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星湖 李瀷) 묘소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일동 555
경기도기념물 제40호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년(숙종 7) ~1763년(영조 39)
『성호사설』, 『곽우록』, 『이자수어』 등을 저술한 유학자. 실학자.
본관은 여주(驪州). 字는 자신(子新), 號는 성호(星湖).
8대조 병조판서, 지중추부사 이계손(李繼孫)
증조부 증 의정부좌찬성 이상의(李尙毅)
할아버지 사헌부지평 이지안(李志安)
아버지 사헌부대사헌 이하진(李夏鎭), 사간원대사간 환임(還任)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 평안도 운산 유배.
1681년 10월 18일에 아버지 이하진과 후부인 안동권씨(權氏) 사이에 운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1682년 6월에 전부인 용인이씨(李氏) 사이의 3남 2녀와
후부인 권씨 사이의 2남 1녀를 남긴 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 운산에서 사망하였다.
아버지를 여위고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돌아와,
어머니 권씨 슬하에서 자라나 조고다질(早孤多疾;어려서 고아가되고 많은 질병에 시달림)의 생애가 시작되였다.
첨성리는 행정적으로 경기도 광주부에 속해 광주 첨성리로 일컬어졌으나,
이른바 비래지(飛來地)로서 광주에서 과천·금천을 거쳐 있는 안산군내에 있어 흔히 안산의 첨성리로 불려졌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울 수 없으리만큼 병약했으나, 더 자라서는 둘째 형 이잠(李潛)에게 글을 배웠다.
25세 되던 1705년 증광시에 응했으나, 녹명(錄名)이 격식에 맞지 않았던 탓으로 회시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
1706년인 다음해 9월에 둘째 형 이잠은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17, 18차의 형신(刑訊) 끝에 47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이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였다.
바다에 가까운 그 고장에는 성호(星湖)라는 호수가 있어서 이익의 호도 여기에 연유되었고,
그 고장에 있던 이익의 전장(田莊)도 성호장(星湖莊)이라 일컬어졌다.
이익은 여기에서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사령(使令)과 기승(騎乘)을 이어,
재야의 선비로서 일평생 은둔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셋째 형 이서(李漵)와 사촌형 이진(李溍)과 종유(從遊)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35세 되던 1715년에 어머니 안동권씨마저 여의어 복상(服喪)을 마치고서는
노비와 집기를 모두 종가(宗家)로 돌려보냈으나,
형제자질에 대한 은애(恩愛)가 지극해 실제로는 일가의 지주가 되었다.
47세 되던 해에 조정에서 이익의 명성을 듣고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가세는 퇴락되었고, 이익 부자의 오랜 질역(疾疫)은 쇠운을 재촉하였다.
64, 65세 때에 이미 잔등의 종기가 악화되었고,
70세가 넘어서는 일찍이 괴과(魁科)로 급제하여
예조정랑·만경현감을 지낸 외아들 이맹휴(李孟休)마저 오랜 병고 끝에 죽었으며,
70세 후반기에 들어서는 반신불수가 되어 기거마저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가 가산도 탕진되어 만년에는 한 명의 고노(雇奴) 외에는 송곳을 세울 만한 전지도 없으리만큼 영락하였다.
83세 되던 1763년(영조 39) 조정에서는 우로예전(優老例典)에 따라
이익에게 첨지중추부사로서 승자(陞資)의 은전을 베풀었으나, 그 해 12월 17일 오랜 병고 끝에 죽었다.
유해는 선영이 있는 첨성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 안장되었다.
문인 안정복(安鼎福)은 이익의 인품에 대해
“강의독실(剛毅篤實) 이것은 선생의 뜻이요, 정대광명(正大光明) 이것은 선생의 덕이요,
선생의 학은 정심굉박(精深宏博)하고, 그 기상은 화풍경운(化風景雲)이요,
그 금회(襟懷)는 추월빙호(秋月氷壺)이다.”라고 술회하였다.
