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순천-송광사(松廣寺)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종교

by 碧巖 2021. 7. 7. 22:23

본문

728x90

순천 송광사 고향수(松廣寺 枯香樹)

순천 송광사(松廣寺)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등

사적 제506호 순천 송광사(松廣寺) 현존 당우

국보  제42호 :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3호 : 혜심고신제서(惠諶告身制書)

국보  제56호 : 대웅전·국사전(國師殿)

보물  제90호 : 대반열반경소 권9~10 (大般湟槃經疏 卷九~十)

보물 제175호 : 경패(經牌)

보물 제176호 : 금동 요령(金銅搖鈴)

보물 제204호 :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妙法蓮華經觀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贊科文),

보물 제205호 :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大乘阿毘達磨雜集論疏) 1093년 간행

보물 제206호 :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經讚述) 1095년 간행

보물 제207호 : 금강반야경소개현초 권4~5 (金剛般若經䟽開玄抄 卷四~五)

보물 제263호 : 하사당(下舍堂)

보물 제302호 :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3호 : 영산전(靈山殿), 청량각(淸凉閣), 척주각(滌珠閣), 우화각(羽化閣), 천왕문(天王門),

                    해탈문(解脫門), 대장전(大藏殿) 등 50여 동

보물 제572호 : 고려고문서(高麗古文書)

보물 제1368호 : 영산전 영산회상도와 팔상도(靈山殿 靈山會相圖와 八相圖)

보물 제1467 : 소조사천왕상(塑造四天王像), 그리고 영산전목불좌상(靈山殿木佛坐像)등이 있다.

 

 

순천 송광사(松廣寺)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등

사적 제506호.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大吉祥寺), 수선사(修禪寺)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체징(體澄)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무학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三道討捕使兼前營將金公始豊善政碑

삼도토포사겸   전영장  김공시풍선정비

전주영장 추당 김시풍(秋塘 金始豊) (1836~1894년(고종31)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字는 태화(泰華), 號는 추당(秋塘), 본명은 명기(明琦), 본관은 강진(康津)이다.

1871년(고종8년) 36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1876년 이후부터 순천영장겸 삼도도포사를 지냈고,

전주감영(全州監營)의 장교로 일찍이 동학교도 탄압에 공을 세웠으며

1894년 59세에 전주영장(營將) 재임시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였다.

 

동학농민군을 막아 내라는 임무를 띠고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된 홍계훈(洪啓薰)이

1894년 4월 11일 전주성에 입성하여,

동학농민군의 승승장구로 사기가 땅에 떨어진 관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하여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과 의논하여,

전주성내에 동학농민군의 김개남(金開南)등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사람 6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전라감영 수교(首校) 정석희(鄭錫禧)와 같이

전주영장 추당 김시풍(秋塘 金始豊)도 같이 체포되어 같은 달 11일 목이 잘려,

12일 아침 역시 같은 혐의로 목이 잘린

김영배(金永培), 김용하(金用夏), 김동근(金東根)과 함께 전주 남문(南門) 밖 장터에 효수되었다.

 

그런데 동학농민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에 대하여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이들의 참소는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이 잘못된 판단에서 발생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를 반증하듯 전남 곳곳에 김시풍 선정비와 마애비, 불망비 등이 세워져 있다.

 

 

 

 

 

 

 

 

 

 

 

====================================================================

 

洗月閣, 滌珠堂

세월각, 척주당

일주문 안쪽에 죽은자의 위패를 두고 그 영혼이 속세의 때를 벗는 관욕처로

혼백의 목욕을 시키는 곳인 세월각과 척주당.

세월각은 여자 영가를,

척주당은 남자 영가의 관욕처로 사용하였다.

송광사 삼청교(三淸橋) 및 우화각(羽化閣)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9호

송광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02호                                                송광사 영산전(靈山殿) 보물 제303호

대웅전 마당 한편에 작지만 품격있는 건물 두 채가 있는데

보물 제302호인 약사전과

보물 제303호인 영산전이다.

영산전 내부 불화는 또 보물 제1368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보전 좌측 뒤편에 관음전이 있고 관음전 뒤편 계단을 올라가면 보조국사 감로탑(普照國師 甘露塔)이 있다.

지눌 스님의 시호가 불일 보조국사이고, 탑호가 감로탑이다.

대웅보전 좌측에 승보전이 있고, 그 옆에 여물통 같은 구유 2개가 포개져 있다.

이것을 비사리구시라 하여 절에서 국재를 모실 때

사찰에 온 사부대중을 위해 쌀 7가마니로 4,000명분의 밥을 지어 담아 두었던 용기라고 한다.

승보전 뒤편에 서울 덕수궁 석어당과 같은 2층 한옥집 중현당과

도성당을 돌아 뒤편으로 가면 무무문(無無門)과 효봉대선사 사리탑, 효봉영각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