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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백범 김구 고유문(白凡 金九 告由文)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7. 25.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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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541

13도 의병 도총재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字) 는 여성(汝聖)이며, 호(號)는 의암(毅菴)이다.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선생은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1842년 1월 27일 부친인 류중곤(柳重坤)과 모친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 장남 류해동(柳海東)과  차남 류제함(柳濟咸)을 두었다.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1842~1915)은 어려서부터 문재로 인정받아

14세 때에는 종숙 성재 유중교(省齋 柳重敎)를 따라 양평으로 가서

당시 유학의 태두(泰斗)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에게 배웠다.

뒤 중암 김평묵(重菴 金平默, 1819~1888),

성재 류중교(省齋 柳重敎, 1832~1893)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학통을 이어 받아

양평, 춘천, 홍천, 원주, 제천 등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에서 모여든 유생들을 가르치며 거유로 성장했다.

1876(고종 13)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상소를 올렸으며,

1794(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 도원 김홍집(道園 金弘集, 1842~1896)의 친일내각을 적극 반대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제자 실곡 이필희(實谷 李弼熙, 1857~1900), 하사 안승우(下沙 安承禹, 1865~1896),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 1869~1896), 입암 주용규(立菴 朱庸奎, 1845~1896),

경암 서상열(敬庵 徐相烈, 1854~1896), 조암 이범직(釣菴 李範稷, 1868~1896),

모양 신지수(慕陽 申芝秀, ?~1905) 등이 각기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류인석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흩어진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영월·평창 등을 돌며 새로 의병을 모아 제천 봉양면 장양리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친일관리인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처단하고

충주로 진격하여 충주성을 점령,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형하였다.

그 후 패전하여 풍기, 소백산, 영춘, 청풍, 음성, 괴산을 옮겨다니며 유격전을 진행하였고

다시 영월, 정선, 평창에서도 혈전을 계속하다가

영홍, 양덕, 맹산, 덕천, 영변, 운산, 금산, 초산을 거쳐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통화현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중

1900년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으로 귀국,

평안도 개천과 용청, 황해도 평산, 은율에서 후세교육에 이바지했다.

1905년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여러 곳에 방문(榜文)을 보내어 의병의 기세를 돋구었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이재억(李濟億)가에 잠입하여

양기택(梁起擇), 추정 이갑(秋汀 李甲, 1877~1917) 등의 인물과 함께 대책을 협의하였다.

1907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그의 가족과 동민의 참살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1908년 2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관일약(貫一約)이란 조직체를 만들어 교포들을 지도하였다.

1909년 의병 부대를 조직, 지신허(地新墟)) 재피거우(梓皮溝)에서

13도의군 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세계만방에 호소문을 전달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항의문을 보냈다.

그 후 나라를 구하려는 온갖 노력 끝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경에 밝아 소의신편(昭義新編), 화동합편(華東合編) 등의 저서가 있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有明朝鮮毅菴柳先生之墓 配孺人驪興閔氏祔左 配孺人慶州鄭氏祔左

유명조선의암류선생지묘  배유인여흥민씨부좌 배유인경주정씨부좌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인 왜적을 깨끗이 소탕하는 것.

거지수구(去之守舊) : 해외로 멀리 나가 선비로서의 대의를 홀로라도 지키는 것.

자정치명(自靖致命) :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

 

류인석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생각했으나

일본군과 대처할 수 있는 군사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의병봉기계획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 간주하였다.

하지만 목숨을 끊을 경우

화맥을 계승해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함을 지적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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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선생 친필 고유문비(白凡 金九先生 親筆 告由文碑)

백범 김구 고유문(白凡 金九 告由文)

1946년 8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이

의암 류인석 묘역에 올린 제문을 돌에 새겨 기념하고자

1998년 12월 22일 강원도애국선열추모사업회가 건립하였다.

白凡金九先生親筆告由文碑

백범김구선생친필고유문비

1946년 광복절 이틀 후인 8월 17일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은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 춘천시 남면 가정리 의암 류인석(毅庵 柳麟錫, 1842∼1915)선생 묘역을 찾았다.

