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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예조참판 이명남(李命男)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3. 27.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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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이씨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1555~1597)

본관은 우계(羽溪),()는 수보(綏甫),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무과 급제후 선전관에 초임된 뒤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증조부는 참판 이광식(李光軾)이며 조부는 이전(李戩)이다. 아버지는 갑산도호부사 이준헌(李遵憲)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 이명복(李明福)으로 평안도병마절도사 이구침(李耈琛)의 딸이다.

부인은 정경부인 청주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로 한곤(韓梱)의 딸로서

장남은 이경여(李慶餘), 차남은 이경수(李慶受), 삼남은 이경보(李慶甫)인데

이경보는 7살때 남원성에 있다가 고니시 유키나카에 의해 납치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리노이에 씨(李家氏)로 창성하고 이름을 이성현(李聖賢)이라 개명하고 일본 여인과 혼인하여 자손을 두었다.

이후 이경보(李慶甫)의 후손들은 죠슈 번에서 대대로 의사(醫師)로 활동하였으며,

일본의 전 언론인이자 아사히 신문사 사장이며

문학박사(文學博士)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는 자신의 성이 이가씨라는 특이한 성씨에 의문을 품고

80년간 자료를 추적 조사하여 자신의 조상이 정유재란 때 고니시에게 납치된

이복남의 셋째 아들인 이성현(李聖賢)이라고 개명한 이경보(李慶甫)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 리노이에 마사후미는찾아낸 2천년 전의 뿌리라는 책을 출간하여 이 사실을 발표하였으며,

1982년 리노이에 마사후미은 가족을 대동하고 한국에 입국하여

경주 경주이씨 이알평 사당과  강릉 우계 사당과 이복남의 묘소, 남원 충렬사를 참배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복남(李福男)

1588(선조21) 무과 식년시(武科 式年試)에 병과로 급제, 선전관, 별장을 거쳐

1592(선조25) 나주판관이 되고, 그해 7월 나주판관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겸 도복병장에 임명되어 전주 웅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승전의 공으로 그해 12월 당상관에 승진했다.

1593(선조26) 전라조방장, 전라방어사를 거쳐 충청조방장이 되었다.

그해 7월 병으로 체직되었으나 바로 복직, 전라방어사에 임명되고,

159310월 훈련 도정(訓鍊都正), 12월 다시 충청조방장에 재임명되었다.

15948월 남원 부사(南原府使), 이듬해 1월 전라도 병마절도사,

1596년 3월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1597(선조30) 1월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

그해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8월 해안가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으러 순천으로 내려갔다가,

남원성이 포위되자 말머리를 돌려, 그해 897백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에 들어갔다.

남원성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5만 군사를 대적하다가 패하고,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접반사 정기원(鄭期遠), 부사 임현(任鉉), 판관 이덕회(李德恢), 

 교룡산성별장(蛟龍山城別將) 신호(申浩) 등이 전사하며 화살이 떨어지자 분신자결 하였다.

그의 가복들은 그의 두발과 의류를 수습하여 돌아갔고, 후일 이것으로 광주 신원리 산에 장례를 치루었다.

사후 바로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증직(贈職)되고

1604(선조37) 선무원종공신 1(宣武原從功臣一等)에 녹훈되었으며,

뒤에 다시 증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追贈)되었다.

1612(광해군4) 남원 칠충신사에 제향(祭享)하고 칠충신사는

후에 광해군 때에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이 내려졌다. 1711(숙종37) 숙종 때 충장(忠壯)의 시호를 받았다.

    

 

동생 이덕남(李德男)은 무과급제 후 임진왜란 초기 강원도 김화현감으로 왜군과 교전중에 전사하였고,

동생 이인남(李仁男)은 남도우후로 숙부 이경헌(李敬憲)과 이승헌(李承憲)과 함께

신립 장군의 부관으로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한편 그의 가족들은 한때 평안도 영변에 유랑했다고 한다.

처 청주한씨는 1597(선조30) 1128일 비변사에 정장을 올려 구휼을 청하였는데,

"가옹(家翁)이 전사한 뒤로 갈 곳이 없어서 평안도 영변(寧邊)에 유랑하고 있는데, 굶주림에 시달려 애통하기

그지없다. 여느 전사한 장관(將官) 처자의 예에 의거하여 요미(料米)를 주어 전사한 넋을 달래달라."고 하여

선조가 쌀을 지급하였다.

 

시신은 전북 남원시의 사적 제272호인 만인의총(萬人義塚)에 안장되었으며

시신을 대신한 투구와 갑옷은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대장리 선영하에 천익장으로 장사되었다.

