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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묘당도 이충무공 유적,관왕묘비(關王廟碑), 광동백 진린(廣東伯 陳璘), 고금도 월송대(月松臺)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9. 12.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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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비(關王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

 

관왕묘비(關王廟碑)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36호

관왕묘(關王廟) - 탄보묘(誕報廟) - 충무사(忠武祠)

충무공의 유해가 일시 모셔졌던 이곳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했다.

묘당도 충무사는 진린이 꿈에 나타난 중국 촉나라 장군 관우를 모시며

장병들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하는 관왕묘에서 유래한다.

옥천사는 현종 7년(1666)에 처음 지어졌는데,

관왕묘를 보수공사하면서 그 옆에 수호와 제사를 맡게 하기 위해 암자 하나를 지었다고 하며

1666년 현종7년에 동무를 지어 진린과 이충무공을 배향하였으며

1713년 관왕묘비를 세웠다. 이후 서무를 건립하여 이충무공을 단독으로 배향하였다.

1781년 정조5년 정조가 탄보묘(誕報廟) 편액을 내려 사액 묘우가 되었으며

1792년 정조16년 진린(陳璘) 휘하의 70세 노장수로 정유재란시 전사한

            호관도인 등자룡(虎冠道人을 동무에 추배하였다.

1795년 정조19년 임금이 이충무공전서를 하사하였으나,

1940년 일제 강점기에 관우상과 위패등이 훼손되어 제향이 중단되었다.

1953년 명칭을 충무사라 개칭하여 충무공을 정전(正殿)에 모시게 하였다.

1959년에는 이순신의 보좌관인 조방장이며 당시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을 동무(東廡)에 모셨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이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옥천사는 충무사에서 분리되어 입구 주차장 마을회관 왼쪽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1713년 숙종39년에 관왕묘비를 세웠다.

관왕묘 창건 전후의 전말을 기록한 묘비에는

명나라 수군 장수 어위도총관 광동백 진린(廣東伯 陳璘)이 충무공의 전사를 애석히 여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충문공 소재 이이명(忠文公 疎齋 李頤命) 찬하고

경무공 이우항(景武公 李宇恒)이 서 하였다.

1971년 충무사의 신실과 동재 · 내삼문 · 비각 등이 이루어진 뒤

1975년에 동재와 외삼문이 신축되었고, 1981년에 다시 대대적인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매년 4월 8일 충무공 탄신기념제와 11월 9일(음력} 순국제(殉國祭)를 지내고 있다.

어위도총관 광동백 진린(廣東伯 陳璘, 1543~1607)

1597년 선조30년, 만력25년 정유재란 시

어위도총관 및 전군도독부 도독(前軍都督府 都督)으로서

5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전라도 완도군 고금도에서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 광동백(廣東伯)에 봉해졌다.

처음에는 이순신과 불화가 있었지만 이순신이 진린에게 수급을 양보하는 등

공을 세우도록 도움을 주어 호의를 사고,

이순신의 영웅적인 모습들을 지켜보며 점차 감복하여 진정으로 이순신을 존경하게 되었다.

이후 명나라 조정에 이순신의 전공을 상세하게 보고하여

만력제(萬曆帝)가 이순신에게  8가지 선물들

영패(令牌),       도독인(都督印),          귀도(鬼刀),            참도(斬刀),

곡나팔(曲喇叭), 독전기(督戰旗), 홍소령기(紅小令旗), 남소령기(藍小令旗)를 보내도록 하는 데 일조했다.

 

전란이 끝난 후 호광총병(湖廣總兵)에 임명되었고, 만력27년(1599) 명 조정은 진린의 공적을 인정하였다.

이후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늘날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 일대에서 발생한 묘족(苗族)의 난을 진압하였다.

사망한 뒤에는 태자소보(太子少保)에 추증되었다.

손자 진영소(陳泳素)는 감국수위사(監國守衛使)를 지내다가

명나라가 멸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남경(南京)으로부터 배를 타고 조선으로 와서

남해군의 장승포에 표착하였다가 조부인 진린이 공을 세웠던 강진(康津) 고금도로 옮겨 살았다.

그 후 다시 해남현(海南縣) 내해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으므로

감국수위사 진영소(陳泳素)는 광동진씨(廣東 陳氏)의 중시조이다.

묘당도 우물

李忠武公遺蹟事業紀念碑

이충무공유적사업기념비

古今島李忠武公遺蹟紀念碑

고금도이충무공유적기념비

월송대(月松臺)

월송대는 이순신 장군이 고금도에 머물 당시 군사들의 훈련과 장비 등을 점검하는 장소였다.

1598년 9월 15일 이순신의 조선수군과 진린의 명나라수군이 연합하여 순천에 출몰한 일본군을 소탕했고,

9월 20일부터 10월 7일까지 순천왜성(왜교성)전투에 참가했다.

순천왜성 공격 당시 수군은 이곳에서 발진했다. 10월 9일에는 고금도 덕동포구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했다.

11월 19일 연합함대가 노량을 향해 출진했고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이날 아침,

5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경상남도 남해군 관음포에 임시로 안치했다가

본영이 있는 이곳으로 옮겨와 83일간을 모셨다.

이듬해인 1599년에 충청남도 아산(현재의 현충사 부근)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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