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
서울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서울추모공원 옆)
반사경 옆 가로등 전주후면 입구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
1633년(인조 11)~1709년(숙종 35)
본관은 우계(羽溪). 字는 윤보(潤甫), 휴징(休徵), 호(號)는 송곡(松谷)·송파(松坡)·구계(癯溪)·계옹(溪翁).
사복시첨정 이성헌(李成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연참찬관 이길남(李吉男)이고,
아버지는 사복시첨정으로 증 예조판서 이경항(李慶恒)이며,
어머니는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7대손인 수군절도사 이경유(李慶裕)의 딸이다.
1651년(효종2) 생원시를 거쳐
1660년(현종1) 성균관유생으로 과제(課製)에 1등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해의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1) 문장에 재주가 있다 하여 미수 허목(眉叟 許穆)의 추천을 받았다.
같은해 정언이 되어 인조반정 이후 대북가문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올랐다.
서인인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의 예론과 그것을 따르는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을 공격하였으며,
7월에는 대신을 공격하는 만성 이수경(晩醒 李壽慶)을 변호하다 파직당하였다.
1676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오고 남인으로 생활하다가
1680년 경신환국 때 서인의 공격을 받아 유배당하였으나,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자 병조참의로 등용되었다.
그 뒤 김수항 등 서인을 공격하였으며, 인현왕후(仁顯王后) 축출 때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인삼에 대한 행정처리 잘못으로 삭직당하였다.
1692년 수옹 목내선(睡翁 睦來善)에 의하여 문장으로 천거받아 예문관제학이 되었으며,
1693년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삭출당하였다가 1697년에 풀려났다.
그 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존와 최석정(存窩 崔錫鼎)에 의하여 청백함을 인정받아,
서용하라는 명령이 임금으로부터 내려졌으나 현직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이후 청계산 근처로 낙향해 생활하였다.
그는 송시열과 김수항 등이 진리를 호도하고 학문의 자유를 가로막고
권력으로 자신들의 사론을 관철시킨다고 계속 비판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서인의 북벌론에 대해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려준 초구를 개가죽에 빗대어 조롱하기도 했다.
그는 비변사로부터 여러번 지방관직의 물망에 올랐지만 번번히 낙마하고 만다.
1700년(숙종26) 2월 3일 신임 강화부유수 적임자를 천거할 때
의정부 우참찬 유재 이현석(游齋 李玄錫)이 그를 추천했지만 또 다시 낙마하였다.
1701년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되면서 장희재를 비롯한 남인 인사들이 처형당하고 그는 금고령을 받았다.
그해 10월 희빈 장씨가 사사된 뒤 다른 남인 당원과 함께 사면되지만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광주 청계산 철곡 근처 신원리로 낙향하여 만년에는 후학에게 학문과 시문을 가르치는 일로 소일했다.
청계산 동쪽에는 형 이가우의 외손들이 살고 있었다. 시(詩)에 뛰어나고 서도(書道)로도 알려졌다.
처음에는 동리 아이들과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남인 청년들이 찾아왔다.
연초재 오상렴(燕超齋 吳尙濂), 희암 채팽윤(希菴 蔡彭胤), 약산 오광운(藥山 吳光運), 학고 김리만(鶴皐 金履萬),
국포 강박(菊圃 姜樸), 이정휴(李井休), 송애 이수대(松崖 李遂大), 창설재 권두경(蒼雪齋 權斗經),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 등이 그의 문하에 찾아와 시와 학문을 배웠다.
성호 이익(星湖 李瀷) 역시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고,
이는 안정복, 강박, 신후담, 채제공 등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윤선도, 이민구 등의 시문과 학문을 후대에 전하는 역할을 하며,
공주목사를 지낸 자행 김정하(子行 金正夏)와는 동년배로 자갑(雌甲)과 대무(大戊)를 논하며 지내었다.
연초재 오상렴(燕超齋 吳尙濂)은 1704년(숙종30년) 스물 다섯 살 때,
학고 김리만(鶴皐 金履萬) 등과 함께 송곡 이서우에게 시를 배웠다.
그러나 오상렴은 1707년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다.
