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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청송심씨

청송심씨

by 碧巖 2019. 12. 3.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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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산42-1

 

 

 

 

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

1587(선조 20) ~ 1632(인조 10)

본관은 청송(靑松). 는 덕용(德用).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현손이고, 심강(沈鋼)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심의겸(沈義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심엄(沈㤿)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따님이다.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1623(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운군(靑雲君)에 봉하여졌다.

공조좌랑·형조좌랑·사복시첨정 등을 역임하고 공신으로 책록된 다음,

통정대부 겸 오위장이 되었다가 곧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라 부총관을 겸하였다.

 

1624년(인조 2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환도한 뒤에는 가의대부에 승계되어, 공조참판으로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그 뒤 세자빈의 가례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석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위대장으로 인조를 강화에 호종하고,

환도한 뒤 내섬시제조(內贍寺提調)를 겸하고 원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奮忠贊謨立紀明倫淸社功臣工曹參判靑雲君贈 議政府左參贊諡忠景沈公命世墓 貞夫人全州李氏祔左

분충찬모립기명륜청사공신공조참판청운군증 의정부좌참찬시충경심공명세묘 정부인전주이씨부좌

    

 

 

 

 

 

 

 

 

 

 

 

 

 

 

 

靑雲君沈公神道碑銘幷序

청운군심공신도비명병서

계곡 장유(鷄谷 張維)

낙전당 신익성(樂全堂 申翊聖)

有明朝鮮國奮忠贊謨立紀明倫淸社功臣 贈資憲大夫議政府左贊成兼 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都摠管行

유명조선국분충찬모립기명륜청사공신 증자헌대부의정부좌찬성겸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도총관행

嘉義大夫工曹參判兼 五衛都摠府副摠管 靑雲君沈公神道碑銘幷序

가의대부공조참판겸 오위도총부부총관 청운군심공신도비명병서

奮忠贊謨立紀靖社功臣正憲大夫新豊君兼 知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張維 ,

분충찬모립기정사공신정헌대부신풍군겸 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장유 찬

光德大夫車陽尉 申翊聖 書 篆額

광덕대부거양위 신익성 서 전액

 

청운공(靑雲公)이 졸하자 장례를 치르고 나서 비명(碑銘)을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해 왔다.

그때 내가 예의상 사양하기는 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응낙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병에 걸려 하마터면 온전해지지 못할 뻔하다가

한참 뒤에야 다행히 조금 차도가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벌써 공의 묘소에 풀이 두 번이나 묵고 난 뒤였다.

그 무렵 공의 두 계씨(季氏)가 행장(行狀)을 가지고 찾아와서 말하기를,

빗돌을 이미 삼가 갖추어 놓고 이제 글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굳이 청하는 바입니다.”하였다. 

, 나는 공과 동년생(同年生)이다. 그런데 소싯적에는 겨우 한두 번 얼굴만 알고 지내다.

계해년(1623, 인조 1)에 이르러 함께 일을 하며 주선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야 공의 재지(才智)와 기개(氣槩)가 그야말로 출중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함께 본조(本朝)에서 일하는 동안 공의 심사(心事)를 충분히 살펴볼 기회를 가졌는데,

공이 꾸밈없는 충심으로 과감하게 발언하는 것이야말로 더더욱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을 또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공이 죽고 나서 평소의 행적을 자세히 듣게 됨에 미쳐서는

그 내행(內行)이 워낙 완벽해 아무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알게 되었다.

 

대체로 나는 공에 대해서 사귀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모르던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공이 죽고 나서야 공의 완전한 면모를 알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제 모두 끝났으니 내가 어떻게 차마 공의 묘비명을 쓸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묘비명을 쓰지 않아 나에게 부탁해 온 공의 행적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일을 또 어떻게 차마 할 수가 있겠는가.

 

공의 휘()는 명세(命世), ()는 덕용(德用)이다.

