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야산 문화 수목원 민족정기수련광장
강원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 165-5
윤희순 의병가비, 안사람 의병노래 여성의병장 윤희순
丈夫出家 不生還 장부출가 불생환
丈夫出家 生不還 장부출가 생불환 尹奉吉윤봉길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어 애타는 마음 달랠길 없구나.”
일천구백십년삼월 여순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나의소원
백범 김구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 독립이요」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고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다.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 높여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 없다.
- 백범 일지 중에서 -
고구려시대의 광개토대왕비 97t, 7m
▲중국에 있는 실물 6.39m
(유리 보호각 안에서는 촬영 절대금지라서 외부에서만 촬영함)
▲중국에 있는 실물 6.39m
광개토대왕비를 세우면서
충절의 고장인 이곳 홍천군 동창마을은 원래 고구려의 벌력천현(伐力川縣)에 소속된 지역이었다.
산수가 수려하고 함준한 천혜의 환경에서 배어나온 해맑은 마음씨와 당당한 자주정신은,
동창만세운동의 높은 뜻과 팔렬사(八烈士)의 숭고한 희생으로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이곳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주도한 김덕원 의사(金德元 義士)는
만주 대륙을 누비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불굴의 기상이 항일운동의 정신적 바탕으로 간직했던 투사였다. 동창만세운동에서 드러난 거룩한 뜻과 김덕원 의사의 불굴의 애국사상을 후세에 전하고
민족의식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여기에 광개토대왕비를 재현하여 세운다.
고구려 수도였던 중국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남아있는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 제20대 장수왕 (張壽王413~491)이
아버지인 광개토대왕(391~413)을 기리기 위해 414년에 세운 것이다.
높이6.39m의 거대한 비석으로 4면의 모양이 달라서
1면과 3면은 거의 직사각형 모습이고 2면과 4면은 기둥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1880년대에 비석이 발견된 이후 1927년에 비정(碑亭)을 세웠으며 1982년에 현재의 비각(碑閣)이 세워졌는데,
1,600여년의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비석을 떠받치고 있는 대석(臺石)은 3부분으로 깨지고 일부 침하됨으로써
비석이 약간 서북쪽으로 기울어져 안정성이 약해졌다.
2004년에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주변을 정리함에 따라 인접해 있는 태왕릉까지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
비석에 현재까지 담아있는 글자는 1,770여자(字)인데 없어지거나 확인되지 않는 글자가 많고
현재와 다른 문자(別字體)가 있으며 더구나 일본측의 비문 조작 등으로 비문 해석에 어려움이 많았다.
비문은 첫째: 신의 아들인 주몽의 출생과 초기의 역사
둘째: 광개토대왕의 7방향 정복과정
셋째: 광개토대왕 사후의 능지기 규약 등으로 되어있다.
보이지 않는 글자와 띄어쓰기 문제로 연구자간의 견해가 달라서 해석상의 차이가 있어왔지만
박시형(朴時亨) 이후 천관우(千寬宇), 이진희(李進熙) 선생의 노력으로 큰 틀이 짜여졌고,
이어서 이형구(李亨求), 서길수 (徐吉洙), 서영수(徐榮洙), 임기중(林基中)교수 등의 연구로 해석이 가능해졌다.
여기에 세운 비문의 해석은 중국 현지에서 평생을 비문연구에 바친
연변대학교 박진석(朴眞奭) 교수의 석문(釋文)을 바탕으로 하되 일부는 보완 하였으며,
서체는 광개토왕비 서법을 현대에 구현한 중국인(漢族) 진유국(秦維國:好太王서법관장)선생 태왕체(太王體)이다.
이곳에 광개토왕비를 세우는데는 가능한 건립 당시의 본래 모습을 찾고자 하였다.
비석의 크기는 약간 크게 만들어서 원래의 비문이 비석 끝부분까지 새겨져있어
보기가 흉한 점을 보완함으로써 전체적인 규형미를 갖추도록 하였다.
