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무문(無無門)
“1966년 10월 15일 새벽 3시,
송광사의 새벽 예불을 모실 시각에 효봉(曉峰)은 제자를 불렀다.
곁을 지키고 있던 손상좌 현호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가부좌를 튼 효봉은
상수제자인 구산 수련(九山 秀蓮)을 데려오도록 했다.
구산이 달려오자 효봉은 지긋이 눈을 내리감은 채 ‘드르륵 드르륵’ 손안의 호두알을 굴렸다.
그리고는 “나 오늘 갈란다.”
효봉(曉峰)은 자신의 입적을 밝은 목소리로 구산(九山)에게 알렸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겨운 문답이 잠시 오갔다.
그리고는 호두알 소리 사이로 화두를 드는 소리가 이어질 듯 끊어질 듯 들렸다.
“무(無)라~ 무(無)라~ 무(無)라~”
날이 밝아 왔다.
해가 중천을 향해 막 솟아오르기 시작할 즈음 호두알을 굴리던 효봉의 손길이 서서히 멈추었다.
가부좌를 튼 채로 효봉(曉峰)은 이생의 인연을 세수 79세로 마감하며 열반(涅槃)에 든 것이라 한다.
(무무문(無無門)에 대한 송광사 율원장 대경 스님의 설명이다.2021.02.27)
효봉스님 학눌(曉峰 學訥)
1888(고종25)평남양덕~1966
속성 수안이씨(遂安李氏). 속명은 찬형(燦亨). 법호는 효봉(曉峰).
어려서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1901년 평안감사가 개최한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다.
평양고보를 마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1913년 26세에 귀국하여 10년간 지방법원과 복심법원에서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다.
1923년 한 피고인에게 내린 사형판결로 심한 죄책감과 회의에 사로잡혀 마침내 판사직을 버리고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1925년 38세에 금강산에 이르러 출가를 결심하고 신계사(神溪寺)에서 석두(石頭)에게 계를 받았다.
법명은 원명(元明)이었으며 38세에 출가했다.
간도까지 이르는 운수행각(雲水行脚) 끝에
1927년 다시 금강산에 돌아와 조주(趙州)의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라는 화두를 들고 참구(參究)를 시작했다.
토굴 속에서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도를 깨닫고 토굴을 차고 나왔다.
절구통처럼 좌선한 채 눕지 않고 정진한다 하여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37년 이후 10년간 송광사(松廣寺)에서 수행하고
많은 승려를 제접(提接)하여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구도관을 열어주었다.
1946년 종합수도원인 가야총림 방장으로 추대되었고, 이후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했으며,
1954년 선학원(禪學院)에서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나자 이를 지도했다.
1957년 조계종 종무원장과 종정 취임,
1962년 통합조계종단 초대 종정 추대 등 후학의 지도와 정화불사운동에 전념했다.
특히 고려시대 지눌(知訥)의 정혜쌍수를 강조하며 보조의 사상을 현대 한국불교에 다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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