만년에는 성호사설을 지은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도 그의 문하에 찾아와 자주 출입했다.
그는 이서우를 찾아 뵌 이후, 공부하다 모르는 점이 있으면 그에게 자주 묻고 배웠는데,
이익은 이서우를 '사백'(詞伯)이라 칭하면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인 이서우를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성호가 송곡에게 가르침을 청하거나 자신이 공부한 것을 검증받는 등의 내용을 기술하였다.
저서로 《송파문집松坡文集》20권과 《강사康史》 2권, 호랑이에 관한 자료를 편역한 《호사》 등이 있으며,
호사는 현재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작품으로는 김포 문수사(文殊寺) 풍담대사비(楓潭大師碑)의 전액이 유필(遺筆),
예산군 불산면 본점리 의정부영의정 이의배(李義培) 신도비의 수액, 이상의의 소릉문집 서문 등이 남아 있다.
1705년(숙종31년) 73세에 51세인 장남 이정관이 죽었으며,
또한 자신이 20여 년 이상 단골로 다니던 주막의 주모가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7언 율시를 지어 추모하였다.
1709년(숙종35년) 10월 14일에 과천 청계에서 졸 하였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곧 경기감사가 서계를 올려 그의 죽음을 알렸고,
10월 17일 예조에서 조제와 부의를 법전대로 내려줄 것을 상주하여, 숙종이 승인하였다. 그의 나이 77세였다.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 철곡(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철곡) 유좌의
정부인 청송심씨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 위에는 종조부 이명남,
재종조부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복남의 의관과 갑옷을 묻은 허묘와 그 부인 청주한씨의 합장묘,
고조부 이광식의 묘소가 연이어 있다.
그의 묘소 남쪽에는 2011년 건립된 서울추모공원이 있다.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철곡 근처에 있던
다른 종친의 묘역은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작실부락, 그의 영정각 근처로 이장되었다.
嘉善大夫吏曹參判松谷羽溪李公瑞雨之墓 貞夫人靑松沈氏祔左
가선대부이조참판 송곡우계이공서우지묘 정부인청송심씨부좌
1701년 남인의 몰락 이후 송곡의 두 서자 이익관(李翼觀), 이순관(李順觀)과 서녀 사위 민관효가
1728년(영조4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하였다.
셋째 아들 이홍관은 처형당하고, 괘서를 돌리는데 가담한 이익관, 이순관 형제는 능지처참당하고 가산을 적몰당했으며,
이인좌를 도운 서녀 사위 민관효 일가 역시 처형당하고 가산은 적몰당한다.
이들의 후손들은 서손 이계강, 이철강 등을 비롯, 극변의 노비로 끌려가게 된다.
그밖에 이정관의 아들 이번(李蕃) 등도 연루되어 극변에 노비로 끌려갔다가 석방된다.
이서우 역시 역모로 연좌되어 추탈당했다.
그의 두 아들 이정관(李正觀)과 이석관은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화를 모면하였으나
그의 적손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경상북도 성주와 강원도 원주 등으로 흩어졌다.
1745년(영조21) 10월에는 을축 나주괘서 사건에
그의 손자이자 이정관(李正觀)의 아들 이심(李蕃)이 연좌되어 처형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했고,
외손 강박, 외증손 신후담 등도 연좌되어 출사에 제한을 받게 된다.
정조 때 남인이 집권하면서 1795년(정조19년) 10월 다시 복권되었다.
외손자 강박은 큰아버지 강석번의 양자로 입양되었는데도, 이익관, 이순관에 연좌되어 관직 출사에 불이익을 받았다.
그의 외증손 중에 천주교비판론자인 신후담도 있고,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은 홍이석에게 시집간 그의 딸의 외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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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후 남인 학문과 시맥의 정통이자 남인 문단의 종장으로 추숭되고
훗날 채제공에 의해 허목-이서우-이익으로 남인 학문, 시문의 법통으로 규정되었다.
그의 문집은 외손 국포 강박이 정리했고, 강박의 손자 강세륜과 강세백이 재정리하여 간행하였고,
이서우의 직계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 1995년 연세대학교에서 국역으로 간행되어 알려졌다.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단강리 작실에 그를 제향하는 영정각이 세워졌다.