기단부의 대석도 처음과 같이 깨어지지 않은 판석(板石)으로 재현함으로써 원형에 가까웁게 마련하였다.
이러한 광개토왕비 재현작업은 만세운동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申瀅植) 명예교수 (현재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위원장)의
수차에 걸친 현지 답사 및 연변대 박진석 교수 대화를 통한 지도에 힘입어서 이루어졌다.
2011월 10월
동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회장 김 창 묵
제1면
1면의 11행 451자(1행에 41자)중에서 40여자는 알 수가 없으나 앞 뒤 문장을 통해서 그 뜻을 대부분 풀 수 있다.
제 1행부터 제 6행까지(제1 단계)는 주몽, 유류왕, 대주류왕을 거쳐 광개토왕의 생애에 대한 간략한 소개이다.
제 7행부터 제 11행까지(제2 단계)는
호태왕의 업적(정복) 중에서 5년(395:패려)과 6년(백제)정벌을 소개하고 있다.
제1단계 : 추모왕(주몽)은 하느님(天帝)과 하백(河伯)의 딸(柳花)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거북이의 도움으로 엄리대수(奄利大水:송화강)를 건너
비류수(沸流水:동가강) 동쪽의 홀본성(忽本城:오녀산성)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 후 유류왕(유리왕)과 대주류왕(대무신왕)을 거쳐 주몽의 17손인 광개토왕은 영락(永樂) 이라는 연호를 썼으며
18세에 왕이 되었다가 39세에 돌아가셨다. 이에 그 아들인 장수왕이 2년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제2단계 : 7개 방향의 정복과정에서 5년(395)의 패려(거란) 정벌은 태자하(太子河)를 건너
요하 상류(시라무렌강)까지 였고, 6년에는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정벌한 내용이다.
(그러나 5년의 패려정벌을 강원도 북부(동예) 지방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๐ 제1면에서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9째행 중에서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 ㅁㅁ 新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이다.
이 기사는 소위 ‘신묘년기사’ 로서 비문 조작이나 해석상의 차이로 어려움을 겪던 내용이다.
대체로 일본 학계에서는 신묘년에 ‘왜가 와서(來의 주어) 바다를 건너(渡海의 주인공)
백제, 임 나,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로써 일본의 한반도 남부지배(임나일본설)의 근거로 삼고 있었다.
이에 대해 우리 학계에서는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는데 여기서는 간지(干支)를 쓴점,
來와 渡海가 동사이기 때문에 그 주어가 달라야 한다는 점, 백제와 고구려가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392년(내물왕 37년, 광개토왕 2년)에 신라는 고구려에
실성(實聖)을 볼모(人質)로 보냈다는 사실을 들어 백제와 신라가 왜의 신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박진석(朴眞奭) 교수는 이를
‘신묘년에 왜가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는 바다를 건너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신민으로 삼았다’ 고 풀이하였다.
이와 같은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 왜를 격파했다는 해석은
우리 학계의 공통된 의견으로서 광개토왕의 업적을 구체적으로 입증한 내용이다.
제2면
2면의 10행 410자 중에서 80여자는 알 수가 없으나
대부분이 점령지역(城)의 이름이어서 대체로 추측이 가능하다.
1행으로부터 5행의 하단까지는 1면에서 시작된 6년(396)의 백제정벌 내용의 연속이며,
8년의 숙신정벌(5행 하단~6행 하단), 9년의 신라 구원요청(6행 하단~8행 상단),
그리고 10년의 신라, 가야의 왜군 격퇴(8행 상단 이후)에 대한 설명이다.
6년(396)의 백제 정벌내용은 제 1년의 각미성(閣彌城:관미성으로 오두산성 또는 하음산성),
아단성(아치산성)에 이어 고모루산성(충주)등 58성을 정복한 거역의 내용이다.
특이 아리수(한강)를 건너 백제 수도를 위협하니 아신왕이 신하 되기를 자청하여
광개토왕은 백제의 왕제(王弟)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삼고 철수하였다는 것이다.
