命軍國重事皆稟啓 上王兵曹只啓綽巡事餘悉不啓 上王震怒曰誰主爲此者 命禁府逮訊遂逮兵曹判書朴習叅判姜尙仁叅 議李殼及諸即官雜治不服 命釋之至是又以蜚語聞 上王復 命鞫尙仁等壓膝四次尙仁不勝庸楚乃曰適遇同知摠制沈泟於宮門外泟謂臣曰 內禁衛缺員甚夥侍衛虛疎盍及時愼補臣曰軍土如聚一處則豈處疎之足憂乎證曰聚一處則多少又奚可論乎泟即公之弟也禁府逮泟置對泟曰臣侍
罪內禁衛節制故與尙仁直議其侍衛虛疎耳一處云非臣言也尙仁又壓膝乃變其說曰不記曰見領相溫於 上王殿門外言侍衛分屬兩處故甲土不 足宜增爲三千溫以爲然後因事徃溫處又問曰軍土宜歸一處溫以爲然 上王曰果如吾所聞叅判趙末生等曰 二聖慈孝天至此輩欲易軍務其 心難測也 上王命末生徃鞫尙仁曰直不勝苦毒耳其實皆誣也又鞫證久不勝林又誣引公曰臣兄言軍土當歸一處 上王曰首謀者溫也 命召左相
訔久曰所謂一處云者豈指 上王殿耶必指主上殿也即請對盛言公貪權專利狀 上王默然良久曰人情孰不欲貪權左言令日不須發也又 一敎曰尙仁罪重宜置極刑習等視尙仁差輕姑留之以待溫還何如且溫何以處之或曰習等業就伏不可
一日緩刑或曰習等已死溫誰從以辨誣不如留之 以待其還訔曰溫所犯事證明白溫雖還更無可以對證者留之不可 上王用訔言誅習等於是柳廷顯末生等和附於訔或謂 公當奔訴中朝造變或謂公潜還本國而稱亂至設機西邊及公還到我境檻車致之公不知尙仁等已死求與對辨 上王命流水原府 賜後命曰尙仁等已死何從可辨卿王妃 父故只命賜死宜知子意以是年十二月十五日遇禍壽僅四十四初 上王欲禪位而不顯言訔揣知之謂公曰近日 上旨公知之乎 上處事無 有不善終必無患盖其意謂雖內禪可保其終無患也公以白 上上心不義訔而尤惡其與公言也即以啓 上王曰訔非純臣也訔聞之懟公甚及公之死 訔終始搆陷尤力云公臨命戒家人曰吾子孫世世勿與朴氏相婚也噫嘻權壬旣逞于公又請廢 中宮 上王嚴辭斥之曰土庶出嫁無緣坐况國母乎 以故 坤位賴以安 上王敎曰此人誰不可禮葬禮不可不厚遣李陽達卜葬地 命水原府庀葬事 賜棺槨石灰中貴人護喪所在官致祭葬龍仁山 義谷負子之原 文宗元年辛未 敎政院若曰 母后父當載 英陵碑文烏可無職名其令政府議啓左議政皇甫仁右議政南智左贊成金宗瑞左叅贊 安崇善右叅贊許詡等合辭啓曰籍令所坐是實非謀反北况抑勤堪案使不得辨明國人皆寃之特 太宗嚴法以示人耳 世宗重違 父王處分未及伸
白令宜還給職牃又 啓曰宋岳飛我 朝鄭夢周旣雪寃皆贈諡 太宗並從之太常按諡法和好不爭曰安五宗之曰孝 贈公謚安孝 錄其兩子澮決並授敦寧主簿子濬先沒濬子湄授農典直長配三韓國大夫人順興安氏領敦寧府事昭懿公天保女逮公遭禍廷顯固請收孥夫人錄賤 案其後右議政李稷等啓曰 恭妃殿下母儀一國而母安氏在賤案於國軆未安請削賤案還給職牃 世宗召知申事敦在中面諭曰子甞侍坐 太宗太
妃兩殿 太妃曰恭妃母在賤案事甚不可太宗曰子當改之未及施行遽爾 賓天子知 父王意如此而時未施行故不敢開口近日言者多以爲言令」