심씨(沈氏)는 청송(靑松)의 망족(望族)인데,

고려 말의 청성백(靑城伯) 심덕부(德符)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현달하기 시작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 심()과 휘 심회() 두 분이 2세에 걸쳐 잇따라 영의정이 되고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로부터 또 3세를 지나 충혜공(忠惠公) 심연원(連源)에 이르러서도 영의정에 임명되었는데,

이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여기에서 휘 심강()이 태어났는데 국구(國舅)로서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고,

여기에서 휘 심의겸(義謙)이 태어났는데 명종선조 연간의 명신(名臣)으로 대사헌의 관직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휘 심엄(㤿)이 태어났는데 관직을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마쳤으나

공의 훈귀(勳貴)로 인하여 영의정에 증직되고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세부(世父 백부(伯父))인 군수 심인겸(仁謙)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부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좌찬성으로 영의정을 증직받은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문의공(文懿公) 구사맹(思孟)의 딸인데,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 20)에 공을 낳았다.

그런데 문의공으로 말하면 실로 인헌왕후(仁獻王后 인조(仁祖)의 생모)를 탄생시킨 분이니,

공과 금상(今上)은 따라서 이종(姨從) 형제간이 되는 셈이다.

 

공은 어린아이 시절부터 출중하게 영걸스러웠다.

() 황 문민공(黃文敏公 황신(黃愼))에게 수학(受學)하였는데,

문민공이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극구 칭찬하였다. 자라나서는 큰 체격에 풍채가 아름다웠으며,

기개가 굳세고 의로운 행동을 좋아하여 옛날 협사(俠士)의 풍모가 있었다.

 

계축년에 집안이 참화로 이로부터 과거공부를 포기한 채 이리저리 떠돌며 나그네 생활을 하였다.

광해(光海)가 대비(大妃)를 유폐(幽廢)시킨 뒤 더욱 심하게 난정(亂政)을 행하자

금상(今上)께서 여러 원훈(元勳)들과 은밀히 대계(大計)를 정하였는데 이때 공도 참여하였다.

 

그러다가 계해년 3월에 대의(大義)를 떨치고 일어날 때,

공이 그동안 모집해 두었던 병력을 비장(裨將)에게 맡겨 서쪽 교외에 집결토록 하는 한편,

공 자신은 대가(大駕)를 맞이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부지런히 주선하며 계책을 내어 보좌한 공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특히 더 많았다.

 

공조형조의 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복시 첨정이 되었으며,

책훈(策勳)되어 분충찬모입기명륜정사공신(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의 호를 하사받고

특별히 통정대부의 품계로 뛰어오르면서 오위장(五衛將)을 겸하였다.

뒤이어 가선대부의 품계로 올라가는 동시에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지고 부총관(副摠管)을 겸하게 되었다.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인하여 상이 공산(公山)으로 행행(幸行)할 때

공이 운검(雲劍)의 직책을 수행하여 호종(扈從)하였다.

대가(大駕)가 수원(水原)에 이르러 밤이 깊었을 무렵 상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는데,

조정 신하들이 미처 알지 못한 상황에서

공이 동틀 때까지 옆에서 보살피며 지극 정성으로 충성스럽게 애를 썼다.

적을 평정하고 도성으로 돌아온 다음 가의대부로 품계가 오르면서

공조 참판으로 호위장(扈衛將)을 겸하였다.

 

장차 세자빈(世子嬪)을 책봉하려 할 때 윤씨(尹氏)의 딸이 선발에 뽑혔는데,

그의 종형(從兄) ()가 역모를 꾀하다 죽음을 당했으므로

그 아비도 마땅히 연좌법(連坐法)에 따라 해면(解免)되어야 할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에 공이 경연(經筵)에서 모실 적에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의 배필은 훌륭한 가문에서 가려야 마땅하니,

악역(惡逆)을 범한 집안을 선발 대상으로 삼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하였는데,

상이 공의(公議)를 무시할 수 없어 마침내 가례(嘉禮)를 정지시키긴 하였으나,

공 역시 이 때문에 죄를 얻어 충주(忠州)로 귀양하게 되었다.

이 일과 관련하여 대신과 대간(臺諫)이 쟁집(爭執)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는데,

이듬해에 가서는 결국 공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정묘년에 오랑캐가 쳐들어오자 공을 서용(敍用)하는 동시에

훈작(勳爵)과 봉호(封號)를 복구시켜 주도록 명하고 호위장(扈衛將)을 겸하게 하였다.

대가가 강도(江都)에서 돌아온 뒤 내섬시 제조를 겸하였다.

그리고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외방에 나가 몇 달을 잘 다스렸으나

마침 병에 걸리는 바람에 면직되어 돌아왔다.