8년(398)의 백신(帛慎:肅慎) 정벌기사는 그 지역이 목단강 중쥬(寧安)의 숙신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부 견해는 강원도 북부(옥저, 동예지방)로 보기도 하지만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라는 측면으로 볼 때 목단강 중류 일대로 생각된다.
9년(399)에 백잔(백제)이 지난번 명세를 어기고 왜국과 통하였다.
이때 왕이 평양에 갔더니 신라 사절이 말하기를 왜인이 행패를 부린다고 하면서 대왕께 구원(해결)을 요청하니
호태왕은 은예를 베풀고 사절을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신라(내물왕)는 이미 392년(내물왕 37)에 실성(實聖)을 볼모로 고구려에 보낸지 7년이 지났을 때였다.
10년(400)기사 : 왕명으로 보병, 기병 5만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케 하였다.
이에 왜병을 꽃아낸 후 임나 가야에 있던 왜군을 격퇴하였다.
(이하는 보이지 않음)
제3면
3면의 14행 574자 중에서 130여자는 알 수가 없다.
1행으로부터 3행 상단 까지는 2면의 내용(신라구원)의 연장이며,
3행 상단으로부터 4행 중간까지는 14년 대방의 왜군 격퇴 기록이다.
17년의 후연(4행 중간에서 6행 윗 부분), 20년의 동부여정벌(6행의 윗 부분에서 8행 중간) 내용이며
그 이하는 능지기(守墓人) 규정에 관한 것이다.
14년(404)의 내용은 대방(帶方) 부근까지 왜구과 침입하였음으로 이를 격퇴 하였다는 것이다.
17년(407)의 기록은 보병, 기병 5만으로 후연(後燕:大陵河 방면)을 정벌한 것인데
이에 대해 가야, 백제 작전으로 주장하는 학설도 있다.
20년(410) : 동부여 정벌에 대한 기록으로 동부여가 속민으로 조공을 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정벌을 떠났다.
개선하는 길에 완의 덕망을 사모하여 부여의 부족장(5명)이 왔으며 이때 64성(1,400촌)을 함락시켰다.
8행 상단으로부터 (4면) 끝까지는 능지기(守墓人)의 규정에 대한 것이다.
특히 16행 (3면의 7행과 4면의 9행) 656자에 해당하는 많은 부분이 능기기 해설 이므로,
광개토왕비의 설치 목적이 수묘역체제를 강화하는데 있다는 주장까지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크게 왕릉수호의 책임자로서 국연(國烟)과 그에 소속된 잡일(청소, 제사, 관리)을 맡은 간연 (看烟)으로
나누어 옛 고구려 땅에 살던 사람(舊民)과 새로 정복한 지역의 사람(新來韓穢)으로 구분하여 구성케 하였다.
구체적으로 매구여(賣句余:위치불명)는 국연2가, 간연3가,
동해고(東海賈:동해안 부근)는 국연3가, 간연5가,...(중략)... 비리성(碑利城:안변)은 국연2가,
평양성은 국연1가, 간영10가, 신성(新城:무순)은 간연3가 남소성(南蘚城:요녕성 영반)은 국연1가로 한다.
새로 정복한 지역의 사수성(沙水城:불명)은 국연1가, 간연1가,...(중략)...
아단성(阿旦城:서울지역)은 간연5가로 정한다.
제4면
4면은 9행 369자 중에서 제 1행 앞부분의 8자가 보이지 않으며
5행 위로부터 4자 까지는 제 3면의 연장으로 국연, 간연의 숫자 기록이다.
그리고 5행 윗부분부터 끝까지는
국연, 간연의 직능과 그 숫자(국연30, 간연300)를 광개토대왕의 유훈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수묘제를 제정하여 판매를 엄금하여 위반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이다.
야리성(也利城:위치불명)은 간연3과, 두노성(豆奴城:위치불명)은 국연1가, 간연...(중략)...백장(백제)의
남거성(南居城) 주인은 국연1가, 간연5가 등 여러 지역민에 대한 간연, 국연의 숫자를 나타내고 있다.
