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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양혜공 변응성(襄惠公 邊應星),부사과 변득(邊得),통덕랑 변석징(邊錫徵),원주변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22. 10. 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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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변씨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1528~1590)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 산1-2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1528(중종23)~1590(선조23)

원주 변씨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

아버지는 중추부경력 변계윤(邊季胤)이고 어머니는 참판을 지낸 용선군 최자반(崔子泮)의 따님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용맹이 뛰어 났으며 20세 되는 해인 1548년 무과에 급제하고

1555년(명종10) 해남 현감으로 부임하던 해에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 왜선 600여 척이 전라도에 침범,

병사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韓蘊)을 죽이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연이어 난포,마도,장흥부병영,강진현,가리포를 함락하고 해남으로 침입했는데,

변협은 이를 격퇴한 공으로 장흥부사가 되었다.

또 이 때 왜적의 포로가 되었던 명나라 사람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

명나라로부터 은과 비단을 상으로 받았다.

1563년(명종 18) 만포첨사(滿浦僉使)를 지낸 뒤, 이듬해 제주목사가 되었는데

1565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고 보우(普雨)가 제주도에 귀양오자 조정의 명에 따라 참살하였다.

1587년(선조 20) 전라우방어사가 되어 녹도(鹿島)·가리포의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공조판서 겸 도총관과 포도대장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재직할 때

율곡 이이(栗谷 李珥)로부터 『주역계몽(周易啓蒙)』을 강론받았으며, 천문·지리·산수에도 정통하였다.

변방 10여 군현을 순시해 산천 도로의 형세를 조사하고 도표로 만들어 적침에 대비하였다.

또, 천문을 관측해 변란을 예측하기도 했는데, 변협이 죽은 지 2년 뒤에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란 때 신립(申砬)이 군사를 이끌고 문경새재로 떠날 때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본 선조가 변협을 양장(良將)이라 칭찬하며, 변협이 없음을 아쉬워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화순최씨는 증 참판 최유선(崔惟善)의 따님으로, 1남을 두었다.

아들 변응성(邊應星)은 무과에 급제하여 연천군(淵川君)에 봉해졌고,

아버지 변협은 좌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추봉되었다.

資憲大夫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鍊院事 贈純忠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原興府院君邊公之墓

貞敬夫人和順崔氏之墓

자헌대부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 증순충보조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원흥부원군변공지묘

정경부인화순최씨지묘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묘역 후경

 

 

 

 

 

 

 

 

 

 

 

증 병조판서 양혜공 변응성(襄惠公 邊應星)

 

증 병조판서 양혜공 변응성(襄惠公 邊應星) 장군

1552(명종7)~1616(광해군8)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기중(機仲).

아버지는 공조판서 및 도총관을 지낸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1579년(선조12) 28세에 무과급제,

1590년 강계부사에 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물러가 있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먼저 경주를 점령하여 부임하지 못하고,

8월 가평 전투에서 적과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쳤다는 이유로 백의종군하였다.

1593년 2월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이 그의 죄를 변호하여 경기방어사가 되었다.

이천부사가 되어서는 여주목사 원호(元豪)와 협력하여 남한강에서 적을 무찔렀다.

1594년 광주·이천·양주의 산간에 출몰하는 토적(土賊)을 토벌하였으며,

한강 상류 용진(龍津)에 승군을 동원하여 목책(木柵)을 구축하여 병졸을 훈련하였다.

1596년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용진과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수비하였다.

광해군 때에 훈련대장과 판윤에까지 승진하였다.

1612년(광해군4) 박응서(朴應犀)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이 모반을 꾸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우려 하고 있다.”고 날조하여

발생한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혜(襄惠)이다.

 

效忠奮義翼社功臣 資憲大夫淵州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鍊院事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邊公之墓 貞夫人礪山宋氏之墓

효충분의익사공신 자헌대부연주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변공지묘 정부인여산송씨지묘

諡襄惠 漢城判尹效忠奮義翼社功臣資憲大夫淵州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知訓鍊院事

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原州邊公諱應星之墓貞夫人礪山宋氏合窆貞夫人靑松沈氏祔左

시양혜 한성판윤효충분의익사공신자헌대부연주군겸오위도총부도총관지훈련원사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원주변공휘응성지묘정부인여산송씨합폄정부인청송심씨부좌

한성부윤 연천군 양혜공 변응성(淵川君 襄惠公 邊應星) 묘역 후경

 

 

 

 

 

연천군 양혜공 변응성(淵川君 襄惠公 邊應星)묘역 하단의 아들 부사과 변득(邊得)

通訓大夫禦侮將軍行忠佐衛副司果原州邊公諱得之墓 配淑人草溪鄭氏合祔

통훈대부어모장군행충좌위부사과원주변공휘득지묘 배숙인초계정씨합부

 

 

 

 

 연천군 양혜공 변응성(淵川君 襄惠公 邊應星)의 손자   통덕랑 변석징(邊錫徵)

通德郞原州邊公諱錫徵之墓 配恭人全州李氏合祔

통덕랑원주변공휘석징지묘 배공인전주이씨합부

//원주변씨 한성부윤 양혜공 변응성(襄惠公 邊應星) 가계//

7대조부 영삼사사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렬(大隱 邊安烈)

6대조부 중군총제 변이(邊頤)

5대조부 원평군 무송당 변상회(原平君 撫松堂 邉尙會)

  고조부 월곶첨사 변환(邊煥)

  증조부 원양군 변사겸(原陽君 邊士謙)

     조부 중추원경력 변계윤(邊季胤)

     부친 공조판서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1528~1590)

     모친 배위 정경부인 화순최씨, 증 참판 최유선(崔惟善)의 따님

                 한성부윤 연천군 양혜공 변응성(淵川君 襄惠公 邊應星, 1552~1616)

                 배위 정부인 여산송씨,

                 배위 정부인 청송심씨,

                             자 부사과 변득(邊得, 1600~1641)

                                      손자 통덕랑 변석징(邊錫徵, 1622~1693)

                                                  증손자 변진원(邊振原)

                                                  증손자 변정원(邊挺原)

                                                  증손자 변탁원(邊濯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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