大臣之言又如此其削賤案還給職牃並免其子女且母子不相見于令累年某日恭妃當往安氏第卿等知之云後以 世宗王后八於世室公之廟至令不 祧官給祭需 國家哀榮之典至此而無餘憾矣夫人墓在安城郡東面加味屯壬坐之原公性仁厚慈順謙恭愛人與物無競及其戚聯 王家愈益歛遜 英廟在東害也公白曰令之土大夫見臣皆致慇懃臣實懼焉要當杜門謝客以畢餘生其遠嫌異愼如此而旣托跡肺腑與國同休戚義不可脫然引去則 公於娟寵而工讒者何哉其亦順受其正而已矣噫自古君子之罹讒禍者或遭時孔囏或昧於炳幾雖其不幸亦有以致之而若公遇鴻昌之治抱明哲之智 卒以不免此公之至寃也且當 世宗朝匹夫匹婦無寃而獨以公所處地嫌故不敢輕戀 先朝事使公議抑欝者數十餘年此公之至寃也然公之伸於天 者遠矣公種德毓慶以錫其子孫奕錫蕃昌乃食其報生女而三登翟褘生男而六居台鼎上焉 日月配明而陰敎彰下焉棟樑支廈而勳業爀沈氏之盛 殆與 國祚而無彊夫以天道之悠遠仁慶之線長而回示公議抑欝之數十年直頃刻間爾公何寃之有撫徃跡而齎至慟者特子孫之私也公之沒距令三 百餘載而墓道之顯樹闕焉雖以家經禍故事多湮晦而後裔之責在焉於是宗人共謀立石以檀屬尊年高托以滋筆不敢辭焉謹摭野史遺記槩述其禍伸 寃本末而公之立朝德業夫人行懿失傳而未擧焉痛哉公三子六女女長 昭憲王后配 世宗母 文宗 世祖又有六大君兩公主不濬領中樞澮領 議政謚恭肅公決領敦寧諡靖夷女姜碩德判書盧物載同中樞柳子偕知敦寧朴崇之知中樞朴去疏知敦寧庶子長壽長已領中樞兩子湄監司淄判官恭 肅三子潾叅議瀚左尹湲判官靖夷一子貞源水使碩德三子五女子希顏府尹希孟贊成希叅婿南俊監察幸潚判事金元臣府使黃春長源君朴楣叅議物 載四子五女子懷愼府使田愼判事思愼領議政好愼牧使婿鄭潔牧使丁湖右軍李宗衍僉正南倫宜寧君鄭溥子偕四子六女子均僉知壤牧使墪僉知塢 監正婿成孝源主簿權瑊花山君柳壽昌判官崔曦僉正河澍佐郞鄭齊監察去疏三子三女子仲善平陽君季善監察叔善中樞婿禹敬宗李聞直長閔泮同 知曾孫以後內外億麗不能盡記畿伯岱死節壬亂司諫太孚叅判演關西伯澤掌令得元佐郞游義湄之後也正言笭抗直疏遭乙已禍府使筍司藝挺豪佐 郞漢弼都事世遇正郞一義潾之後也湲三子敦寧正順道右尹順徑舍人順門以直言被禍燕山時舍人四子長領議政連源次修撰達源已卯名賢次同知 敦寧逢源次左議政通遠也靑陵府院君鋼誕生 仁順王后大司憲義謙判書忠謙待敎忻領議政悅舍人光世靑城君廷和靑雲君命世校理熙世府尹摠 府尹榥叅判枰監司權權之孫靑思府院君浩誕生 端懿王后叅議壽亮注書龜瑞應敎濡兵使澍 贈司書翼大司憲珙右議政壽賢行判書宅賢校理泰 賢持平錥皆連源後也畿伯銓牧使友正畿伯友勝都正視江都葬節判書諿行判書詻佐郞譔應敎東龜承旨光洙持平世鐸監司世鼎副提學攸佐郞栢献 納思泓正言相監司橃奉朝賀檀司成榜承旨樘正得良正字得天佐郞均修撰聖希皆達源後也正字鍵左議政喜壽校理儒行判中樞梓統制使樸判決事 最良監司仲良承旨季良縣監周觀皆逢源後也右尹鐳府使克明承旨彥明皆通源後也典翰義欽司藝源海掌令源河正郞榰皆貞源後也銘曰
木有連抱 山必穹崇 輔道碩德 世必熙鴻 於赫英陵 堯舜我東 敦爲夔龍 緊維先公 篤生聖姙 祐我周宗 憑以日月
契以雲風 乃戚乃相 翼于兩宮 愼謙諱盛 鞠若無躬 棐仁祐謙 可責玄穹 孰貝以錦 孰蹛以蝀 熏胥以織 奇禍乃訌
跼高躋厚 百世餘恫 不沒者善 不埋者忠 欝紆泉壤 後時以通 天道好還 有命崇終 以牃以牢 節惠隨隆 于滌其寃
不顯其衷 屈仲勝負 理實不瞢 直筆在史 永示無窮
