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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한양조씨 시조단소 매산마을 시조 조지수(趙之壽),조휘(趙暉),조양기(趙良琪),조돈(趙暾),조인벽(趙仁璧)

구름에 달

by 碧巖 2020. 4. 6.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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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조씨 시조단소 홍성 매산마을

충남 홍성군 홍복읍 대인리 559-2

 

 

 

 

漢陽趙氏始祖中書公以下五世祖設壇顚未記

한양조씨시조중서공이하오세조설단전말기

 

 

한양조씨 시조 조지수(趙之壽) 단소

 

 

漢陽趙氏 始祖 中書公 趙之壽

한양조씨 시조 중서공 조지수

고려첨의중서사 조지수 高麗僉議中書事 趙之壽

고려에서 조순대부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는 기록이

한양조씨 최초의 족보인 갑신단권보(甲申單卷譜)의 추록(追錄)에 전한다고 한다.

중서공(中書公)이 관직에 있을때는 1275년(충렬왕 1)부터 원나라의 간섭으로 고려 관제가 격하되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상서성(尙書省)이 첨의부(僉議府)로 통합개편되었던 시기로 추정된다.

배위에 관하여도 전하는 바가 없으며,  아들은 총관공(摠管公) 조휘(趙暉)이다.

 

1901(조선 고종38) 후손 진사(進士) 조준식(趙俊植)

공의 묘소가 있었다는 함경남도 영흥군 서면 은곡동에 단비를 세우고

, 가을로 제사를 받들었다고 하나 남북이 갈린 후에는 그 소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高麗朝順大夫僉議中書事  漢陽趙公始祖諱之壽之壇

고려조순대부첨의중서사  한양조공시조휘지수지단

 

 

 

 

 

 

한양조씨 시조 조지수(趙之壽) 단소 후경

 

 

 

雙城摠管漢陽趙公諱暉之壇

쌍성총관한양조공휘휘지단

 

 

한양조씨 2세 총관 조휘(趙暉)

1258(고종45) 쌍성총관(雙城摠管)을 지냈고 삼중대광은청광록대부(三重大匡銀靑光祿大夫)에 올랐다.

쌍성총관은 조휘(趙暉)-조양기(趙良琪)-조림(趙琳)-조소생(趙小生)까지 499년간 세습되었으며,

배위에 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고 11녀를 두었는데 1남은 부원수 조양기(副元帥 趙良琪)이며,

1녀는 홍주인 이천소(洪州人 李倩笑)와 혼인하니, 문강공 이유성(文剛公 李維城)의 아들이다.

1677(숙종3) 문간공 용주 조경(文簡公 龍洲 趙絅)의 조카인 송천공 조위명(松泉公 趙威明, 14)

왕명을 받들어 북도(北道)의 모든 능소를 봉심할 때 묘비가 파손된 것을 발견하여 문중에 처음 알렸고,

1683(숙종9)양절공파의 조충의(趙忠義),조세흥(趙世興).외손들과 연명장계를 올리고 와서 옮겼다 한다.

1687(숙종13) 후손 회양군수 조종저(趙鍾箸)와 외손 안변부사 심수량(沈壽亮)이 묘비를 다시 세웠으며,

1819(순조19) 다시 고치고 쌍성총관한양조휘지묘(雙城摠管 漢陽趙暉之墓)라고 비를 세웠다고 한다. 

 

 

 

 

雙城摠管兼東征軍副元帥  漢陽趙公諱良琪  配郡夫人朴氏之壇

쌍성총관겸동정군부원수  한양조공휘양기  배군부인박씨지단

 

 

 

 

한양조씨 3세 부원수 조양기(趙良琪)

원연합군의 부원수로 일본 원정, 그 때 받은 옥대는 세보로 박물관에 기탁

13세의 나이에 쌍성총관을 물려받고 정헌대부로 감문위 상호군(監門衛 上護軍)을 겸하였다.

1281(충렬왕 7) 안동김씨 중시조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이 도원수(都元帥)

2차 여원연합군의 부원수로 출정하여 군사를 온전히 하여 돌아온 공으로

원 세조로부터 금포옥대(錦袍玉帶)를 받았다.

금포는 낡아 없어지고 옥대만 세보로 전해 오는데

문화재보호법에 의한 일반 동산문화재로 서울역사박물관에 기탁되었다.

정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용천부원군 조림(趙琳)과 용성부원군 조돈(趙暾) 형제와 1녀를 두었는데 

따님은 이자춘(李子椿)의 배위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조부이다.

묘소는 함남 영흥군 덕흥면 용천리에 합장하였다 하며,

1757(영조33)에 세운 신도비문은

판서를 지낸 풍산인 현서 정혜공 홍상한(賢西 靖惠公 洪象漢)이 찬하고

그의 아들인 영의정 항재 효안공 홍낙성(恒齋 孝安公 洪樂性)이 썼다.

 

 

 

 

三重大匡龍城君贈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 龍城府院君門下左侍中漢陽趙公諱暾

配杆城郡夫人李氏之壇

삼중대광용성군증추충익대보리찬화좌명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 용성부원군문하좌시중한양조공휘돈

배간성군부인이씨지단

 

 

 

 

한양조씨 4세 용성부원군 조돈(龍城府院君 趙暾)(1308~1380)

쌍성수복에 협력하고 홍건적 격퇴 좌명공신과 용성부원군에 훈봉

처음의 휘는 조우(趙祐).

충숙왕(忠肅王1294~1339/ 재위1313~1330,복위1332~1339) ,

고려의 유민이 세금을 포탈하고 자주 여진 지역으로 도망하므로 여러 번 길주에 파견되어

160여 호의 주민을 데려온 공로로 왕이 말과 비단을 내리고

감문위 낭장(監門衛 郎將), 좌우위 호군(左右衛 護軍)이 되었다.

