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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숭겸장군유적申崇謙將軍遺蹟,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호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2. 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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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崇謙將軍 遺蹟

신숭겸장군 유적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17,

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


壯節公申崇謙  장절공 신숭겸

(  ?  ~927(태조10),   고려개국1등공신.

  

平山申氏 시조,  초명은 신능산(申能山).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출신으로 태조(太祖)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하고,

고려사열전(列傳)에는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인물조(人物條)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으며,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는 것 등으로 보아,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서 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나 궁예(弓裔) 말년에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함께

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봉해졌다.

 

태조 즉위 후 7, 8년 동안 소강상태였던 후백제와의 긴장관계는 견훤(甄萱)이 신라를 공격함으로써 악화되었다.

927년 견훤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습격하고,

신라를 공격해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갖은 만행과 약탈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태조 왕건은 크게 분노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조제(弔祭)하는 동시에

친히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대구의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을 맞아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후백제군에게 포위되어 태조가 위급하게 되었을 때,

대장(大將)이 되어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써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태조는 신숭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해 시호를 장절(壯節)이라 하였다.

또한 아우 신능길(申能吉)과 아들 신보(申甫)를 모두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묘사(智妙寺)를 창건해 그들의 복을 빌게 하였다.

994(성종 13) 4월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사 개국장절공(太師開國壯節公)으로

태묘(太廟)의 태조 사당에 배향(配享)되었다.

신숭겸의 행적을 기록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는

1120년 예종이 신숭겸과 김락을 추도하며 지었다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가 전한다.


<<고려초 품계>>

1품 삼중대광(三重大匡)과  중대광(三重大匡),

2품 대광(大匡)과  정광(正匡),

3품 대승(大丞)과  좌승(佐丞),

4품 대상(大相)과  원보(元甫),

5품 정보(正甫),

6품 원윤(元尹)과  좌윤(佐尹),

7품 정조(正朝)와  정위(正位),

8품 보윤(甫尹),

9품 군윤(軍尹)과  중윤(中尹)


신숭겸장군유적(申崇謙將軍遺蹟)(대구광역시 기념물 제1)

대구광역시 동구 신숭겸길 17,

고려 전기 개국공신 신숭겸장군이 순절한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파군재(破軍峴) 일원의 유적을 지정한 것이다.

신숭겸 장군은 태봉(泰封)의 기장(騎將)으로 있으면서 배현경(裵玄慶) 등과

포악한 궁예(弓裔)를 내몰고 왕건(王建)을 받들어 고려를 개국하였다.

그 뒤 대장군이 되어 927(태조 10)태조와 신라를 도와 후백제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대구 공산(公山) 싸움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태조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 때 자신이 왕으로 변장하여 김락(金樂)장군과 같이 싸우다가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였다.

왕건은 이틈을 타 장졸로 변장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 탈출하였다.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光海州, 지금의 춘천)에 예장(禮葬)하고,

전사한 자리인 이 곳 대구 공산에 순절단(殉節壇)과 지묘사(智妙寺, 美理寺)를 세워

그의 명복을 빌게 하는 한편 일품전지 삼백무(三百畝)를 하사하여 이를 수호하게 하였다.

지묘사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폐사되었으나

1607(선조 40)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柳永詢)이 이 자리에 표충사, 표충단, 충렬비를 건립하여

공의 혼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였다.

그 후 조정에서는

1672(현종 13)이 서원에 사액을 내려 관리하도록 하였으나

1871(고종 8) 서원훼철령에 의해 표충사가 훼철된 뒤로 후손들이 재사(齋舍)를 신축하여 지켜오고 있다.

표충사 앞쪽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고개를 왕건의 정예군이 크게 패하였던 고개라 하여 파군재라 부르며,

파군재 남쪽 산기슭의 봉무정 앞에 있는 큼직한 바위는 왕건이 탈출하여 잠시 앉았다고 해서 독좌암이라 하며,

표충사의 뒷산은 왕산(王山)이라 부른다. 공산싸움에서 유래된 안심(安心), 해안(解顔), 반야월(半夜月) 등 지명이 있다.



表忠壇 표충단

표충단에는 장절공 신숭겸장군이 전투시 입었던

피로 얼룩진 무장복장과 순절한 장소의 피 흘렸던 흙을 모아 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주변의  백일홍나무(배롱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되며, 대구시에서 신숭겸장군나무로 명명 하였다.





蓮花臺연화대(요대) : 표충단 내경에 위치한 연화로 조각된 하대 위에 등화석 모양의 구조물인데

고려시대 불교의식으로 기름을 태워 밝힌것으로되어 있으나 정확한 용도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殉節之地碑閣 순절지지비각


고려개국 벽상공신 신숭겸의 순절지에 세운 것이다.

신숭겸은 평산신씨의 시조로 태봉의 기장으로 있다가 궁정 반정으로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옹립하였으며,

견훤과의 공산 싸움 때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했다.

1819(순조 19) 신숭겸의 28대손 신의직(申義直)이 대구 영장(營將)직무시 단을 세우고 비를 세웠으며,

1856(철종7)에는 순절비 보호각을 창건하였으며,

1872(고종9)과 1928년 중수하고

1986년에 정부 보조금으로 보수를 하였다.


                           高麗狀節申公殉節之地

                           고려장절신공순절지지


申崇謙 將軍像 신숭겸 장군상




忠烈門충열문


동재

서재


表忠書院 表忠齋

표충서원 표충재





景義門 경의문


表忠祠

표충사


尙節堂상절당





忠烈碑閣충렬비각 


                    判官申狀淸德善 ?

                    판관신장청덕선 ?


忠烈碑충렬비          

충렬비는 표충재 동쪽에 있는 비각에 보존되어 있다.

1607(선조 40)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유영순이 공의 외후손으로 이곳 유지를 살펴보고 크게 느끼는 바 있어

영남에 사는 후손들과 협력하여 지묘사 옛 터에 사우를 창건하고 충렬비를 세웠다.

비명은 예조판서 문정공 신흠이 짓고 글씨는 여주목사 김현성이 쓰고, 안변도호부사 김상용이 전자를 썼다.

1781년 정조5 비각이 허물어지면서 비가 넘어져 누운 것을

관민이 힘을 다해 모아 다음해 바로 세우고 같은 해에 비각도 새로이 중건하였다.

1872년 고종9 후손들이 힘으로 비각(碑閣)을 중수하였고

1979년에 대구시에서 보수하였다.

보통 비를 밭치고 있는 거북이의 표정은 근엄하지만 이 비의 거북이는 귀엽게 웃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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