九世孫 輔國崇祿大夫 判中樞府事 檀 撰
外 裔 崇政大夫 行戶曹判書 徐明均 書
十三世孫 副司果 錥 謹篆
공의 이름은 온이고, 자는 중옥이다.
청송심씨의 시조는 고려조의 문림랑위위시승 홍부로 그의 아들인 연은 합문지후였고,
연의 아들인 용은 이조정랑으로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에 추봉되었으니 이 분이 공의 조고이시다.
아버지인 덕부는 좌시중으로 특진하여 청성백으로 봉해졌고,
아조에 들어와서 훈작이 내려졌으나 받지 않으셨으며 시호는 정안이었다.
비는 청주 송씨인 청원군 유충의 따님이었고, 계비 문씨는 감문위낭장 필대의 따님이었다.
공은 홍무 을묘년에 태어났으니 계비 문씨의 소생이었다.
12세에 병인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태조 때에 병 · 공조의랑을 역임하였다.
공정 즉위년에 보공장군 용무사 대호군에 제수되었고, 태종 원년 신사에는 본직으로 지합문사를 지냈으며,
4년 갑신에는 대호군으로서 판내시다방사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용양사상호군으로 승직되어 판통례문하사를 겸하게 되었다.
7년 정해에 승정원 동부대언으로 발탁되었다가 좌부로 승직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가선으로 승계되어 좌군동지총제를 배수받았다.
8년 무자에는 잠저에 계신 세종의 비를 명가의 규수 가운데 구함에 있어 공의 장녀가 간택되었다.
11년 신묘에 가정으로 승계되어 풍해도 관찰사를 배수받았고,
돌아와서는 참지의정부사가 되었다가 곧 사헌부 대사헌을 배수받았다.
14년 갑오에는 자헌으로 승계되어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좌군도총제 등을 배수받았고,
정헌대부로 가자되어 이조판서를 지냈다.
18년 무술에는 세종이 세자로 승격되어,
8월에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이 되셨으니, 공은 국구로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상황이 말하기를, “임금의 장인은 그 존엄함이 비할 데 없는 것이니 마땅히 영의정을 배수하고
그 위차는 좌 · 우상이 의논하여 계하라.”하시니,
좌상 박산이 말하길, “그 위차는 창령부원군 성석린의 위에 둠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이 사은사로서 경사로 향할 때 3전에서 각각 내시를 보내어 교외에서 전별하니 이를 보는자가 모두 경도되었다.
