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청주-망선루(望仙樓),조헌(趙憲) 전장기적비(趙憲 戰場紀蹟碑),영규대사 전장기적비(靈圭大師),민양공 화천장 박춘무(愍襄公 花遷堂 朴春茂)선생 전장기적비, 의병장 한봉수 송공비(韓鳳洙)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9. 30. 00:00

본문

728x90

청주 망선루(望仙樓)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0호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7(청주 중앙공원)

청주 망선루(望仙樓)

이 건물은 청주에 남아있는 목조 건물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고려시대 청주관아의 객사 동쪽에 있던 누각 건물로 취경루(聚景樓)라 하였다.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치고

궁궐로 돌아가다 청주에 머무른 기념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때 합격자의 방(榜)을 취경루(聚景樓)에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1461년 세조7년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중수하고

압구정 한명회(狎鷗亭 韓明澮)가 누각의 이름을 망선루(望仙樓)라 고쳤다고 한다.

그 후 여러번의 중수로 유지되다가 일제 시대에 철거되었으며,

1923년 김태희(金泰熙)의 주도로 남문로 제일교회 뒤로 옮겨 교육 및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다가

2000년 기둥의 부식으로 붕괴의 위험이 있어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하였다.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紀蹟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36호

조헌 전장기적비(趙憲 戰場紀蹟碑) 

임진왜란시 의병을 이끌고 청주성을 탈환한

의병장 조헌(趙憲, 1544~1592)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전적비로서

의병장 조헌(趙憲)이 죽은 뒤 120년 후인 1710년 숙종36년에 청주성 서문 밖에 세웠던 것을

이곳 청주 중앙공원으로 이전한 것이다.

 

조헌(趙憲) 선생의 본관은 백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이다.

조황(趙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세우(趙世佑)이고,

아버지는 조응지(趙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2년 8월 1일 의병군은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의 탈환 작전을 벌여 다음날 성을 수복하였다.

이후 조헌 선생은 7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錦山) 전투중에 장렬히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중봉집(重峯集)이 있으며

의병장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건재 김천일(健齋 金千鎰),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와 더불어 임진왜란 4대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비의 제목은 “文烈公趙先生紀蹟碑(문열공조선생기적비)”로,

비문은 김진규(金鎭圭)가 짓고, 이수당(李秀棠)이 썼으며 이방언(李邦彦)이 새겼다.

대략의 내용은.

임진왜란 때 왜적이 침입하자 옥천에 은거하고 머물고 있던 선생께서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켜 16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청주성에 웅거하고 있던 왜군을 무찌르고

이어 금산전투에서 적과 맞아 싸우다가 순절한 내용과 이를 기념하는 사에 이어

“崇禎紀元後八十三年庚寅 立(숭정기원후팔십삼년경인 입)” 이라 하여

이 비의 건립 년대(1710년)를 기록하였다.

영규대사 전장기적비(靈圭大師 戰場紀蹟碑)

청주시 향토유적 제45호

영규대사 전장기적비(靈圭大師 戰場紀蹟碑)  

영규(靈圭, ?~ 1592년 9월 23일(음력 8월 18일)는 조선 중기의 승병장이다.

속성은 박, 본관은 밀양, 호는 기허당(騎虛堂)이며, 충남 공주 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조헌(趙憲)과 함께 활약하였다.

계룡산 갑사에 출가하여 서산대사의 고제로 공주 청련암에서 수도하였고 선장으로 무예를 익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500명을 이끌고

의병장 중봉 조헌(重峯 趙憲)과 함께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다시 제2차 금산 전투를 벌였고 격전 끝에 싸우다 전사하였다.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의 칠백의총에 묻히고 종용사(從容祠)에 제향되었으며

법도, 대인에 의해 진락산에 영각이 세워졌으며 의선이란 편액이 하사되었다.

愍襄公 花遷堂 朴春茂先生 戰場紀蹟碑 槪要

민양공 화천당 박춘무선생 전장기적비 개요

박춘무(朴春茂, 1544년~1611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義兵將), 의관(醫官)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호는 화천당(花遷堂).

부친은 박기정(朴箕精)

아들 충경공 매은당 박동명(忠景公 梅隱堂 朴東命)은 임진왜란 때 선봉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병자호란 때 견무계에서 청나라 군사를 만나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민양공 화천장 박춘무(愍襄公 花遷堂 朴春茂)선생은 찰방(察訪)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사(倡義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고

중봉 조헌(重峯 趙憲)과 함께 호서지방을 지키는 데 큰 활약을 하였다.

침구술(鍼灸術)이 뛰어나 의관(醫官)으로도 활약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지방관으로 임천군수(林川郡守)를 역임하고,

1598년에는 부평부사(富平府使) 등을 지낸 바 있어 관계(官階)가 가선대부(嘉善大夫)에까지 이르렀다.

참찬(參贊)에 추증되고, 시호는 민양(愍襄)이다.

의병장한공봉수송공비(義兵將韓公鳳洙頌功碑)

의병장 한봉수(韓鳳洙, 1884고종21~l972)

공(公)은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將)이다.

휘(諱)는 봉수(鳳洙)요 일명(鳳瑞), 봉용(鳳用), 봉룡(鳳龍)이며

1884년 고종 21년 4월 18일 청주군 북일면 서교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부터 의를 잊지 않았으며,

왜병의 압력으로 한국군대가 강제해산된

1907년 의병장 김규환(金圭煥)을 만나 감화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의병에 가담하게 되었다.

청주 세교장(細橋場)에서 기의(起義)하여 4년 6개월 동안 33전 1패의 전과를 거둔 유격전의 명수였는데

17세부터 명포수로 이름이 났다.

 

1907년 의병 10여명의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진천군 문백면(鎭川郡 文白面)에서 일본군 헌병중위 시마자가(憲兵中尉 島崎善治) 등

3명을 사살(射殺)하고 말도 폐사시켰다.

그리고 무기를 노획한 것을 시초로 약 3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게릴라전으로 미원(米院), 진천, 괴산, 횡성, 장호원 등으로 출동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909년 상해로 건너가 의병활동을 하려고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서울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일제의 소위 합방대사령(合邦大赦令)으로 출옥되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