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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영가부원군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永嘉府院君 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문경공 김수동 신도비명

구름에 달

by 碧巖 2019. 12. 9.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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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부원군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永嘉府院君 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대구광역시 동구 송정동 133,

 

영가부원군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永嘉府院君 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대구광역시 동구 송정동 133,

1457(세조 3)1512(중종 7)

 

本貫은 안동(安東). 는 미수(眉叟), 는 만보당(晩保堂).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후손으로,

祖父 동지중추부사 김종숙(宗淑)이고, 첨지중추부사 김적()이며, 동부승지 안질(安質)의 딸이다.

 

1474(성종 5) 생원시에 합격했고,

147721세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주서(藝文館注書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사인(舍人)을 거쳐 장령(掌令)에 올랐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홍문관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497(연산군 3) 동부승지,

1498년 좌승지를 거쳐, 그 해 여름에 외직으로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1499년에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성학심법(聖學心法)4권을 구해 왔다.

그 뒤 경상도관찰사·이조참판·경기관찰사·형조판서 겸 지춘추관사, 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50447세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 때 폐비 윤씨의 회릉추숭(懷陵追崇)을 주장하여

시행해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506년 어머니 상을 당해 사직하고 물러났으나,

왕명으로 단상(短喪)으로 마치고 3개월 만에 우의정에 부임하였다.

이 때 중종반정에 참여해 좌의정에 오르고 정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에 봉해졌다.

사림으로부터 연산군에게 충실했다고 비난받았으나,

1510년 영의정에 올라, 그 때 일어난 삼포왜변(三浦倭亂, 151044~419, 부산포,제포,

염포의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주 종성친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왜변)의 진압을 총지휘하였다.

 

품성이 단정했으며, 청탁을 모두 거절하고 검약한 생활을 즐겼다.

연산군 때에는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諡號는 문경(文敬)이다.

 

본래 묘소는 양천현 남쪽 15리 지점 장군소리(將軍所里) 을좌신향 언덕이었으나(현 양천구 신정동,신월동)

1970년대 도시개발로 양주 진접면 팔야리의 부친 목사공 김적金磧의 묘하로 잠시 갔다가

1981년 후손에 의하여 이곳 대구 송정동 장등산(場嶝山)으로 천묘(遷墓) 되었다.

 

 

 

 

議政府領議政永嘉府院君金公之墓

의정부영의정영가부원군김공지묘

 

 

 

 

 

 

 

 

 

문경공 만보당 묘소후경

 

 

 

문경공 만보당의 장자 판관 김혼(金渾)

 

 

 

 

 

 

 

永嘉府院君金公神道碑

 

 

영가부원군김공신도비

건립: 정덕(正德) 12년 정축년(1517, 중종 12)3

二樂亭 漑之 文景公 申用漑 이요정 개지 문경공 신용개

悠然齋 夢禎 金希壽 유연재 몽정 김희수 篆書

1981년 재건립

 

 