11월에 공이 돌아와 복명을 하기 전에 강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처음 상왕이 이미 선위하였으나 군국중사는 모두 상왕에게 품계하도록 명하였는데,
병조에서는 다만 작순사만 품계하고 나머지 일들은 모두 품계하지 않으니,
상왕이 진노하여, “누가 이 일을 주동하였는가?”하시며 금부에 명하여 주동자를 체포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드디어 병조판서 박습, 참판 강상인, 참의 이각 및
여러 낭관들을 잡아다 문초하였으나 자백하지 않으므로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근거 없는 말들이 상왕의 귀에까지 전해지자
다시 상인 등에 대한 국문을 명하여 4차례에 걸쳐 압슬을 행하자, 상인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자백하기를, “우연히 동지총제 심정을 궁문 밖에서 만났는데 정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금위의 결원이 심히 많은데 시위의 허소함을 어찌 제때에 보충하지 않는가?’하여,
신이 말하기를, ‘군사를 한 곳에만 배치한다면 어찌 허소함이 근심되겠습니까?’라고 하자,
정이 말하기를, ‘한 곳에만 배치한다면 군사의 많고 적음이 또한 어찌 문제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정은 즉 공의 동생이니 금부에서 정을 잡아다 대질하자,
정이 말하기를, “신은 임금을 시위하는 내금위절제를 맡고 있으므로
상인과 더불어 그 시위의 허소함을 직접 의논하였을 뿐이고, 일처 운운은 신이 말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상인에게 다시 압슬을 가하자 상인은 다시 지금까지의 말을 바꾸어,
날짜는 분명하지 않지만 영상 심온을 상왕전문 밖에서 만났을 때,
시위 군사가 두 곳에 나누어져 있어서 갑사가 부족하니
마땅히 3천명을 증원하여야겠다고 말하자 온이 그렇겠다고 하였고,
후에 일이 있어 온에게 찾아 갔을 때 다시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하자
온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왕이, “과연 내가 들은 바와 같다.”고 하셨다.
참판 조말생 등이 말하기를, “이성의 자효함이 하늘에 이를 정도인데
이들 무리들이 마음대로 군무를 바꾸고자 하니 그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상왕이 말생에게 명하여 상인의 국문을 하도록 하자,
상인이 말하기를, “사실 고통을 이기지 못하였을 뿐으로 실상은 모두 거짓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정을 국문하자 정이 매를 이기지 못하고 무고하게 공을 끌어들여 말하기를,
“신의 형이 군사는 마땅히 한 곳으로 귀속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라고 하자,
상왕은 “주모자는 온이다.”라고 하시며 좌상 산을 부를 것을 명하셨다.
산이 말하기를, “소위 일처라는 것이 어찌 상왕전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반드시 주상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하며
독대를 청하여 여러 가지로 공이 권세와 재물을 탐하고 있음을 말하였다.
상왕이 오랫동안 아무 말 없이 있다가 이윽고 “사람으로 권세를 탐하지 않을 이가 누가 있겠는가,
좌상의 말을 들으니 이것이 오늘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로구나!”하시며,
교를 내리기를, “상인의 죄가 중하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고,
습 등은 상인에 비해 그 죄가 가벼우니 잠시 보류하여 온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떠하겠는가!”하셨다.
또한 온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어떤 이는 습 등이 죄상을 자복했으니
하루라도 형을 늦추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습 등을 죽인다면
온은 누구를 상대로 무고한지를 가릴 수 있겠느냐며 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산이 말하기를, “온의 죄상은 사실이 명백하게 증명하므로
온이 비록 돌아오더라도 다시 뒤집을 수는 없으니 보류한다는 것은 불가합니다.”라고 하니,
상왕이 산의 말을 따라 습 등을 주살하였다.
이에 유정현, 조말생 등이 산에게 부화뇌동하여 혹은 공이 분주하게 중국에 호소하여 조변을 꾀한다 하기도 하고,
혹은 공이 암암리에 본국에 돌아와 난을 칭하며 서변에서 책략을 꾸미고 있다고 하기도 하였다.
공이 돌아와 국경에 이르게 되자 함거로 압송되었으나,
공은 상인 등이 이미 죽은 것을 알지 못하여 대변하기를 구하였으나,
상왕은 수원부에 유배하여 사사할 것을 명하면서, “상인 등은 이미 죽었으니 어찌 가히 가릴 수 있겠는가,
경은 왕비의 부이므로 단지 사사만을 명하는 것이니 마땅히 나의 뜻을 알라.”고 하셨다.
