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리성지(新里聖地), 다블뤼주교유적지(다블뤼主敎遺蹟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화6로 135, (신리 62-3)
신리성지(新里聖地), 다블뤼주교유적지(다블뤼主敎遺蹟址)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
충남 당진시 합덕읍 평화6로 135, (신리 62-3)
신리성지는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김대건 신부와 함께 강경에 첫 걸음을 내디딘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내포 지방 천주교 유력자였던 손자선 토마스의 집에 은거하면서
황석두 루카의 도움을 받아 천주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사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수집하였다.
이 자료들은 훗날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의 기초가 되었고, 103위 성인을 탄생시키는데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또한, 신리는 천주교 탄압기의 가장 중요한 교우촌으로 인식되었다.
조선에서 가장 큰 교우 마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비밀 입국처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국의 천주교 전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곳은 조선의 카타콤바(로마시대 비밀교회)로 불리고 있다.
다블뤼 주교가 신리에서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발달된 삽교천 수계를 통해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와 긴밀히 연결될 수 있었던 점과 내포지방의 문화적 개방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포 신리 교우촌
내포 지역의 천주교는
1784년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출신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이
서울에서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면서 시작되었다.
내포지역의 천주교는 다른 어느 곳보다 빠르고 넓게 퍼져나갔고,
깊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내포지역 사람들의 개방된 종교적 심성,
둘째 수로, 바닷길, 발달된 육로 등 외부와 교류하기에 좋은 지리적 요건,
셋째 포구, 간척지대, 월경지라는 특수한 조건속에서 살아온 내포 주민들의 동질성 등이
이 지역의 천주교 성장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내포 지역의 천주교는 조선 후기에 이어진 혹독한 박해로 인해 거의 붕괴되기에 이른다.
이후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지만 오랜 박해와 충격으로 인해 신자 공동체는 제대로 터를 잡지 못하였는데,
1892년 프랑스 선교사 퀴를리에 신부가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지금의 합덕 성당을 세우게 되면서 서서히 내포의 신자들은 신앙을 회복하게 되었다.
스물여섯분이 오시네 거룩한 땅에
눈부신 빛으로 오시네 먹구름 뚫고 신유박해이백주년
십자가의 길, Way of the Cross
① 사형 선고 받으심을
② 십자가 지심을
③ 기력이 떨어져 넘어지심을
④ 성모님을 만나심을
⑤ 시몬이 십자가 짐을
⑥ 베로니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드림을
⑦ 두 번째 넘어지심을
⑧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하심을
⑨ 세 번째 넘어지심을
⑩ 옷 벗김 당하심을
⑪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⑫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⑬ 제자들이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림을
⑭ 무덤에 묻히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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