 

처음에 목릉(穆陵 선조(宣祖)의 능)이 완성되었을 적에

장법(葬法)으로 보면 절지(絶地)에 해당된다고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가)가 많이 말하였고,

또 사관(祠官) 역시 장맛비가 올 때면 능 위의 벽돌을 이은 틈새에서 번번이 물이 솟구쳐 올라온다.’

하였으므로 공이 이를 듣고는 늘 걱정해 오다가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여

영릉(英陵 세종(世宗)의 능)의 고사(故事)대로 다시 길한 지역을 고르도록 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 일을 조정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을 때에도 아무런 이의(異議)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구릉(舊陵)을 파헤치고 보니 물이 전혀 나오지 않자,

논자들이 산릉(山陵)에 대해서 공이 함부로 의논을 꺼냈다고 맹렬하게 공격을 가해 왔는데,

상은 공에게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고는 끝까지 그들의 요구를 윤허하지 않았으며,

공이 소장을 올려 자신을 탄핵하였을 때에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려 주었다.

 

공은 원주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해수병(咳嗽病)을 앓아 왔는데

그 뒤 3년이 경과하는 동안 병세가 계속 악화되었으나 정신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그리고 조가(朝家)의 잘못된 일을 들을 때마다 문득 하루 종일 분개하며 노여워하곤 하였는데,

언젠가 말하기를,

 

내 병으로 말하면, 흉중(胸中)에 걸려 있는 근심 걱정은 하나도 없는데 오직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만은

 나 자신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어쩌면 이것이 또한 하나의 장애(障碍)로 작용했는지 모를 일이다.”하였다.

그러다가 임신년 42일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지자 마침내 후사(後事)를 여러 아우들에게 부탁하였는데,

집안 사람들이 둘러서서 눈물을 흘리자 공이 제지하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일인데 뭐가 슬퍼서 우는가.”하였다. 죽었을 때의 공의 나이 고작 46세였다.

장차 염습(斂襲)을 하려고 하여 옷상자를 열어 보니 속옷 두 벌밖에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친우들이 공동으로 수의(襚衣)를 마련해 주어서야 염습을 마칠 수 있었는데,

이를 본 자들이 그래서 더더욱 공의 청렴함과 검약 정신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부음(訃音)이 위에 전해지자 부의(賻儀)를 보내고 예법에 맞게 조제(弔祭)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이해 모월 모일에 유사(有司)가 장례 물품을 갖춘 가운데

원주 검단리(劍壇里) 모향(某向)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부인 완산이씨는 정랑 이유청(幼淸)의 따님으로서 11녀를 낳았는데,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공의 막내동생 심희세(煕世)의 아들 심격()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제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는다.

 

공은 성품이 소탈하고 진실한 위에 시원시원하고 솔직했으며 행동은 마냥 독실하기만 하였다.

중씨(仲氏)가 계축년의 옥사(獄事)에서 죽음을 당하고

백씨(伯氏) 역시 연좌되어 귀양을 가는 등 온 집안에 기막힌 불행이 잇따라 일어나자

공이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거두어 보살피는 한편,

집안의 일을 경영하는 데 있는 정성을 모두 기울였다.

 

선부인(先夫人)이 남중(南中 경기도 이남 지역)에서 별세하자

공이 예법을 벗어나 지나치게 슬퍼하며 몸을 상한 가운데 미음만 들면서 상()을 마쳤다.

그리고 능창(綾昌 인조(仁祖)의 동생)이 감옥 안에서 죽었을 때에는

 친척들이 모두 겁에 질린 나머지 감히 위문하지도 못하였는데,

공이 직접 나아가 시신(屍身)을 거두고 장례를 치러 주었으므로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이 그 의리에 감격하여 늘상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공은 또 재물을 가볍게 보고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다른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이를 자기 일처럼 급하게 여겨 화()를 당하지 않도록 구해 주곤 하였는데,

정작 자신은 덕을 베풀었다고 여기지를 않았다.

 

나라가 중흥(中興)된 이후 왕실과 가까운 척족(戚族)의 신분으로

성스럽고 밝은 임금을 모시면서 더욱 발분하여 힘을 기울였고

일이 일어날 때마다 강직하게 발언하며 권귀(權貴)도 아랑곳 없이 비난을 가하곤 하였다.