이해 12월 25일에 사사되었으니 연세가 겨우 44세였다.
처음 상왕이 선위하고자 하였으나 이를 말로써 드러내지 않았는데
산이 이를 헤아려 알고서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근일의 임금의 뜻을 공은 알고 있습니까,
임금께서 일을 처리하심이 선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끝내는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 뜻이 비록 선위라고 하지만 확실한 보장을 받아야만 끝내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공이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께서 산을 의롭지 못하게 여기고 또한 공과 더불어 그러한 말을 한 것을 미워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산은 사심이 없는 신하가 아니로다.”라고 하셨다.
산이 이를 듣고 공을 심히 원망하였는데, 공이 죽음을 당하게 되자 산은 시종 모함하는데 더욱 힘을 쏟게 되었다.
공이 임종하는 자리에서 가인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자손들은 세세토록 박씨와는 서로 혼인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아! 권임이 이미 공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는데 다시 중궁을 폐할 것을 청하자,
상왕이 엄히 이를 물리치며 “사서의 아녀자도 출가하면 연좌됨이 없는데 하물며 국모임에 서랴.”고 하셨다.
상왕이 교를 내리기를, “이 사람을 비록 예장할 수는 없지만 장례는 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시며,
이양달을 장지에 보내고 수원부에 명하여 장례 일을 돌보도록 하였으며 관곽과 석회를 하사하고
귀인을 골라 호상토록 하며 소재지의 관에서 치제토록 하였다. 장지는 용인 산의곡 부자의 언덕이다.
문종 원년 신미에 정원에 내린 교에서 대략 말하기를
모후부가 영릉의 비문에 마땅히 실려야 하거늘 직명이 없는 것이 어찌 가하겠는가.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계하라 하셨다.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김종서, 좌참산 안숭선, 우참찬 허후 등이 합계하여,
“가정 만으로 연좌되어 실제로 꾸민 일이 아니면서 도리어 억울하게 죄를 썼고,
사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느라 변명조차 하지 못하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원통하게 여깁니다.
특히 태종임금께서 법을 엄히 집행하여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 것뿐이며,
세종임금께서는
부왕의 처분을 어길 수 없어서 신원되지 못하였으니 지금 직첩을 환급함이 마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계하기를, “송나라의 악비, 우리나라의 정몽주는 이미 설원되어 모두 시호를 추증받았는데
태종임금께서 아울러 허락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상시에서 시법을 살피니 화호부쟁함을 안, 오종을 효라 하니,
공의 시호를 안효로 추중하고
공의 두 아들을 기록하여 회, 결은 모두 돈녕주부를 제수하였고,
준은 앞서 죽었으므로 그의 아들 미에게 농전직장을 제수하였다.
공의 배인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는 영돈녕부사 소의공 천보의 따님이다.
공이 화를 당하자 조정에서 주청하여 그 자식들은 노비로 삼고 부인은 천안에 기록되었다.
그 후 우의정 이직 등이 계하기를, “공비 전하는 한나라의 모범인데 그 어머니 안씨가 천안에 있는 것은
국체에 미안한 일이오니 청컨대 천안에서 삭제하고 직첩을 환급하소서.”라고 하였다.
세종임금이 지신아 곽존중을 불러 면유하기를, “내가 일찍이 태종, 태비 양전을 모시고 있는 자리에서
태비께서 공비의 모친이 천안에 있는 것은 심히 불가한 일이라고 말씀하시자,
태종임금은 내가 마땅히 이를 고쳐야 하지만 아직 시행하기에는 미급하니 내가 빨리 세상을 떠야 한다고 하시니,
내가 부왕의 뜻이 이와 같음을 알고 아직 때가 아니므로 감히 입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근일에 이를 말하는 자가 많고 지금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천안에서 삭제하게 직첩을 환급하며 아울러 그 자녀를 면천시키도록 하라.