永嘉府院君金公神道碑銘

文敬公神道碑銘 

天以機警才智出衆之資賦之人者豈徒厚其人而已歟將以用於世也然有其資而不偶於時者亦多

如有兼得之而不負天所賦與之意者則眞可謂大賢君子人也而世亦蒙其休矣領議政金公諱壽童字眉叟其得于天

遇于時行其所蘊蓄望隆于世而流美於後者大而遠所謂賢君子者其不在茲乎公之先出於安東安東多鉅姓

金爲最著公考諱磧官至僉知中樞府事視公勳秩贈議政府領議政祖同知中樞府事諱宗淑贈議政府領議政

曾祖同知中樞府事諱陞贈議政府左贊成贊成是開國功臣左政丞上洛府院君諱士衡之子遠祖諱方慶者

仕高麗有大勳勞世爲名閥毓慶蓄祉繼出賢豪多大官僉知事聘承政院同副承旨安質女以天順丁丑正月己卯生公

自嬰孩端溫明穎已有出衆氣幹年甫五失所依七歲學綴句人奇其秀發伯叔上洛府院君金礩深重之曰

此兒不墜世業將能更大吾門也早年學大成中成化甲午生員試登丁酉文科補權知承文院副正字

選授藝文館檢閱轉弘文館正字兼承文院正字公善於隷法能書事大表奏一時諸僚咸推爲第一自是至升通政

常帶承文職己亥拜承政院注書秩滿授軍器寺主簿歷司憲府監察禮戶兩曹佐郞 世子侍講院司書重入弘文館

爲副修撰轉升修撰遷司諫院正言未幾還拜修撰弘治戊申升校理己酉授吏曹正郞尋拜議政府檢詳

升舍人辛亥秋遭內憂送終居廬極其誠哀如存之孝人稱爲難及服闋授司䆃寺僉正

轉司憲府掌令 世子侍講院弼善甲寅冬成廟禮陟翼年乙卯皇帝遣使弔祭前 王冊封新君

朝廷以舊例中朝使到國必審問詔勅頒迎之儀多往復難定擇練達典故詳於禮儀者以公充問禮官

明使見公儀度聽言講禮彼此意達一無疑阻蓋心服之也是年夏拜弘文館典翰升直提學丙辰秋

特超三階爲通政升拜副提學丁巳春拜承政院同副承旨累升至左承旨階加嘉善戊午秋出爲全羅道觀察使

以繼母病辭任拜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階升嘉靖己未以 聖節使進賀 皇朝還拜慶尙道觀察使庚申

拜同知中樞府事辛酉轉刑吏兩曹參判壬戌爲京畿觀察使癸亥春特加資憲

除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移判吏曹餘如舊仍兼知義禁府事都摠府都摠管甲子夏階加正憲

加崇政乙丑秋升崇祿拜議政府右贊成仍兼判吏曹餘如舊時主心昏荒朝政紊舛自甲子夏罪網高張

人鮮得脫追罪大臣臺諫之言事讜切者誅竄殆盡雖細民一觸時禁竝處顯戮大小遑遑重足以待公爲推官

務從寬緩凡可以盡吾心者無不極力賴公全活者亦多丙寅二月丁繼母憂時短喪制違者罪重五月制盡

還授右贊成懼違時制不得守情七月升拜右議政九月翊 聖主登大位卽乞身守服聖上以弊政之餘

凡改紀之事施措之方當與大臣共圖勉留輔政賜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號升左議政封永嘉府院君

公更乞解官終喪哀懇不已始蒙 允許戊辰夏服闋復封府院君兼領 經筵事己巳夏考試文科 殿試

取金正國等十八人庚午春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勳封如舊考試文科 殿試

取李膂等三十三人辛未春考試文科 殿試取姜台壽等十六人壬申春遘疾累月不瘳再上疏辭職不允

仍給由遣內醫常處左右救藥又數遣承旨問疾公以久病在家不受祿上聞之特命賜之至七月病革

初七日戊寅夜絶纊享年五十有六訃聞上慟傷輟朝三日賻贈有加自公卿大夫下至士庶莫不哀悼

寮友之弔祭者日踵門是年九月十三日甲申開吉兆于陽川縣治南將軍所里乙坐辛向之原遂窆焉鳴乎哀哉

易名曰文敬稱也公資性敏達操履恭謹友兄弟睦親戚無不得其歡悰以簡素自飭不致飾服美守心溫恕

與物無忤早捷科第敭歷三朝莅事精幹出入經帷臺閣按節三道踐履六卿卒登台鉉以佐 聖主中興之治

世方倚以爲重而年未耳順天奪之速痛哉公配乃軍器寺判官李季禧女無子副室有二男一女男長曰渾

以勳蔭授修義副尉副司勇餘幼喪旣終夫人追慕公久而彌篤凡爲公治後事無不盡心欲更豎石于神道

記公行治事業垂示後來乃介公之季弟僉知事壽卿請碑銘于用漑曰旣蒙幽堂之誌幸卒其惠

俾亡人行迹無昧於後意甚哀切用漑自玉署忝僚之後陪侍僚席非一再得公之實甚詳況蒙許可常示心服

不作崖岸銘公之碑義不敢辭遂爲銘曰

永嘉之金根深而厚功積于先慶遠于後生才與智位亦大受猗惟文敬天富其有明敏之資端謹之性

發以文學乃施於政宜小宜大不有厥躬顯敭樞要望重名隆中遭屯否民苦疾威國步將顚宗祊失依

天啓聖主代虐以寬公能捧日轉危而安山河策勳台鉉著績士有領袖國倚柱石年齡未耈何不憖遺

天理茫渺予奪難知芳名茂業不與身亡銘茲貞珉庶垂永長

正德十二年丁丑三月 日 竪

 

