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서울-수릉綏陵, 제23대 순조의 원자 추종 문조와 신정왕후 능

조선왕릉

by 碧巖 2019. 12. 12. 22:18

본문

728x90


수릉綏陵---동구릉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원자 문조(文祖 : 孝明世子追尊)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풍양조씨의 능.

 

사적 제193. 처음 효명세자가 죽자 의릉(懿陵 : 경종릉) 좌강(左岡)에 안장하고

연경(延慶)으로 묘호를 삼았다가 추존 후 수릉으로 승격하고,

1846(헌종 12) 풍수지리학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龍馬峰) 아래로 옮겼다가

다시 1855(철종 6)건원릉(健元陵 : 태조릉) 좌강에 옮겨와 묘호를 정하였다.

1890(고종 27)신정왕후가 죽자 이곳에 합장하였다.


綏陵 문조文祖와 신정왕후神貞王后의 능

동구릉 중앙 길을 따라 건원릉 방향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능으로

추존 문조(1809~1830)와 신정왕후 조 씨(1808~1890)의 능이다.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을 고종으로 즉위하게 한 당사자가 바로 조 대비 신정왕후다.

 

문조는 4세에 왕세자(효명세자)로 책봉되고

19세부터 대리청정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했다. 순조의 뒤를 이어 문조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헌종은 부왕인 문조를 익종으로 추존했다.

 

추존되었다고는 하나 익종이 정사에 관여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추존 왕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순조 27(1827) 부왕인 순조의 명령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순조가 38세의 한창인 나이임에도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한 이유는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김씨 세력의 정치적 독주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효명세자에게 기대를 품었기 때문이다.

19세 젊은 나이의 효명세자는 부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사흘 만에 형조판서 등에 대한 인사 명령을 내리고,

다음 날은 고위 관료들에게 감봉 처분을 내리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사류를 자처하는 세력을 과감히 등용해 안동 김씨가 독점하던 정국을 반전했다.

학자들은 효명세자가 할아버지 정조를 모범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성과가 실현되기도 전인 순조 30(1830) 갑작스럽게 사망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리청정 33개월 만이었다.


효명세자의 급서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결집되었던 세력 또한 급격하게 도태되었지만

후일 흥선대원군 등 반() 안동김씨 세력이 다시 등장한 계기는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싹트고 있었다.

 

신정왕후 조씨는 조선 왕조에서 가장 큰 실권을 휘두른 여장부다.

아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아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신정왕후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대원군과 손잡고 고종을 즉위시킨 뒤 조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했다.

그녀가 사망한 나이는 83세로 조선의 비 중 왕실 생활을 가장 길게 했다.

 

처음에 장지로 결정된 곳은 능동의 도장곡인데, 현재 어린이대공원 일대다.

이곳을 장지로 정하고 산릉 조성 작업을 진행하던 중 혈처 주변에서 5기의 옛 무덤 흔적과 유골이 발견된다.

이는 그 땅이 길지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에 작업을 중단하고 능을 의릉 근처로 옮긴 후

양주 용마봉(광진구 용마산) 자락으로 옮겼다가, 1855년 철종 때 최종적으로 건원릉 좌측으로 옮겼다.



                       大韓 文祖翼皇帝綏陵  神貞翼王后祔右

                       대한 문조익황제수릉  신정익왕후부우




                            朝鮮國 翼宗大王綏陵 神貞王后祔右

                            조선국 익종대왕수릉 신정왕후부우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