또한 모자가 서로 만나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날을 정해 공비가 직접 안씨 집을 행차하도록 할 것이니 경등은 그렇게 알고 있으라.”하셨다.
후에 세종왕후께서 돌아가시고 공의 묘는 지금까지 천묘되지 못하였다가 관에서 제수를 지급하고
국가에서 애도하는 은전을 베푸니 이에 이르러 여한이 없게 된 것이다.
부인의 묘는 안성군 동면 가미둔 임좌의 언덕에 있다.
공은 천성이 인후하고 자순하면서도 겸공하여 남을 사랑하고 이익을 위해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으며,
왕가와 척련을 맺게 되면서부터 더욱 근검하고 겸손하셨다.
영묘가 동궁에 계실 때 공이 아뢰기를,
“지금 사대부들이 신을 대함이 모두 지극히 은근하여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하셨다.
요컨대 두문사객하면서 여생을 마치고 싶다는 것으로 의혹을 멀리하고자 하는 남다른 신중함이 이와 같았으며,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나라의 휴척을 같이 하고 의로움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러나 물러나 있으면 또 그렇게 해서 임금의 환심을 사려 한다고 헐뜯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공은 이러한 모함 역시도 순순히 받아 드렸을 뿐이다.
아! 자고로 군자가 참화에 걸리는 것은 혹 매우 어려운 시대를 만나거나 혹 권세를 탐하거나 해서 이니,
비록 불행한 일이지만 역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이지만,
공은 홍창의 치하에 명철한 지혜를 갖추고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지극한 원통함이다.
또한 세종 때에 필부필부라도 원통함이 없었는데 유독 공만이 처한 처지로 인해 의혹을 받았으니,
감히 선조의 일을 가볍게 바꿀 수는 없는 것이지만
공의로 수십 년간 억울함을 당하였던 것이 또한 공의 지극한 원통함이다.
그러나 끝내는 공의 억울함이 풀어지고,
공이 뿌리고 기른 덕과 선행은 그 자손에게 내려 크게 번창하게 됐으니 그 보답인 것이다.
딸을 낳아 적위에 오르고, 아들을 낳아 대신의 지위에 이르니,
위로는 일월이 음으로 양으로 짝하여 밝게 드러나게 한 것이며,
아래로는 나라의 동량이 되어 찬란하게 훈업을 이룬 것이니,
심씨의 융성함은 나라의 흥함과 더불어 끝이 없을 것이리라.
대저 천도는 유원하고 인경의 선은 긴 것이어서,
도리어 수십 년의 억울함은 다만 경각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보여주니 공이 어찌 원망함이 있으리오.
지나간 자취를 어루만지면서 지극한 서러움을 지닐 이가 사사로운 자손들뿐이겠는가.
공이 돌아가신지 어언 300여년이 지나도록 묘도의 현수가 없으니,
비록 집안이 화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공의 행적이 없어짐은 후예들의 책임인 것이다.
이에 종인들이 함께 도모하여 비석을 세우고 단으로 하여금 연고한 어른을 모셔 자필을 맡기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근근이 야사와 유기에서 주워 모아 그 피화, 신원의 본말과 공의 입조,
덕업의 사실을 기록하였으나, 부인의 행의에 대해서는 실전하여 기록하지 못했으니 실로 애통한 일이다.
공은 3남 6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소헌왕후로써 세종의 배이며 문종의 어머니이시다.
세조는 또 여섯 대군과 두 공주를 두셨다.
아들 준은 영중추, 회는 영의정으로 시호는 공숙공이며, 결은 영돈녕으로 시호는 정이이다.
딸은 판서 강석덕, 동중추 노물재, 지돈녕 유자해, 지중추 박숭지, 지돈녕 박거소에게 각각 출가하였고,
서자로 장수, 장기가 있다.
영중추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감사 미와 판관 치이며,
공숙공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참의 린, 좌윤 한, 판관 원이며, 정이공은 한 아들을 두었으니 수사 정원이다.