그리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도 공이 번번이 할 말을 다하면서

화복(禍福)이나 훼예(毁譽) 따위는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공을 더더욱 물어뜯으려고 하였으나,

공을 아는 이들은 공이 세상을 떠난 뒤로 더욱 추모하며 애석하게 여겼다.

, 이 정도면 나의 명()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심씨는 청성백(淸城伯) 이후부터 / 沈自靑城

대대로 고관 대작 배출되었고 / 世載高勳

외가의 집안 역시 / 任姒之門

명신의 가문으로 이름 높았네 / 亦有名臣

대사헌 지낸 당당한 조부 / 堂堂都憲

명성에 걸맞는 복록 누리지 못했는데 / 祿不配名

그 뒤를 이은 훌륭한 손자 / 良孫繼之

뛰어난 식견에 기량 역시 대단했네 / 識通器閎

계해년 대사 일으켜 / 癸亥之事

인륜을 바로잡을 때에 / 人紀再正

공이 금상(今上) 도와 / 公扶日轂

온 누리 정화시켰지요 / 八區鏡淨

공신에 책훈되고 큼직한 봉호 받아 / 策勳疏封

선조들 더더욱 빛나게 하였는데 / 有光先烈

원훈(元勳)이 될 공적 어찌 없었으랴만 / 豈無元功

인척(姻戚)이요 근밀(近密)해서 그렇게 되었다오 / 公戚且密

말하기 어려운 일 / 事有難言

사람들 머뭇거릴 때에 / 萬口囁嚅

공이 직설적으로 말하면서 / 公奮直詞

나라 위한 마음으로 내 몸 돌보지 않았지요 / 殉國忘軀

말은 채용이 되었어도 / 言則用矣

탈 잡혀 낭패당했는데 / 身覆罹愆

병될 게 또한 뭐 있으랴 / 亦奚病焉

하늘이 알고 계시는 걸 / 知我者天

약삭빠른 인간들 피해 가는 길 / 巧夫所避

군자는 떳떳이 걸어가나니 / 君子是循

이는 오직 자신의 신념을 실행하는 것 / 唯其自信

처음엔 굽혀져도 결국 펴지게 마련이지 / 始屈終伸

어찌하여 오래 살아 / 胡不壽考

우리나라 잘되게 돕지 않았는고 / 輔我王國

슬픈 마음 시로 지어 / 作詩孔哀

빗돌에 새기노라 / 爰刻山石

 

靑雲公卒旣葬以顯刻之銘屬諸維維禮辭而心諾之無何遘疾幾不全久之幸少間而公之墓草已再宿矣

公之二季以狀來曰石已謹具惟文成是須敢固以請嗚呼維與公同年生少時僅一再識面及癸亥同事

獲與之周旋於是始知公之才猷氣槩實有過人者旣而同立本朝孰瞯公心事乃知忠樸敢言益有不可及者

及公沒而細聞其生平則知其內行之備尤出於人蓋維於公交之彌久而知之漸深有旣沒而後悉者今已矣

維固不忍銘公墓卽不銘而負存沒之託亦何忍也公諱命世字德用沈氏望靑松麗之季

有靑城伯德符始大顯入我朝有諱溫諱澮比二世位領議政封府院君又三世而至忠惠公連源亦拜領議政

是爲公高祖生諱鋼以國舅封靑陵府院君生諱義謙官大司憲爲明宣間名臣生諱㤿官終玉果縣監

以公勳貴贈領議政靑川府院君爲世父郡守仁謙後娶綾城具氏左贊成贈領議政綾安府院君文懿公思孟之女以萬曆丁亥生公文懿公實誕仁獻王后故公於今上爲從母昆弟公自兒時英偉不群從故黃文敏公學