 

文敬公神道碑銘문경공 신도비명

有明朝鮮國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유명조선국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永嘉府院君 贈諡 文敬公金公 神道碑銘幷序

영가부원군 증시 문경공김공 신도비명병서

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知 經筵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申用漑 撰

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지 경연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성균관사신용개 지음

奉正大夫成均館司藝兼  承文院校勘宗學導善金希壽書

봉정대부성균관사예겸  승문원교감종학도선김희수서

       하늘이 재치 있고 민첩하면서도 재주와 지혜가 출중한 자질을 사람에게 내려주는 것이 어찌 그 사람만 우대해서

그런 것뿐이겠는가. 장차 세상에 쓰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 역시 많다.

만약 그 둘을 얻고 하늘이 주신 뜻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대현군자(大賢君子) 같은 사람이라 할 만하고,

세상 또한 그 아름다운 덕()을 입는다.

영의정 김 공(金公)의 휘()는 수동(壽童), ()는 미수(眉叟)이다.

하늘에서 뛰어난 자질을 받고 알맞은 때를 만나 가슴 속에 품은 뜻을 펼쳐서 세상에 명망이 높고 후세에 아름다움을

전한 것이 대단히 훌륭하고 오래 되었으니 이른바 대현군자(大賢君子) 같은 이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공의 선조는 안동(安東)에서 나왔다. 안동에는 거성(鉅姓)이 많지만 김씨가 가장 두드러졌다.

공의 아버지 휘() ()은 벼슬이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는데,

공의 공훈과 품계에 의해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공의 할아버지 동지중추부사 휘() 종숙(宗淑)은 의정부 영의정으로,

증조부 동지중추부사 휘() ()은 의정부 좌찬성으로 증직되었다.

찬성(贊成) 이분은 개국공신 좌정승 상락부원군 휘() 사형(士衡)의 아드님이다.

원조(遠祖) () 방경(方慶)이란 분은 고려조에 벼슬을 하면서 큰 공로를 세워 대대로 저명한 명문가가 되었는데,

끊임없이 선행을 쌓고 복을 지어서 어진 이와 호걸이 계속 배출되고 대신(大臣)이 많이 나왔다.

아버지 첨지사(僉知事)는 승정원 동부승지 안질(安質)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천순(天順) 정축년(1457, 세조 3) 정월 기묘일(음력 14)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린아이 때부터 단정하고 온순하며 명석하고 영리하여 일찍부터 기백과 재간이 출중했다.

겨우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나, 일곱 살에 시()를 익히니 사람들이 그 재주가 뛰어난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큰아버지 상락부원군 김질(金礩)께서는 공을 매우 중히 여기며 말씀하기를

 이 아이는 대대로 이어온 가업을 실추하지 않고 장차 우리 가문을 다시 크게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린 나이에 학문을 크게 성취하여 성화(成化) 갑오년(1474, 성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77년(정유년, 성종 8)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겸열(藝文館檢閱)로 선발되어 홍문관 정자 겸 승문원 정자(弘文館正字兼承文院正字)로 자리를 옮겼다.

공은 예서(隸書)를 잘 쓰고 명나라에 보내는 표문(表文)이나 주문(奏文)을 짓는 일에 뛰어나서

그 당시 동료들이 모두 공을 으뜸으로 쳤고, 이때부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를 때까지 항상 승문원의 직책을 맡았다.

1479년(기해년, 성종 10)에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임명되어 임기가 차자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제수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예조·호조 두 관청의 좌랑(佐郞),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역임하고,

다시 홍문관으로 들어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승진한 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수찬(修撰)으로 임명되었다.

1488년(홍치(弘治) 무신, 성종 19)에 교리(敎理)로 승진하고,

1489년(기유년, 성종 20)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임명되자마자

곧바로 의정부 검상(議政府檢詳)에 제수되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신해년(1491, 성종 22) 가을에 부친상(父親喪)을 입어 장례를 치른 뒤 시묘살이를 하면서 슬퍼하는 것이 참으로

지극했는데, 마치 살아 있는 사람에게 하듯이 효성스러워 남들이 따라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칭송하였다.