강석덕은 3남 5녀를 두었으니 부윤 희언, 찬성 희맹, 그리고 희참과,
사위는 감찰 남준, 판사, 신축, 부사 김원신, 장원군 황춘, 참의 박미이다.
소물재는 4남 5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부사 회신, 판사 전신, 영의정 사신, 목사 호신이며,
사위는 목자 정결 우군 정호, 첨정 이종연, 의령군 남윤, 정부이다.
유자해는 4남 6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첨지 균, 목사 양, 첨지 돈, 감정 오이며,
사위는 주부 성효원, 화산군 권감, 판관 유수창, 첨정 최희, 좌랑 하주, 감찰 정제이다.
박거소는 3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평양군 중선, 감찰 계선, 중추 숙선이며,
사위는 우경종, 직장 이문, 동지 민박이다. 증손 이후는 내외 모두 수효가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임란에 사절한 기백 대, 그리고 사간 태부, 참판 연, 관서백 택, 장령 득원, 좌랑 유의는 미의 후손이며,
직소하였다가 을사년에 화를 당한 정언령,
그리고 부사 순, 사예 정호, 좌랑 한필, 도사, 세우, 정랑 일의는 린의 후손이다.
원은 3남을 두었으니 돈녕부정 순도, 우윤, 순경, 사인 순문인데 순문은 연산시에 직언하였다가 화를 입었다.
사인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영의정 연원이고 차남은 수찬 달원으로 기묘명현이었으며,
3남은 동지돈녕 봉원, 4남은 좌의정 통원이다.
인순왕후를 탄생한 청릉부원군 강, 대사헌 의겸, 판서 충겸, 대교, 혼, 영의정 열,
사인 광세, 청성군 정화, 청운군, 명세, 교리 희세, 부윤 총, 부윤 황, 참판 평, 감사 권,
그리고 단의왕후를 탄생한 권의 손자 청은부원군 호, 참의 수량, 주서 귀서, 응교 유, 병사 주, 증사서 익,
대사헌 공, 우의정 수현, 행판서 택현, 교리 태현, 지평 육은 모두 연원의 후손들이다.
기백 전, 목사 우정, 기백 우승, 도정, 시, 판서 즙, 행판서 액, 좌랑 선, 응교 동귀, 승지 광수, 지평 세탁,
감사 세정, 부제학 유, 좌랑 백, 헌납 사홍, 정언 상, 감사 발, 봉조하 단, 사성 방, 승지 당, 정득 낭정자 득천,
좌랑 균, 수찬 성희는 모두 달원의 후손들이다.
정자 건, 좌의정 희수, 교리 유, 행판중추 재, 통제사 박, 판결사 최량, 감사 중량, 승지 계량,
현감 주관은 모두 봉원의 후손들이며, 우윤 뢰, 부사 극명, 승지 언명은 모두 통원의 후손들이다.
또한 전한 의흠, 사예 원해, 장령 원하, 정랑 지는 모두 정원의 후손들이다.
명하기를,
나무에 여러 아름이 있고 산에도 반드시 높은 봉우리가 있듯이,
도를 돕고 덕을 높이 쌓은 이를 세상에서는 반드시 희홍이라 부르리니.
찬연한 영릉이여, 동방의 요순이로다.
누가 기룡이라 하는가, 긴절히 공에게 매여 있도다.
정성으로 왕비를 잉태하사 두루 조종을 도우셨네.
해와 달에 의지하고, 구름과 달을 맺었으며
척신이며 재상이니, 양궁의 날개로다.
근신과 겸손으로 이름을 드높이고, 정성으로 몸을 바침이 끝이 없었네.
어짊으로 돕고 겸양으로 보우하시니 가히 하늘을 떠받치려는가.
누가 비단으로 옷을 지으며, 그 누가 제 지내 무지개를 그리는가.
억울하게 연루되어 죄를 받으니 뜻밖의 재난이 어지러울 뿐이네.