후일 다시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83-2번지) 철곡부락 산에 안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증조부 이광식(李光軾), 6촌 동생 이명남(李命男),

재종손 이서우(李瑞雨)등의 묘소가 있고, 묘역 동남쪽 산아래에는 2011년 건립된 서울추모공원이 소재해 있다.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折衝將軍守全羅兵馬節度使李公福男之墓  貞敬夫人淸州韓氏之墓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절충장군수전라병마절도사이공복남지묘  정경부인청주한씨지묘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  五衛都摠府都摠管行  折衝將軍守全羅兵馬節度使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행  절충장군수전라병마절도사

忠壯公羽溪李福男  貞敬夫人淸州韓氏之墓

충장공우계이복남  정경부인청주한씨지묘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묘소후경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가계//

   증조부 예조참판 이광식(李光軾)

할아버지 대사헌 이전(李戩)

   할머니 고성이씨, 좌랑 이광택(李光澤)의 따님

   할머니 하빈이씨, 부장 이윤우의 따님

       숙부 이경헌(李敬憲)

       숙부 이승헌(李承憲)

       숙부 이봉헌(李奉憲)

    아버지 이준헌(李遵憲) 통훈대부 갑산도호부사 겸 갑산진 병마첨절제사

    어머니 전주이씨 이명복(李明福). 평안도병마절도사 이구침(李耈琛)의 따님

               형님 이귀남(李貴男)

               동생 이인남(李仁男)

               동생 이덕남(李德男)

               절충장군 전라도병마절도사 증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사 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배위 정경부인 청주한씨,  한곤(韓梱)의 따님

                    장남 이경여(李慶餘)

                    차남 이경수(李慶受)계출 삼촌 이인남의 양자 출가

                    삼남 이경보(李慶甫) 7살에 남원성에서 고니시 유키나카에 의해 일본피납,

                                                이성현(李聖賢)이라 개명, 일본명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이가원유), 

                                                                                                       조슈 리노이에 씨(長州李家氏)의 시조

 

 

 

 

가선대부 예조참판 이명남(李命男)

이명남(李命男,1556~1619/1622) 조선후기문신, 의병장이다.

()는 갑보(甲甫) 또는 신보(申甫)이고, 본관은 우계(羽溪)이다.

아버지는 승문원주서와 승정원주서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이성헌(李成憲)이고,

어머니 전주이씨 이봉령(李奉令)

   세종대왕의 5남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의 후손으로,

   광성정 이전(匡城正 李銓)의 손녀이며 광원수 증 광원군 이구수(廣原守 贈 廣原君 李耉壽)의 딸이다.

 

증조부는 병마절도사와 예조참판을 지낸 이광식(李光軾)이고,

할아버지는 도승지 이조,병조,형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이감(李戡)이다.

아버지 이성헌은 이량의 당여로 몰려 파직과 면직, 복관 등을 반복하고

진위장군호분위사정 겸 영서도찰방 등을 지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부장으로 활동했다.

동생으로는 이길남이 있는데, 이경항의 아버지이고 송곡 이서우의 조부가 된다.

그가 태어날 무렵 증조부 이광식이 생존해 있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은

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1591(선조24)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에는 의병으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605(선조35)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 찰방을 거쳐 해미현감, 용담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예조정랑 지지교, 승정원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예조참의 등을 거쳐

1617(광해군 9) 인목대비 폐모론 당시 정청에 참여하였다.

1616(광해군8) 10월 공조참의로 그 달에 중시, 별시가 시행되자 과거 시험관의 한사람이 되었다 

1618(광해군11) 경복궁, 경덕궁의 중건에 참여 선왕의 어진을 운반하고 

이때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났다.

1619(광해군11) 1월 광해군의 명으로 특별히 한 자급을 올려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하였다.

 

 

 

嘉善大夫禮曹參判李命男之墓

가선대부예조참판이명남지묘

 

 

 

 

 

 

//우계이씨 가선대부 예조참판 이명남 가계// 

    증조부  예조참판 이광식(李光軾)

    증조모  함안이씨 양간공 이세응(李世應)의 따님

    종조부  대사간 이전(李戩)

    종조부  이용(庸戈) 

       조부  이감(李戡)

       조모  풍천임씨, 좌참찬 정헌공 임권(任權)의 따님

    계조모  예천윤씨, 또는 예산윤씨, 윤연수(尹連壽)의 따님

이복 숙부  이희헌(李希憲)

이복 숙부 이유헌(李有憲)

이복 숙부  이의헌(李宜憲)  

    아버지  이성헌(李成憲)

    어머니  전주이씨 이봉령(李奉令), 광원군 이구수의 따님

          동생  이길남(李吉男)

                  조카  이경복(李慶復)

                  조카  이경항(李慶恒)

              가선대부 예조참판 이명남(李命男)

              부인  동래정씨, 현령 정순하(鄭純嘏)의 따님, 정광필의 종 증손녀

              부인  전의이씨, 이대임(李大任)의 따님

                      아들  이경익(李慶益) 

             외조부 광원군 이구수(廣原君 李耉壽)

                장인  정순하(鄭純嘏)

                장인  이대임(李大任)

                장모  능성구씨, 구윤손(具潤孫)의 따님

 

 

 

 

뉘신지요 아시는 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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