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성씨 문간공 우계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
경기도 기념물 제59호
경기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390-61
문간공 우계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
1535년(중종30)~1598년(선조31)
본관은 창녕(昌寧). 字는 호원(浩原), 號는 묵암(默庵), 우계(牛溪).
현령 성충달(成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세순(成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성수침(成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딸이다.
1551년(명종6)에 생원, 진사의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1)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 30세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1569년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李珥)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일찍이 이황(李滉)을 사숙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中庸)』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율곡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하나,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 사옹원정, 사재감정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83년 특지로 통정대부에 가자하여 병조참지로, 이어서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1584년(선조17)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졸하자
이조참판직을 사양하며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자신을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우계는 율곡이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이
1590년 정여립 역옥사건(鄭汝立逆獄事件)의 주모자로 무고되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성혼은 송강(松江)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아들인 창랑(滄浪) 성문준(成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자신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蹕)하면서 불러들여
전 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동각(東閣)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성혼이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의정부 우참찬에 특배하였다.
성혼은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의인왕후(懿仁王后)의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경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퇴우당(退憂堂) 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성혼은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치천(稚川) 윤방(尹昉)과 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이 있다.
1598년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 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배향되였다,
昌寧成公諱渾之墓
창녕성공휘혼지묘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世子傅 通政大夫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 세자부 통정대부
諡文簡公 行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牛溪成先生墓表陰記 外孫 尹舜擧 敬書
시문간공 행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 우계성선생묘표음기 외손 윤순거 경서
문간공 우계 성혼 신도비(文簡公 牛溪 成渾 神道碑)
좌의정 문정공 청음 김상헌(文正公 淸陰 金尙憲) 찬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 서
우의정 문충공 선원 김상용(文忠公 仙源 金尙容) 전액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兼領經筵事 世子傅諡文簡公行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 牛溪先生成公神道碑銘幷序
유명조선국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겸영경연사 세자부시문간공행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 우계선생성공신도비명병서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 世子傅 金尙憲 撰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상헌 찬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 領經筵事監春秋館事 金尙容 篆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김상용 전
通政大夫承政院右承旨兼 經筵參贊官 金集 書
통정대부승정원우승지겸 경연참찬관 김집 서
//창녕성씨 문간공 우계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가계//
5대조 성억(成抑)
고조부 성득식(成得識) 한성판윤
증조부 성충달(成忠達) 현령, 증 판서
할아버지 성세순(成世純), 대사헌 지중추부사, 사숙공(思肅公)
할머니 정부인 광산김씨, 강화부사 김극니(金克怩)의 따님, 좌의정 정정공 서석 김국광(丁靖公 瑞石 金國光)의 손녀
아버지 문정공 청송 성수침(文貞公 聽松 成守琛)
어머니 증 정경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 판관 윤사원(尹士元,정현왕후의 조카)의 따님
문간공 우계 성혼(文簡公 牛溪 成渾)
배위 정경부인 고령신씨, 군수 신여량(申汝樑)의 따님, 좌의정 신용개(신용개) 손녀
장남 성문영(成文泳) 早卒
차남 성문준(成文濬) 영동현감, 창녕 물계서원(勿溪書院) 제향
배위 함안조씨, 주부 조감(趙堪)의 따님, 충숙공(忠肅公)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의 외손녀
손자 성력(成櫟) 사재감첨정—계 성희주(成熙胄) 군수
손자 성익(成杙) 별좌
손자 성직(成㮨) 지중추부사
삼남 성문잠(成文潛)
사위 함열남궁씨 별좌 남궁명(南宮蓂)
사위 파평윤씨 증 영의정 문정공 팔송 윤황(文正公 八松 尹煌)
숙부 증 직제학 절효공 성수종(節孝公 成守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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