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元陵(제21대 영조와 정순왕후)
원릉은 조선 왕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제21대 영조(1694~1776)와 계비 정순왕후 안동김씨(1745~1805:15세에 66세의 영조의 계비.)의 능이다.
영조는 즉위전 18세 때부터 왕세제로 책봉된 28세까지
약 10년간 궁궐 밖 생활로 서민적으로 절약하고 검소한 습성이 배어 있었다.
조선 왕 중에서 드물게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백성의 고민을 해소하는 데 앞장섰다.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며 경종의 동생이지만
영조의 생모는 숙빈 최씨로 궁녀의 시중을 드는 무수리 출신, 즉 천인 계층이었다.
성리학으로 똘똘 뭉친 조선에서 첩의 자식이 왕이 되었다는 것은 파격적이며 찝찝한 일이었을 것이다.
영조가 지닌 출생상의 약점은 그가 체질적으로 유학자를 싫어하고, 명분론을 자주 무시해버린 근본이었다.
영조의 왕위 등극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는데
그가 경종의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도 노론과소론 간의 싸움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남인과 노론틈에서 미약한 권력을 유지하던 소론은 장헌세자(사도세자)에 기대어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렸다.
하지만 노론 측은 이를 지나치지 않고 장헌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해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둬 죽였다.
영조 자신은 붕당 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은 붕당 정치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당파 싸움의 폐해를 잘 알던 영조는 모든 당파를 없애겠다고 표방하면서 본격적인 탕평을 시도했다.
영조의 탕평책이 본궤도에 오르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1728년의 무신란(이인좌의 난)을 겪고 나서였다.
영조의 반대편에 섰던 소론은 그가 경종의 뒤를 잇자 대세를 인정했으나
김일경으로 대표되는 과격파는 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김일경이 처형되고 을사환국으로 노론 정권이 들어서 소론의 불만이 높아지자,
이들이 남인 일부를 규합해 정변을 일으킨 것이 무신란이었다.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었으나 당쟁의 폐해로 변란을 겪은 영조로서는 보다 근원적인 운영 방침이 필요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모두에 명분상 하자가 있으며, 각기 충신과 역적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붕당보다는 인물의 현명함을 기준으로 인사를 단행하고,
국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재상의 권한을 정점으로 위계질서를 강화했다.
그는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였던 서원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했다.
또한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 간 결혼을 금지하고자
각각 대문에 '동색금혼패'를 걸게 하는 등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영조는 탕평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한 후 제도개편이나 문물의 정비, 민생 대책 등 여러 방면에 치적을 쌓았다.
압슬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기도 했다.
영조 재위 기간에 시행된 경제 정책 중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역법으로,
군역의 의무를 대신해 바치는 베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양역의 균형을 바로잡고 양역민의 부담을 줄이고,
반면 감필로 인한 재정 부족의 보충 방안으로 결작전을 토지세에 덧붙여 양반 위주인 지주층이 부담하도록 했다.
영조는 신분에 따른 차별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천인들에게도 공사천법(公私賤法)을 마련해
양처(良妻) 소생은 모두 모역(母役)에 따라 양인이 되게 한 후 다음 해에 남자는 부역(父役),
여자는 모역을 따르게 해 양역을 늘리는 방편을 마련했다.
영조 시대에 특이한 것은 사회 참여의 불균등에서 오는 불만을 해소하는 방편이었다.
그는 서자의 관리 등용을 허용하는 법을 제정해 서얼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주는 등
조선 왕조의 고질병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 조선 왕조를 번영의 시대로 이끌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영조는 최장수 왕이었던 만큼 생전에 8회에 걸쳐 산릉원을 조영하거나 천장해 능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또한 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제도를 정비해 『국조상례보편』을 발간하기도 했다.
따라서 원릉의 석물 제도는 새로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조는 원래 달성서씨 서종제의 딸인 정성왕후와 가례를 치렀으나,
왕비가 1757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고양에 있는 서오릉에 정성왕후의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우측을 비워두었다.
또한 이를 홍릉이라 이름하며 자신이 사망하면 비워둔 우측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정조는 더 좋은 자리가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절차를 진행했고,
신하들은 동구릉에 있는 옛 영릉이 길지라며 적극 추천했다. 한마디로 건원릉에 버금가는 자리라는 것이다.
정조는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동구릉 내 현재 자리로 영조의 능지를 정했다.
아버지가 조강지처와 한곳에 묻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왕실의 번영에 더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릉 자리는 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다.
왕의 능을 같은 자리에 쓴다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영조의 능침이 되는 데는 문제없었다.
영조는 정성왕후의 장례가 끝난 후 중전의 자리를 비워두면 안 된다는 의견이 일자
1759년 66세의 고령임에도 경주김씨 김한구의 딸인 15세의 정순왕후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
손자인 정조는 물론 사도세자의 부인인 경의왕후(혜경궁 홍 씨)보다 어린 왕비는
왕실 규범에 따라 임금의 어머니가 되었고, 영조가 서거한 후에는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정순왕후의 친정은 김홍욱의 후손으로 정사,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된 문제에 자주 관여해 파란을 일으켰다.
정순왕후는 영조 재위 연간에 이미 친형제인 김귀주를 통해 사도세자의 죽음에도 개입했다.
정조 연간에는 홍국영, 은언군 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정조와 대립했고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면서 4년간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순조가 15세 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원하지 않는 은퇴를 한다.
1805년 정순왕후가 사망하자 신하들은 원릉의 능 위쪽 좌측이 대길지라며 적극 추천했고
순조는 그들의 말대로 정순왕후의 능침을 영조와 같은 자리로 정했다
朝鮮國 英祖大王元陵
조선국 영조대왕원릉
朝鮮國 貞純王后祔左
조선국 정순왕후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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