상복을 벗자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에 임명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세자시강원 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옮겼다.

1494년(갑인년, 성종 25) 겨울에 성종께서 붕어하시자 다음 해 을묘년(1495, 연산군 1)

황제께서 사신을 보내 전왕(前王 : 성종)을 조문하여 제사를 지내고 새 임금을 책봉하였다.

조정에서는 관례에 따라 중국 조정의 사신이 도착하면 반드시 조칙(詔勅)을 맞이해 반포하는 의식을 자세히 묻는데,

서로 의견을 주고받아도 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전고(典故)에 통달하고 예의(禮儀)에 대해 상세히 아는 이를 선발하였다.

이에 공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는데, 명나라 사신이 공의 예의법도(禮儀法度)를 보고 예절을 강론하는 말을 듣자

서로 의견이 통하여 의심스럽거나 막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 마음속으로 승복했기 때문이다.

이 해 여름에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에 임명되고, 가을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496년(병진년, 연산군 2) 가을에 세 품계를 뛰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관직은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497년(정사년, 연산군 3) 봄에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으며, 품계는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더해졌다.

1498년(무오년, 연산군 4) 가을에 외직으로 나가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겨울에 계모(繼母)의 병으로 사임(辭任)하였다가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禮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품계는 가정대부(嘉靖大夫)로 올라갔다.

 

 

1499년(기미년, 연산군 5)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진하(進賀)하러 갔다가 돌아와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경신년(1500, 연산군 6)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유년(1501, 연산군 7)에 형조(刑曹)와 이조(吏曹) 두 관청의 참판(參判)으로 관직을 옮겼다.

임술년(1502, 연산군 8)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고,

계해년(1503, 연산군 9) 봄에 특별히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가

형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 지춘추관사(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知春秋館事)로 임명되었다.

이 해 가을 이조판서로 옮겨, 나머지는 전과 같이 겸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兼知義禁府事都摠莩摠管)에 임명되었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에 품계가 정헌대부(正憲大夫), 겨울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올라갔다.

을축년(1505, 연산군 11) 가을에 품계가 숭록대부(崇祿大夫)로 높아져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으로서 이조판서를 겸직하고, 나머지는 전과 같았다.

이때 임금의 마음이 어리석고 주색에 빠져 나라의 정치가 문란하고 어지러웠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여름부터 죄망(罪網)을 높이 둘러쳐서 벗어날 수 있는 이가 드물었으니

대신(大臣)이나 대간(臺諫) 중에 곧은 말을 하거나 절실한 말을 하는 이는

나중에 죄를 물어 베어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개 백성일지라도 금령(禁令)을 일단 어기기만 하면 처형한 뒤에 시신을 군중에게 보이는 처벌을 하였으니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어찌 할 바를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어야 했다.

공은 추관(推官 : 신문관)으로서 될 수 있으면 관대하고 너그러이 처리하면서

자신이 마음 씀씀이를 다할 수 있는 것이면 온 힘을 다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이에 공에게 힘입어 온전하게 살아난 이들 역시 많았다.

병인년(1506, 연산군 12, 중종 1) 2월에 계모(繼母)의 상()을 입었는데,

당시에는 단상제(短喪制)를 어기는 이는 죄가 무거웠다.

5월에 단상제(短喪製)가 끝나서 다시 우찬성(右贊成)으로 임명되었으니

당시 복제(服制)를 위반하는 것이 두려워 계모(繼母)의 상()에 정성을 다할 수 없었다.

7월에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9월에 성주(聖主 : 중종)께서 대위(大位)에 등극하도록 도운 뒤에

즉시 해직(解職)을 청원하여 다시 상복(喪服)을 입었다.

그러나 폐정(弊政)의 남은 폐해로 인해 성상(聖上)께서 개혁에 관한 일을 시행하고

조치할 방도를 대신(大臣)들과 함께 도모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지 말도록 권하여 정사를 돕게 하고,

병충분의익운정국공신(秉忠奮義翊運靖國功臣)의 칭호를 하사하면서 좌의정으로 승진시키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공이 벼슬에서 물러나 계모(繼母)의 삼년상을 마칠 수 있게 해 줄 것을 다시 청원하는데,

몹시 애달파하는 마음이 그지없어 마침내 성상의 윤허를 받았다.

