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만덕산 백련사(萬德山 白蓮寺)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산55-1
만덕산(萬德山)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萬德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大興寺)의 말사이다.
백련사에 대한 사적은 1432년(세종13)
문도공 청향당 윤회(文度公 淸香堂 尹淮)가 저술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만덕사지(萬德寺誌)』 등에 나타나 있다.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였다.
이 절은 839년(문성왕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중요한 수도도량으로 면모를 달리한 것은 1211년(희종7) 요세(了世)가 크게 중창한 뒤부터이다.
요세는 천태종계(天台宗系)의 승려로서 고승 지눌(知訥)과 깊은 친분 속에서 지눌과 함께 송광사에 머물다가,
1208년에 천태종의 묘의(妙義)를 얻었고,
강진의 부호였던 최표(崔彪)와 최홍(崔弘), 그리고 이인천(李仁闡) 등의 권유로 만덕산에 자리를 잡고
그의 제자 원영(元營)으로 하여금 가람 80칸을 짓게 하였으며,
이 역사(役事)는 1211년부터 1232년(고종19)까지 21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당시 목백(牧伯)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물을 보시(布施)하였다고 한다.
절이 완공되자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실천 중심의 수행인들을 모아 결사(結社)를 맺었다.
이것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수선사(修禪社)와 쌍벽을 이루었던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이다.
그 뒤 이 절에서는 120년 동안을 이어 고려의 8국사(國師)를 배출하였다.
요세 원묘국사(圓妙國師), 천인 정명국사(靜明國師), 원환국사(圓晥國師), 천책 진정국사(眞靜國師), 원조국사(元祖國師), 국통 원혜국사(圓慧國師), 혜소 진감국사(眞鑑國師), 목암국사(牧菴國師) |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절도 함께 폐허화되었다.
조선 세종 때에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보호를 받아 주지 행호(行乎)가 불타버린 가람을 복원하였다.
그 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였으며, 그때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조계종이 송광사를 중심으로 하여 종세(宗勢)를 키우고 있을 때,
이 절은 천태사상에 입각한 결사도량(結社道場)을 개설하여 침체한 불교중흥을 꾀한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외세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절 주위에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을 행호토성(行乎土城)이라고 한다. 현재의 절 또한 그때 쌓은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만경루(萬景樓)
육화당(六和堂)
삼성각
범종각
백련사 명부전
응진당(應眞堂)
백련사 사적비(白蓮寺 事蹟碑) 보물 1396호
백련사 사적비(白蓮寺 事蹟碑) 보물 1396호
전체 높이 400㎝, 귀부 높이 110㎝, 비신 높이 233㎝, 너비 118㎝, 두께 29㎝.
귀부(龜趺)·이수(螭首)·비신(碑身)을 모두 갖춘 완형으로
비명은 ‘전라도강진만덕산백련사사적비(全羅道康津萬德山白蓮寺事蹟碑)’이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1행은 45자로 되었으며 행서체이고,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홍문관수찬 간재 조종저(艮齋 趙宗著)가 찬하였다.
이 비문과 만덕사지(萬德寺志)에 의하면
고려 한림학사 동산수 최자(東山叟 崔滋)가 찬한 고려시대의 고비(古碑)가 있었으나 그 비신을 잃어,
이 사적비를 세울 때 그것의 귀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최자(崔滋)가 찬한 원래의 고비는 백련사 원묘국사(圓妙國師)의 비로 추정되며,
그 비명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따라서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있는 귀부는 고려 후기의 것으로
고려 전기 귀부에서 볼 수 있는 역동적인 모습보다는 동세가 약하고 장식적인 모습을 보인다.
얼굴은 용두화(龍頭化)되었으며 입에는 여의주가 없고 목에는 5개의 줄이 가로로 음각되었다.
네 발의 발톱은 살짝 움켜쥐듯 모았으며 이중의 육각문 안에는 5엽의 화문이 장식되어 있다.
비좌 주변에는 인동문(忍冬文)이 조각되어 있고, 비신의 양 측면에는 화려한 당초문이 있다.
이수는 사각형이며 두 마리의 용이 반대 방향을 보고 있다.
이 비는 ‘
崇禎紀元戊辰後五十四年辛酉五月立
숭정기원무진후오십사년신유오월립)’이라 하여 1681년(숙종 7) 5월에 세웠음을 밝히고 있다.
1681년 홍문관수찬 간재 조종저(艮齋 趙宗著)가 짓고,
선조의 12남인 인흥군 이영(仁興君 李瑛)의 장남 낭선군 관란정 이우(朗善君 觀瀾亭 李俣) 가 쓰고,
낭선군의 아우 낭원군 최락당 이간(朗原君 最樂堂 李侃)이 전(篆)하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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