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
전라남도 나주시 금성관길 8
보물 제2037호
금성관 외삼문 망화루(望華樓)
나주 금성관 비석군
사마교비(駟馬橋碑), 나주 사마비(羅州 駟馬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
1011년 고려 현종(현종)2년에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시
고려 2대왕 혜종(惠宗)의 고향인 나주에서 10여일간 머물렀는데
이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건너갔는데 이때부터 다리를 사마교(駟馬橋)라 불렀다고 한다.
사마교비는 조선시대 나주목(羅州牧)이 금성현(錦城縣)으로 강등되었을 당시
현감 무은 정지호(霧隱 鄭之虎, 1650.12.25.~1653.1)가 사마교를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여
1651년 효종2년에 세운 것이다.
옛 나주군청에 서 있는 비로, 원래는 과원동 사매기 마을의 한 민가 담 옆에 있던 것을 1968년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받침돌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둘렀고, 머릿돌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새겼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사마교비'라는 비의 명칭을 가로로 새겼고,
앞뒷면에 걸쳐 비문을 새겨 놓았는데,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힘들다.
금성토평비(錦城討平碑)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5호
이 비는 1894년 고종31년 동학농민운동이 터졌을 때
나주읍성의 관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운 비다.
원래는 나주목 관아 아문(衙門)인 정수루(正綏樓) 앞에 세웠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가 1976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다.
비문 내용은 농민운동이 일어나 나주에까지 동학군이 쳐들어오게 된 과정과
당시 나주목의 수령이던 나주목사 민종열(閔種烈, 1893.11.20.~1895 재임)을 중심으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여
치밀한 방어계획을 세웠던 사실, 그리고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에서 싸우는 과정등을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동학군에 반대했던 유림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비문은 행주인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 1846~1916)이 짓고
여산인 송재회(宋在會)가 글씨를 쓰고
제액을 여산인 정언 송익면(宋益勉)이 써서1895년 고종32년에 세웠다.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방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나주 금성관(羅州 錦城館)---보물 제2037호
이 건물은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최초 창건은 1475년 성종6년에서 1479년 성종10년 사이에 당시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유인(李有仁,1487~1489 재임)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1603년 선조36년에 중수하였고 1617년 김개(金鎧)목사가 중수하고 1775년 이명중(李明中)목사가 개수하였다.
1884년 고종21년에는 나주목사 순천인 박규동(朴奎東, ?~1886)이 다시 중수하였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1592년 임진왜란때의 의병장 언양인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 선생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가졌던 곳이며,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했을 때도 이곳에서 명성황후의 관을 모셔 항일정신을 높이기도 하였다.
나주목 객사의 정청(正廳)이 금성관이며
좌우 건물은 날개의 뜻을 가진 익헌(翼軒)이라 하는데 각각 동익헌(東翼軒), 서익헌(西翼軒)으로 나누어 부른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 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금성관의 현판은 광산인 문정공 김태현(金台鉉)의 후손
낭옹 김현(浪翁 金晛, 1606~1683)이 1612년 나이 7세에 쓴 글씨라 한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 동익헌(東翼軒)인 벽오헌(碧梧軒)
학봉 김성일 (鶴峰 金誠一, 1538~1593)이 나주목사 재직시(1583~1586) 조성한 나주목 관아내의 연못 인덕지(仁德池)
정수루(正綏樓)
금성관 바깥에 있는 옛 나주목의 관아를 들어서는 문으로 정수루(正綏樓)라 한다.
정수루의 큰 북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이 나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백성들이 이 북을 치면서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안동에 가면 안동터미널에서 봉정사로 가는 길목인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 학봉 종택이 있는데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과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 1538~1593)은
그들의 사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400년간의 병호시비(屛虎是非)에 휘말리게 되는데
2013년 경상북도가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호계서원'을 복설하면서
이 묵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경상북도에서는 세 분의 위패를 원래 있었던 호계서원으로 다시 모시되
서애를 퇴계 위패의 동쪽에,
학봉은 서쪽에 두되 그 옆에 학봉의 후학인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1~1781)을 배향하기로 중재했다
서애는 높은 자리를, 학봉은 두 명의 자리를 보장하는 화해안을 제시하였고
두 학파가 이에 동의하면서 400년간 이어진 영남유림의 병호시비는 화해의 물꼬를 텃고
이날 호계서원에서 '복설(復設) 고유제'를 지냄으로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또, 김성일은 황윤길(黃允吉, 1536~ ? )과 함께 왜국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온 뒤에
왜국의 조선 침략 징후를 보고할 때 왜국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옛날에 배웠던 역사에서는 당파 싸움에 휘말려
서인(西人)인 정사(正使) 황윤길과는 달리 동인(東人)인 부사(副使) 김성일은
풍신수길의 관상이나 여러가지를 볼 때 감히 조선을 침략할 위인이 못 된다는 것 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학봉의 보고는 정사의 말처럼 당장 왜적이 사신들의 뒤를 따라 금방 쳐들어 올 것이 아니고
왜적이 오기도 전에 조야가 겁에 질려 혼란이 생길 것을 염려하여
정사의 보고에 반대되는 보고를 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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