무진년(1508, 중종 3) 여름에 삼년상을 마치고 상복을 벗자 다시 부원군에 봉해져 영경연사(領經筵事)를 겸하였다.

기사년(1509, 중종 4) 여름에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하여 김정국(金正國) 18인을 선발하였다.

경오년(1510, 중종 5) 봄에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에 임명되고,

훈봉(勳封)은 전과 같았다.

또한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하여 이려(李膂) 33인을 선발하고,

신미년(1511, 중종 6) 봄에도 문과전시(文科殿試)를 고시하여 강태수(姜台壽) 16인을 선발하였다.

임신년(1512, 중종 7) 봄에 병이 들어 여러 달이 지나도록 낫지 않자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에 휴가를 주면서 내의(內醫)를 보내 항상 곁에서 약으로 치료하도록 하고,

또 몇 차례나 승지(承旨)를 보내 병문안을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병을 앓으면서 집에 있어서 녹봉을 받지 않자,

주상께서 보고를 받고 특별히 명을 내려 하사하였다.

7월이 되자 병이 위독해져 초7일 무인일 밤에 운명하시니 향년 56세이다.

 

부음(訃音)이 나자 주상께서 몹시 애통해하며 사흘간 조회를 폐하고, 부의(賻儀)를 넉넉히 하사하였다.

위로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애도하지 않는 이가 없고,

동료와 벗으로서 조문하러 오는 이가 날마다 잇따랐다.

이 해 913일 갑신일에 양천현(陽川縣) 치소(治所) 남쪽 장군소리(將軍所里)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에 좋은 묏자리를 잡아 장사지내니 참으로 슬프도다.

역명(易名 : 諡號)을 문경(文敬)이라 하니 참으로 걸맞도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민첩하고 활달하면서 행실이 공손하고 조신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롭고 친척간에 화목하여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은 질박하고 수수함으로 자신의 언행을 삼가고, 의복을 아름답게 꾸미지 않았으며,

항상 온화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을 간직해 다른 이들에게 거스르지 않았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3대에 걸친 임금께서 공을 등용하여 재능을 시험하는 동안 일처리가 정밀하고 유능하였다.

경유(經帷 : 經筵)와 대각(臺閣 : 사헌부와 사간원)을 출입하고, 삼도(三道)를 안절(按節 : 관찰사)하였으며,

육경(六卿 : 판서)의 자리를 밟아 드디어 태현(台鉉 : 정승)에 올라 성주(聖主 : 중종)의 중흥하는 치적을 보좌하니

세상이 바야흐로 공에게 의지하여 중히 여겼다.

그런데 연세가 이순(耳順 : 60)이 되지 않았는데, 하늘이 너무나 빨리 데려가니 참으로 애통하도다.

 

공의 배위(配位)는 군기시 판관(軍器寺判官) 이계희(李季禧)의 따님인데, 슬하에 자녀가 없다.

부실(副室)21녀를 두었는데, 장남 혼()은 훈음(勳蔭)으로 수의부위(修義副尉) 부사용(副司勇)에 임명되고,

나머지는 어리다. ()을 마치고 나서 부인이 공을 추모하는 마음이 오래 될수록 더욱 두터워져서

공을 위해 뒷일을 처리하는 데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다시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우고 공의 치적과 업적을 기록해서 후세에 전하여 보이고자 하였다.

이에 공의 아우 첨지중추부사 수경(壽卿)을 보내 나 신용개(申用漑)에게 묘비명(墓碑銘)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주시어 다행히도 마침내 그 은혜를 입었으니

망인(亡人)의 행적이 후세에 어둠 속으로 묻히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그 뜻이 매우 애절하였다.

나 신용개(申用漑)가 옥서(玉署 : 홍문관)에서 동료로 지내게 된 뒤로부터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을 모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공의 실상을 매우 상세하게 알고 있고,

더구나 항상 속마음을 내보이시면서 오만하게 거리감을 두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었으니

공의 묘비명(墓碑銘)을 의리 상 사양할 수 없어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銘명 