끝으로 5행 윗부분 이하는 왕의 교령(敎令)과 구체적인 제도규칙(판매금지 와 처벌규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왕이 생존시에 여러 지방에 사는 본토인(舊民)에게 무덤보호와 청소를 하게 하였는데
이들의 몰락을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은 뒤에는 붙잡아 온 하인(韓人)들과 예인(穢人)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하고 청소하게 하라고 분부하였다.
그에 따라 새로 정복지역 사람(韓穢) 220가를 데려왔지만 이들이 수묘(守墓)의 예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옛 고구려인(舊民) 110가를 더 데려왔다.
이로써 신(새로 정복한 지역), 구(옛 고구려지역) 수묘호를 합쳐 국연이 30가, 간연이 300가로 하였다.
비문 맨 마지막 부분:선왕들이 무덤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아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호태왕은 선왕은(先王) 무덤에 비명(碑銘)을 세워 묘지키는 이들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명령하였다. 이제 수묘인은 서로 판매할 수 없게하고 이 법을 위반하여 판 사람은 처벌하고
산 사람은 새 법을 마련하여 무덤을 지키게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광개토대왕(호태왕)은 우선 시조(추모왕)가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신성함과 위대함을 이어받은 왕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7방향의 정복과정을 통해서 북으로 주변 나라(패려, 숙신, 동부여, 후연)를 정복하였고,
남으로도 백제, 신라, 가야, [왜]까지 그위세를 떨쳤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뒤에는 원래 고구려인(舊民)과 새로 정복한 지역민(新來韓穢)을 구별하여
구연(묘관리 책임자)과 간연(묘관리인)의 비율이 1:10으로 하고
구민(원고구려주민)과 신민(새로 점령한 지역민)의 비율로 1:2로 정한다는 내용이다.
이로 보아 광개토대왕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대정복 군주의 위대함을 후세에 알리려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渤海石燈발해석등
고구려의 전통과 문화를 발전시켜 만주를 지배한 강국이 었던 발해국은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리었으며,
드물게나마 남아있는 발해문명의 유물 · 유적에서는 발해인들의 지혜와 창조력 · 독창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제일 오랜 기간 동안 발해국 서울이었던 상경성의 제2호 절터
(현재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南大廟)에 남아있는 발해석등은 탑과 석등이 합쳐진 대표적인 불교유적이다.
전체의 높이가 6m를 넘으며
아래 연꽃받침돌(伏連花紋)위에 둥근 돌기동(竿柱石)이 있고
윗 연꽃받침돌(仰連花紋), 8각의 불집[火舍石 : 8개의 창문을 포함하여 전부 16개의 구멍을 낸 등실(燈室)],
목조건축양식의 8각지봉(屋蓋石)과 높은 상륜부(相輪部)로 이루어진 독창적 풍격의 석등이다.
이곳에 세운 발해석등은 발해의 첫 서울이었던
동모산(東牟山 : 중국 길림성 돈화시 현유향 성산자촌에 소재)
후면의 채석장에서 캐낸 현무암(火山石)을 반입해와서 재현하였으며,
698∼926년에 걸쳐 존속했던 발해국 이후 천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변함이 없는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2013년 6월 동창만세운동기념사업회
홍천-청로각(淸露閣), 청로봉, 의사봉, 사국봉, 김덕원의사 추모비, 척야산 문화 수목원 (0) | 2019.1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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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천-척야산 창의사(拓野山 彰義祠), 김덕원의사 항일투쟁사적비, 청로봉, 척야산 문화 수목원 (0) | 2019.10.24 |
홍천-척야산 문화수목원, 김덕원의사 충의비, 김덕원의사 추모비, 金德元義士 (0) | 2019.10.23 |
홍천-행치령마의태자노래비 行治嶺 麻衣太子노래비 (0) | 2019.10.22 |
홍천-홍천성당 춘천교구(등록문화재 제162호) (0) | 2019.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