매년 3월 1일 원주군 부론면 단강리 영정각에 다례를 올리고 있다.
1995년 8월 후손들에 의해 묘비가 다시 수립되었다.
송곡 이서우 묘역 후경
//송곡 이서우 松谷 李瑞雨 가계도//
18대조 우계이씨 1세조 이양식李陽植
17대조 이순우李純祐 국자대사성 보문각대제학 금성군 최충헌의 난 살해
16대조 이적李迪 호장
15대조 이홍준李洪俊, 중윤 호장 이공용李公用
14대조 이구李球(초명 이옥李沃) 예빈시승 예빈시경동정 삼척 죽서루 시구 2수
13대조 이백경李伯卿 영동정, 이천승李天升
12대조 이사성李思誠 밀직대부
11대조 이의李薿 퇴은(退隱), 밀직부사 여말 불사이군 소백산은거
10대조 이만李蔓 중추원부사 이원길李原吉
9대조 이인숙李仁淑 지덕천군사 판사복시사
8대조 이경연李景衍, 충좌위 부사정 우계이씨 부사정공파 파조
7대조 이징李徵 선무랑
6대조 이지방李之芳 동지돈녕부사
5대조 이광식李光軾(1493~1563)
고조부 : 이감李戡 사헌부 대사헌
증조부 : 이성헌李成憲 성균전적(1534년~1601년)
재종조부 : 이복남李福男 병마절도사 충장공(1555년~1597년)
종조부 : 이명남李命男 가선대부 예조참판(1556년~1619년)
할아버지 : 이길남李吉男 경연참찬관 증좌승지 (1561년~1644년)
아버지 : 이경항李慶恒 사복시첨정 춘추관 기주관 (1601년~1643년)
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600년~1667년, 효령대군 7대손 병마절도사 이경유의 딸)
형님 이덕우李德雨( ? ~1687년)
조카 : 이일관李日觀( ?~1705년, 부사)
형님 이가우 李嘉雨(1621년~1646년 초시합격요절 증 이조참판)
형님 이희우李喜雨( ~1705년, 이조참판)
송곡 이서우 松谷 李瑞雨 1633~1709
배위 정부인 청송심씨淸松沈氏(1632년~1673년) 금부도사 심광위沈光渭의 딸
장남 이정관李正觀(1655년~1705년)
손자 : 이번李蕃(1679년~ ? )
손자 : 이내(李來+田)
손자 : 이여(李畲, 1683년~ ?년)
증손 : 이종일(李種一)
손자 : 이색(李嗇, ? -1745년)
차남 이석관(李碩觀, 1657년-?)
손자 : 이번(李番, 1686년~ ?)
손자 : 이밀(李蜜)
삼남 이홍관(李弘觀, 자는 중유, 일명 주관(周觀), 1665년-1728년)
손자 : 이심(李審, 1686년-1729년)--나주괘서사건연루
부인 ?
부인 ?
서자 : 이익관(李翼觀, ? -1728년) 이인좌의 난 연루
서손자 : 이금강(李今剛, 1712년~1728)
서자 : 이순관(李順觀, ? - 1728년) 이인좌의 난 연루
서손자 : 이철강(李鐵剛),
서손자 : 이계강(李戒剛)
서녀사위 : 민관효(閔觀孝, ?-1728년, 민종도의 서자, 민암의 서손자) 이인좌의 난 연루
서자 : 이현관(李顯觀, ? -1728년 이전 사망)
서자 : 이관상(李觀上)
서손자 : 이술(李述)
서손자 : 이부(李富)
벽암두릉연가 서손자 : 이자득(李自得)
서울-충장공 이복남(忠壯公 李福男), 예조참판 이명남(李命男) (0) | 202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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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병조참판 백흠 이광식(伯欽 李光軾) (0) | 202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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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사헌부대사헌 이감(李戡), 성균전적 이성헌(李成憲), 선무랑 이길남(李吉男), 우계이씨 (0) | 2020.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