永嘉之金 영가의 김씨

根深而厚 뿌리가 깊고 두터우니

功積于先 선대에 공을 쌓아올려

慶遠于後 후대에 복을 전했다네

生才與智 재주와 지혜 타고나고

位亦大受 벼슬도 크게 받았으니

猗惟文敬 문경공 천품 빼어남은

天富其有 하늘이 주신 것이라네

明敏之資 타고난 자질 명민하고

端謹之性 조신한 성품 단정하니

發以文學 학문과 글로 드러나고

乃施於政 인자한 정사 베풀었네

宜小宜大 일처리 모두 합당하고

不有厥躬 자신의 몸은 무심해도

顯敭樞要 현요직 두루 거치시니

望重名隆 신망과 명성 드날리네

中遭屯否 중도에 시련 닥쳐와서

民苦疾威 학정에 백성 시달리니

國步將顚 나라의 운명 뒤집혀서

宗祊失依 종묘와 사직 위태롭네

天啓聖主 하늘이 성군 인도하여

代虐以寬 관대한 정치 도모하니

公能捧日 공께서 임금 받들어서

轉危而安 태평한 시대 만들었네

山河策勳 산하에 공적 기록하고

台鉉著績 정승의 업적 뚜렷하니

士有領袖 사림을 이끈 영수이자

國倚柱石 나라가 기댄 초석이네

年齡未耈 늙지도 않은 나이인데

何不憖遺 어떻게 목숨 거두는가

天理茫渺 하늘의 이치 아득하여

予奪難知 정말로 알기 어려워라

芳名茂業 명성과 업적 찬란하여

不與身亡 스러질 몸과 다르다네

銘茲貞珉 단단한 돌에 새겼으니

庶垂永長 영원한 세월 전해지리 

정덕(正德) 12년 정축년(1517, 중종 12) 3월 세움.

 

 

 

 

 

 

                    通訓大夫行東部主簿永嘉金公之墓

                    통훈대부행동부주부영가김공지묘

 

 

 

 

 

 

 

 

 

 

處士安東金公諱鎭坤之墓 孺人昌原黃氏之墓

처사안동김공휘진곤지묘 유인창원황씨지묘

 

 

 

 

 

 

 

 

 

 

만보정晩保亭 : 대구광역시 동구 신용동 193-1

 

 

 

晩保亭만보정

 

 

 

 

 

 

 

 

 

 

 

 

 

 

 

 

 

 ///만보당 문경공 영가부원군 김수동 가계/// 

조부 동지중추부사 김종숙(金宗淑)

부친 통정대부 여주목사 증 보조공신 영의정 영가부원군 김적(金磧) 

모친 증 정경부인 순흥안씨, 승지 안질(安質)의 따님

        영가부원군 문경공 만보당 김수동(永嘉府院君 文敬公 晩保堂 金壽童)   

        배위 정경부인 전의이씨, 판관 이계희(李季禧)의 따님, 无育

        배위 정경부인 성주배씨, 진사 배이도(裵爾度)의 따님

                장남 판관 김혼(金渾)- 숙부인 밀양박씨

                     손자 방어사 김덕문(金德文)- 숙부인 전주이씨

                            증손 대호군 김경선(金敬先)- 숙인 성주이씨

                                현손 동부주부 김진형(金震亨)- 숙인 경주이씨

                                      5대손 김숙(金塾)-성주이씨 = 수 호군 김상구(金尙龜)

                                      5대손 통덕랑 김우(金瑀)- 창녕성씨= 김태구(金台龜)

                                      5대손 수 가선 김수(金琇)- 성주이씨

                                           6대손 김성구(金聖龜)- 달성배씨

                                                7대손 김국전(金國香全)-경주이씨

                                                       8대손 김치정(金致貞)-밀양박씨

                                                            9대손 처사 김진곤(金鎭坤)-창원황씨

                                                                 10대손 김문수(金文洙)-월성김씨

                                                                       11대손 김동욱(金東昱)-단양우씨,창원황씨

                              현손 통덕랑 김헌형(金憲亨)

                              현손 김계형(金季亨)

                              현손 김익형(金益亨)

                         증손 충의교위 김경준(金敬俊)

                              현손 사과 김충무(金忠武)

                  차남 경력 김연(金淵)

                         손자 김덕무(金德武) 생부 판관 김혼

          동생 증 호조판서 영안군 김수경(永安君 金壽卿)

                   조카 증 호조참판 화산군 김해(花山君 金瀣)

                   조카 호군 김치(金淄)

                   조카 예빈시주부 김기(金沂)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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