1356(공민왕5) 쌍성수복작전 때 조카인 총관 소생에게 아들 조인벽(趙仁璧)을 보내

쌍성인을 회유하는 등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에 적극 협력하여

철령 이북의 구주십진(九州十鎭)을 회복하고

예빈경(禮賓卿), 태복경(太僕卿)이 되어 개경의 저택을 하사받았다.

 

1359년 지병마사로 서경에 출몰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판사농시사가 되었고

1361년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올라, 홍건적의 재침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복주福州(현 안동)로 남행하는 왕을 따라 행궁숙위의 책임을 맡았다.

그 후 해주목사, 예의판서, 검교밀직부사등을 거쳐

1375(우왕1) 추충익대보리찬화좌명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용성부원군

                       (推忠翊戴輔理贊化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龍城府院君)에 봉해졌고,

1379년 용진(龍津)에 돌아가 자제들에게

"온 힘을 다하여 왕실을 받들라"고 훈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군부인 간성이씨(杆城李氏)(1309~1379, 평리 이홍복評理 李洪福의 따님)와의 사이에

4자를 두었고,

묘는 강원도 안변군 신모면 어유지 능척곡에 병장(並葬)하였다.

 

한양조씨 시조 중서공 조지수(趙之壽) ,

2세 총관공 조휘(趙暉) ,

3세 부원수공 조양기(趙良琪),

4세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  趙暾),

5세 용원부원군 양렬공 조인벽(龍源府院君 襄烈公 趙仁璧) )

5의 묘소는 모두 북녁에 있어 20056월 제단과 비를 세우다.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贈左政丞領經筵事漢山伯諡襄烈  漢陽趙公諱仁璧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용원부원군  증좌정승영경연사한산백시양열  한양조공휘인벽

配貞敬夫人河東鄭氏   配貞和公主全州李氏之壇

배정경부인하동정씨   배정화공주전주이씨지단

 

 

한양조씨 5세 양렬공 조인벽(襄烈公 趙仁璧)(1328~1393)

문무 겸전으로 선정을 펴고 왜구를 격파 불사이군과 후진교화로 동명서원에 배향

호는 우계(愚溪)해월정(海月亭).

1356(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柳麟雨)를 도와 쌍성을,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서경을 수복하여 호군이 되었다.

1363년 김용(金鏞)의 난을 토벌하고 홍건적 침입 때 개성을 수복한 공으로 수복경성(收復京城)이등공신이 되고

1372년 이후 안주함주북청옹진삼척울진우계영월안동 등지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봉익대부에 올랐다.

1378(우왕 4) 판밀직(判密直)으로서

         화포제조기술을 가르치고 수군을 훈련시켜 왜구를 격퇴하고 강릉도의 상원수(上元帥)가 되었다.

1383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선정을 펴는 데 진력하고

동북면도체찰사(東北面都體察使)에 이어 교주도원수(交州道元帥),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純誠翊衛協贊輔理功臣 三重大匡龍源府院君 三司左使兼判小府寺事判懿德府事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 삼중대광용원부원군 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판의덕부사

조선조에서

推誠亮節翊衛輔理佐命功臣 輔國崇祿大夫門下左政丞 判都評議司事領經筵事 漢山伯

추성양절익위보리좌명공신 보국숭록대부문하좌정승 판도평의사사영경연사 한산백

증직되고 양렬(襄烈)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고려 왕조가 회복불능 상태가 되자 관직을 버리고

양양의 대포진 시상촌(柴桑村)바닷가에 작은집 한 채를 지어

해월정(海月亭)이라 이름하고 월촌 정만(月村 鄭慢), 강해 이장년(江海 李長年),

도사 혜선(道師 慧禪)등의 (시우詩友)들과 도의를 벗하면서

처남인 조선 태조 이성계가 지난 날 동고동락하던 의리를 생각하여

여러번 조정에 들어올 것을 권했으나 응하지 않은 채,

백의백립(白衣白笠)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하니

후세에 양양의 선비들이 공을 흠모하여

양양읍 조산리에 동명서원(東溟書院)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향사하고 하였다.

 

문무를 겸해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였고 장한 충절은 고려 말의 삼은(三隱)과 나란히 하였다.

특히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는 7년이나 연상이었지만

외적을 격퇴하면서도 내치와 외교에서도 그리고 시우(詩友)로서도 생사고락을 같이한 막역한 사이였다.

전배前配 하동정씨(1326~1358)

계배繼配 정화공주(貞和公主)(1345~1409)와의 사이에서 양절공양경공 등 73녀를 두었다.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사곶리에,

하동정씨의 묘는 실전되었고 정화공주의 묘는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전재리에 있다

 

 

 

 

 

한양조씨 가계도

시조 고려첨의중서사 조지수(高麗僉議中書事 趙之壽)

 2쌍성총관 조휘(趙暉) 

 3부원수 조양기(趙良琪)

 4세 용성부원군 조돈(龍城府院君 趙暾)

 5용원부원군 양렬공 조인벽(龍源府院君 襄烈公 趙仁璧)

 6세 한천부원군 양절공 조온(漢川府院君 良節公 趙溫)

 7자헌대부 지중추원사 한풍군 조완(漢豊君 趙琓)

 8대호군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조증(趙璔), 홍성(湖西)입향조

   9승지 조윤선(趙允瑄) 

   9예안현감 조윤찬(趙允瓚)

   9어모장군 용양위부사직 조윤영(趙允瑛) 

   9세  중훈대부 면천군수 조윤상(趙允瑺)

   9 오위사직 조윤수(趙允琇)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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