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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제22회 연기대첩제(燕岐大捷祭)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9. 14.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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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첩제(燕岐大捷祭)

세종특별자치시 연서면 용암리 205, 연기대첩비 공원

 

고려시대 몽고 합단적을 세종시 정좌산(正左山, 연서면 쌍전리)과 원수산(元帥山, 연기면 세종리)에서

크게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역사적 사실을 기리는

제22회 연기대첩제가 승전일을 기념하여 5월 7일(토) 오전 10시 30분에 고복시립공원인

연기대첩비 공원에서 세종시민 등 2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식전 공연으로 세종시 창작예술의 실현과 문화예술의 발전을 선도하는

‘극단 Way Maker, 예술공간 way maker, 에이팩스 태권도’에서

연기대첩의 역사적인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승리의 주역인 김흔, 한희유, 인후 장군에 대한 승전 메시지를

연극공연을 통해 새롭게 재탄생하였으며

세종문화원 노래교실의 원수산 노래 공연도 함께하며

시민들에게 연기대첩 승리 역사의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올해로 22회째를 맞은 연기대첩제는

임창철 세종시문화원장의 경과보고, 류임철 세종특별자치시장 권한대행 행정부시장의 추도사,

강준현, 홍성국 세종특별자치시 국회의원, 이태환 세종시의회의장,

김흔장군 후손인 안동김씨 전서공파종회 김흥식 회장의 축사, 그리고 헌화 분향 순으로 진행되었다.

 

임창철 세종시문화원장은

“연기대첩제는 몽고 합단적을 맞아 싸워 승전한 자랑스런 우리 고장의 자랑인 만큼 세종시민 및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7대 대첩의 하나인 연기대첩도

다른 대첩과 같이 세종시를 넘어 전국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연기대첩(燕岐大捷)은 1291년(충렬왕17년) 고려를 침공하여 금강 연안까지 밀고 내려온

원나라의 반란군 합단적(哈丹賊)을

김흔(金忻), 한희유(韓希愈), 인후(印侯) 등이 현재의 세종시 연서면 정좌산에서 격파한 대첩비이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 역사서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7대 대첩중의 하나이다.

연기대첩의 주역중 한명인 상장군 김흔(金忻, 1251~1309)은 안동인으로 초명은 수(綬),

아버지는 고려 상락군개국공 첨의령 충렬공 김방경(忠烈公 金方慶)이며

어머니는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冷平國大夫人 竹州朴氏)로

기거랑 지제고 박익정(起居郞 知制誥 朴益旌)의 따님이다.

 

1291년(충렬왕17년) 원나라 세조(世祖,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 때

반란을 일으킨 합단적(哈丹賊)등이 고려를 침공하여 연기현까지 공격하여 왔을 때,

척후병 고문려(高文呂)가 적이 연기현(燕岐縣 : 지금의 충청남도 연기군)에 진을 쳤다고 보고하자,

김흔은 목노적(木奴赤) 등 28명을 보내어 고문려와 함께 정찰하게 하였다.

한밤중에 모든 군사들이 목주에서 출발하여

새벽에 연기현에 도착해 정좌산(正左山) 아래에 진을 친 적들을 순식간에 포위해 버렸다.

적이 깜짝 놀라 험한 곳에 웅거해 수비하려고 산으로 올라갔으나,

아군이 양쪽에서 공격하자 진퇴양난에 빠져 모두 말을 버리고 숲 속에 숨었다.

선봉 두 명이 화살에 맞는 것을 본 아군이 머뭇거리며 전진하지 못하자

김흔 장군이 후퇴하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질타하며 선봉에 서니

보병 5백 명이 앞 다투어 올라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이석(李碩)과 전득현(田得賢) 등이 돌격해 적의 선봉에 섰던 장사를 죽이자

그 기세를 타고 함성을 지르며 대군이 함께 공격하니 적은 궁지에 몰려 마구 도주했다.