文敏亟稱其遠器及長長身美風儀倜儻好誼有古節俠風癸丑酷遘家禍自是棄擧子業湛浮客遊

光海旣幽閉太妃昏亂益甚今上與諸元勳密定大計公亦與焉及癸亥三月將擧大義公悉以所收募付裨將

會于西郊而身自迎駕入城其周旋密勿贊襄謨畫之功視諸人特多歷拜工刑二曹佐郞正郞司僕寺僉正

策勳賜奮忠贊謨立紀明倫靖社功臣號特超通政大夫兼五衛將尋進階嘉善封靑雲君兼副摠管李适反

上幸公山公以雲劍扈從駕次水原夜已深上忽不豫廷臣未及知公達曙侍左右忠勞最篤賊平還都

陞嘉義階工曹參判兼扈衛將將冊世子嬪尹氏女中選而其從兄某作逆死其父當隨坐而免

公侍經筵進啓曰配德儲君當擇令族家犯惡逆者不宜廁其選上無以奪公議遂停嘉禮

然公亦以是得罪謫忠州大臣臺諫爭之不能得明年放還丁卯胡寇至命敍復勳封兼扈衛將駕自江都還

兼內贍寺提調出爲原州牧使居數月治理流聞會被疾免歸初穆陵旣成堪輿家多言於葬法爲絶地

祠官又言每値潦雨陵上石甃縫隙輒有涌水公常聞而憂之至是上疏請依英陵故事改卜吉兆事下朝無異議

及啓舊陵乃無水論者謂公妄議山陵攻之甚力上察公無它竟不許公陳疏自劾又優答之

公自原州時已病咳閱三歲寢加而神明不損每聞朝家有闕失輒憤咤彌日嘗曰吾病矣胸中無復滯慮

唯憂國一念不能自遣豈此亦一障也耶壬申四月二日疾革遂以後事屬諸弟家人環泣公止之曰

死生常理何悲泣爲卒年四十六將斂發笥唯有二襦親友共襚之乃克斂觀者於是益服公廉儉云訃聞

贈賻弔祭如禮用是歲某月日有司備物葬于原州劍壇里某向之原夫人完山李氏正郞幼淸之女生一男一女

皆夭以季弟煕世男格爲後纔數歲公資性疏亮易直篤於行誼仲氏死於癸丑之獄伯氏亦坐謫

一門死喪相繼公收恤孤惸經紀家事能盡其心力先夫人沒于南中公哀毀踰禮以溢糜終喪綾昌之幽死也

親戚怵迫莫敢問公爲躬莅斂窆章陵感其義常爲泣下輕財好施急人之阨難能脫人於禍而不自以爲德

中興以來自以親居肺腑上際聖明益發舒自奮遇事侃侃言議譏刺不避權貴國有大事人所不敢言者

公輒盡言之終不以禍福毀譽撓其志故不相悅者滋欲齮齕之而知之者沒世之後益追思悼惜焉嗚呼

是可銘也已銘曰

 

沈自靑城世載高勳任姒之門亦有名臣堂堂都憲祿不配名良孫繼之識通器閎癸亥之事人紀再正

公扶日轂八區鏡淨策勳疏封有光先烈豈無元功公戚且密事有難言萬口囁嚅公奮直詞殉國忘軀

言則用矣身覆罹愆亦奚病焉知我者天巧夫所避君子是循唯其自信始屈終伸胡不壽考輔我王國

作詩孔哀爰刻山石

 

//청송심씨 안효공파 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 가계//

   8대조 영의정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安孝公 沈溫)

   7대조 영의정 청송부원군 공숙공 심회(恭肅公 沈澮)

   6대조 증 좌찬성 심원(沈湲)

   5대조 증 영의정 심순문(沈順門)

    고조부 영의정 충혜공 심연원(忠惠公 沈連源)

    증조부 증 영의정 청릉부원군 익효공 심강(翼孝公 沈鋼)

할아버지 온양군수 증 좌승지 심의겸(沈義謙

   아버지 증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 영의정 청천부원군 심엄(沈㤿

   어머니 증 정경부인 능성구씨,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따님

               청운군 충경공 심명세(靑雲君 忠景公  沈命世)

               정부인 전주이씨, 정랑 이유청(李幼淸)의 따님

                     장남 여주목사 심추(沈樞), 생부 심희세(沈熙世)

                             손자 증 이조참판 청원군 심인서(沈麟瑞)

                             손자 심봉서(沈鳳瑞)

                             손자 심귀서(沈龜瑞)

                     차남 돈산군수 여주목사 심진(沈瑨 )

                             손자 용양위부호군 심이원(沈以元)

           형님 증 이조참판 심광세(沈光世)

           형님 증 좌승지 이조참판 심정세(沈挺世) 

           동생 각금당공 심장세(覺今堂公 沈長世)

           동생 묵재공 심안세(默齋公 沈安世)

           동생 심필세(沈弼世)

           동생 심희세(沈熙世), 출계 심열(沈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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