이익의 학문은 일문에 이어져서 준재가 많이 배출되어,
아들 이맹휴는 『예론설경(禮論說經)』·『춘관지(春官志)』·『접왜고(接倭考)』 등을 남기고,
손자 이구환(李九煥)은 조업(祖業)을 계승하였다.
그 위에 종자(從子) 이병휴(李秉休)는 예학으로, 종손(從孫) 이중환(李重煥)은 인문지리로 이름을 남기고,
이가환(李家煥)은 정조의 은총을 받아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나,
천주교를 신앙해 1801년(순조 1)의 신유사옥 때에 옥사하였다.
문인으로 두드러진 자로는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권철신(權哲身) 등이 있어,
당대의 학해(學海)를 이루어 그 흐름을 정약용(丁若鏞)에게까지 미쳤다.
증조부 이상의는 일찍이 이수광(李睟光)과 더불어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다녀온 일이 있고,
이익의 딸이 이수광의 후손과 결혼한 것으로 보아 이익·이수광의 양가는 세교집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익이 첨성리에 칩거하며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에 진위 겸 진향사(陳慰兼進香使)로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귀국할 때에 청제(淸帝)의 궤사은(饋賜銀)으로 사 가지고 온
수천 권의 서적이 있었기에 학문에 매진할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星湖先生李公諱瀷之墓 贈貞夫人高靈申氏祔左 贈貞夫人泗川睦氏祔左
성호선생이공휘익지묘 증정부인고령신씨부좌 증정부인사천목씨부좌
贈嘉善大夫吏曹判書行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星湖李先生墓誌銘
증가선대부이조판서행통정대부첨지중추부사성호이선생묘지명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蔡濟恭撰 菁川後人柳熙綱書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채제공찬 청천후인유희강서
성호이익선생 묘역후경
재실 경호재(景湖齋), 사당 첨성사(瞻星祠)
경호재(景湖齋)
첨성사(瞻星祠)
첨성사(瞻星祠)
瞻星祠記첨성사기
이곳 첨성(瞻星)은 예로부터 여주이씨 세존의 터로
성호선생의 9대조를 위시하여 선대 분묘가 안치되었던 곳이다
//여주이씨 경헌공파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 가계//
8대조 병조판서 경헌공 구헌 이계손(敬憲公 龜軒 李繼孫)
7대조 감찰 이지임(李之任)
6대조 군자감주부 이희문(李希文)
5대조 사복시정 이만기(李萬枝)
고조부 단양군수 증 좌승지 이충길(李忠吉)
증조부 증 의정부좌찬성 익헌공 소릉 이상의(翼獻公 少陵 李尙毅,1560~1624)
조부 사헌부지평 이지안(李志安,1601~1657)
숙부 양근군수 덕산현감 이명진(李明鎭,1641~1696)
이침(李沉)
이용후(李用休)-- 공조판서 이가환(李家煥)1801신유사옥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 예학
아버지 대사헌 매산 육우당 이하진(梅山 六寓堂 李夏鎭,1628~1682)
어머니 정부인 용인이씨, 유수 이후산(李後山)의 따님, 3남 2녀
형님 청운 이해(靑雲 李瀣),
형님 섬계 이잠(剡溪 李潛,1660~1706)-47세 옥사,
형님 옥동 이서(玉洞 李漵,1662~1723), 옥동금(玉洞琴)-민속문화재
생모 후부인 안동권씨, 권대후(權代後)의 따님, 2남 1녀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년,숙종7~1763년,영조39)
배위 증 정부인 고령신씨, 정언 신필청(申必淸)의 따님
배위 증 정부인 사천목씨, 진사 목건천(睦天健)의 따님
아들 예조정랑 만경현감 이맹휴(李孟休,1713~1751)
손자 성균생원 이구환(李九煥,1731~1784)
내재종형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1622~1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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