공주강(公州江)까지 추격하니 시체가 30여 리에 널렸고 물에 빠져 죽은 자도 매우 많았으며

적의 정예 기병 1천여 명은 강을 건너 달아났다.

아군은 적의 부녀자, 의복, 안장 얹은 말, 보기(寶器)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노획했다.

 

전령을 보내어 승전보를 전하자 충렬왕은

다시 김흔을 죽전(竹田 :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으로 보내 나머지 적들을 추격해 토벌하게 했다. 

왕은 그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임명했으며

황제는 활과 화살, 말안장, 옥대(玉帶)와 은 1정(錠)을 하사하였다. 

전공을 포상하여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승진시켰고 곧이어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올려 주었다.

이후 사신으로 원나라 머물다

부친 충렬공 김방경의 별세로 인하여 귀국하였다가 상이 끝나자 다시 원나라로 갔다. 

이후 찬성사(贊成事)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로 임명되었고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올랐으며

부친의 상락공(上洛公)을 습봉하였다. 

이후 고려로 돌아오자 부친의 유언에 따라 만호에서 물러나

형님인 전법판서 상장군 김선(典法判書 上將軍 金愃)의 아들인 김승용(金承用)에게

상락공(上洛公)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여 이런 교서를 내렸다.

“대덕(大德) 3년(1299)에 본국의 무뢰배들이 반란을 획책했는데

김흔(金忻)과 만호(萬戶) 인후(印侯)가 먼저 알고 평정했으니 그 공을 기려 특별히 등용한다.”

1308년(충선왕 원년) 쉰아홉에 졸하였다.

 

초배는 태원이씨(太原(忠州)伊氏)로 호략장군 이단취(李丹取)의 따님이며, 

재배는 청주한씨로 상당부원군 한민(韓敏)의 따님이다.

자녀는 1남 2녀를 두어

숭복도감 판관(崇福都監 判官)을 지내고 평리상호군(平理上護軍)에 추봉된 김승고(金承固)와

장녀는 여흥민씨 복흥군 충순공 민종유(福興君 忠順公 閔宗儒)의 아들인

           밀직사사 문순공 민적(密直司事 文順公 閔頔)의 초배로

           손자는 찬성사 문온공 급암 민사평(文溫公 及庵 閔思平)이며, 

차녀는 고려 충선왕의 장인인 풍양조씨 문하시중 평양부원군 정숙공 조인규(貞肅公 趙仁規)의 아들인

       찬성사 충숙공 조련(忠肅公 趙璉)으로

       손자는 조사민(趙斯民), 낭장 조윤선(郎將 趙允璿), 

                   판도판서(版圖判書) 영익공 조덕유(榮益公 趙德裕)이며,

       증손자에는 조선개국공신 평양부원군 문충공 우재 조준(文忠公 吁齋 趙浚)이 있다.

김승고(金承固)는 1녀만 두어 사위가 의성인으로 좌사간을 지낸 김태권(金台權)으로

       흥왕사(興王寺)의 변란에 휩쓸려 화를 당하자

       삼국사기의 발문을 쓴 아들 김거두(金居斗)가 안동에 정착하여 의성김씨 전서공파의 파조가 된다.

형제는 5남 4녀가 있었으니

           형님은 전법판서 상장군 김선(典法判書 上將軍 金愃),

           동생은 판삼사사 문영공 김순(判三司事 文英公 金恂)과

          지밀직사사 천우위대장군 김론(知密直司事 千牛衛大將軍 金惀), 

          그리고 김돈(金惇)이 있다.

          4녀로는

          횡성인 지밀직사사 조변(知密直司事 趙忭)과

          청주인 판통례문사 경수(判通禮門事 慶綏), 

          안동인 첨의평리 권윤명(僉議評理 權允明)과

          평강인  정승 순천군 중암 채홍철(順天君 中庵 蔡洪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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