몸을 구부리고 발끝으로 걷더라도 원통함은 백세토록 남으리나.
없어지지 않는 것이 선이요, 감출 수 없는 것이 충이러니.
물이 막힌 샘에서도 어느 때인가는 통하는 것처럼
천도는 언제나 좋게 돌아오는 법, 정중하게 송종하라는 왕명이 있었도다.
직첩으로 쇠름으로, 은전은 따라서 융숭해지니
억울함은 씻었어도 슬픔은 드러내지 않았네.
굽히고 펴고 이기고 지는 것이, 그 이치가 실은 어두운 것이 아니었으니,
사서에 바르게 써서, 영원히 궁하지 않음을 보이리라.
9세손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단 찬하고
외예 숭정대부 행 호조판서 서명균 쓰고
13세손 부사과 육 삼가 전하다.
숭정기원후 104년(영조 13, 1737년) 월 일
有 朝鮮國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 領書雲觀事靑川府院君 贈諡安孝沈公之墓
유 조선국대광보국숭록대부영의정부사 영서운관사청천부원군 증시안효심공지묘
안평대군 이용 서
安平大君 李瑢 書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음>
//청송심씨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 가계//
고조부 : 문림랑공 심홍부(文林郞公 沈洪孚) 청송심씨 시조
증조부 : 합문지후공 심연(閤門祗侯公 沈淵)
할아버지 : 전리정랑 증 문하시중 청화부원군 심용(典理正郞 門下侍中 靑華府院君 沈龍)
아버지 : 문하찬성사 청성부원군 청성백 심덕부(門下贊成事 靑城府院君 靑城伯 沈德符)
어머니 : 변한국대부인 청주송씨, 청원군 송유충(淸原君 宋有忠)의 따님
친어머니 : 인천 문씨(仁川 門氏), 감문위낭장 문필대(監門衛郞將 門必大)의 따님
형님 : 좌군도총재 심인봉(沈仁鳳)
형님 : 숭룩의금부판사 심의구(沈義龜)
형님 : 심계년(沈繼年)
형님 : 인수부윤 심징(沈澄)
동생 :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悰)
동생 : 중군동지총제 심정(沈泟)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領議政 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
부인 :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三韓國大夫人 順興安氏, ?~1444)
(안성시 향토유적 제30호)소재지: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32-1
1자 장남 영중추부사 심준(領中樞府事公 沈濬)---------------심미(沈湄), 심치(沈淄)
2자 첫째사위 충녕대군 세종, 조선왕족 전주 이씨-----------정소공주,문종,세조,안평대군,광평대군
3자 둘째사위 지돈녕부사 강석덕, 진주 강씨------------------강희안, 강희맹
4자 셋째사위 동지돈녕부사 노물재, 교하 노씨----------------노사신(盧思愼)--노공필(盧公弼)
5자 넷째사위 부지돈녕부사 유자해, 진주 류씨----------------유양(柳壤)---유순정(柳順汀)
6자 다섯째사위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이숭지, 전의 이씨----------무후无后
7자 여섯째사위 부지돈녕부사 박거소, 순천 박씨----------------박중선(朴仲善) --
8자 차남 의정부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靑松府院君 恭肅公 沈澮)-심인,심한,심원
9자 삼남 판중추부사 정이공 심결(判中樞府事 靖夷公 沈決)-------------------심정원
원주-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청송심씨 (0) | 2019.1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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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청송심씨용담공손사평공파 납골묘역,심기,심의검,심융,심대형,심연,심서견,심득원,심택,심서규,심윤원,심수근,심유인,심식,심즙 (0) | 2018.09.17 |
고양-증 좌찬성 심봉원(沈逢源),증 이조참판 심창수(沈昌壽), 이조참판 심욱(沈旭) (0) | 2016.11.18 |
고양-심건,심희수,일타홍,심창,심최량,심주관 (0) | 2016.11.18 |
파주-심지홍,심정규,심이진, 심원목-심종설,심종익,심종성 (0) | 2016.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