흰 두루마기에 검은 뿔테 안경을 착용한 백범선생은 이날 의암선생 묘소에 참배하며 고유문을 낭독하였는데,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옛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하오리까,

향불을 피우며 무한한 심사를 하소연하오니 영령께서는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라며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는 내용이다.

중국 각지에서 광복 활동을 하던 백범선생은 광복과 더불어 국내로 들어와 정치적 행보를 시작하며

의암 선생 묘역을 찾아와 저간의 사정을 고유문(告由文)을 통해 밝히는 한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잡는 굳은 다짐이기도 하였다.

 

이 고유문(告由文)을 돌에 새겨 유인석선생 묘역에 세웠다.

1천여자의 국한문 혼용으로 쓰여진 고유문은

백범선생이 일찍부터 존경하던 류인석선생의 애국충절을 기리는 내용으로

지난 82년 류인석선생의 아들 류해동(柳海東)씨가 숨진후

책갈피에서 발견돼 선생의 증손 유연창(柳然昶)씨가 보관해 오던 것.

고유문비는 화강암 좌대위에 가로1백65㎝, 세로76㎝, 두께25㎝의 오석에

백범선생의 친필을 약간 확대해 전문을 새겼다.

의암 류인석선생은 조선 말과 대한제국 시기 유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붓 대신 칼을 잡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의병 3천여 명을 지휘하는 의병장이 된 의암선생은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일본 앞잡이가 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반격에 일부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으나

중국 요동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산과 들을 누비며 목숨을 걸고 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의암 선생은 평생 주창하고 실천한 애국애족 이념과 학문,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기 위해 

1915년 망명지인 중국 서간도 관전현 방취구(芳翠溝)에서 향년 74세로 별세하여

요령성 흥경현 평정산 난천자로에 묘를 썼다가 

20년 후인 1935 4 12일에 국내 현재 묘역으로 반장(返葬)해 왔다.

 

의암선생이 전파한 나라 사랑 정신이 어디까지 스며들었는지는

백범 김구선생의 고유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 백범선생 의암 류인석 묘 참배-----------------춘천 의암기념관

∎원문∎백범 김구선생 친필 고유문(1946년) – 춘천 의암 기념관

대한민국 28年 8月 17日, 김구는 삼가 류인석(柳麟錫)선생 영령께 고하나이다.

유학(儒學)이 쇄(衰)한지 오래라, 공부하는 이 문자의 말(末)에 헤매여 실지(實地)로 용공(用工)함을 생각하지 아니 하얏슴으로, 성(性)을 놉이고 심(心)을 나추어 정작 착력(着力)할 자리는 버리고 유유범범(悠悠泛泛)히 고담(高談)을 일삼아 마츰내 독지(獨知)하는 일로(一路)로 하여금 황무(荒蕪)함에 이르게 하매 만사가 이에서 타괴(墮壞)하얏나이다.

 

근고(近古)에 화서(華西) 선생이 나시며, 비로서 심즉리(心卽理)로써 문제(門弟)를 가르처 풍기일변(風氣一變)하야 절의배출(節義輩出)함을 보게되니 선생이 곧 그 한분이시라. 선생은 가장 나중이시니 만큼 도산검수(刀山劍水)의 곤고(困苦)와 형극호표(荊棘虎豹)의 위간(危艱)을 그중 더 골고로 지나섯스되 왜적(倭敵)과 일천(一天)을 대(戴)치 아니 하시랴는 일념은 갈수룩 구드시매 몸이 기구(崎嶇)쏙에 마추고 말엇스되 그 뜻은 일성(日星)가치 비치어 지금까지 후배(後輩)로 하야금 우러러 바라게 하시엇나이다.

 

이가치 하오심이 무엇시릿가 오즉 내 마음을 저바리지 못하심으로 아나이다. 그런즉 선생 일생의 절의는 실로 사학(師學)을 신증(身證)하시고 남음이 잇는 줄 아나이다. 뉘 왜적(倭敵)을 수시(讎視)치 아니 하리요마는 현전신가사계(現前身家私計)의 구차(苟且)로 조차 가림을 바드매 마츰내 스사로 오예(汚穢)에 떠러짐을 각득(覺得)하지 못한자가 거의 역중(域中)에 창만(漲滿)하거늘 선생 홀로 본심(本心)으로 살고 본심으로 죽으랴 하시매 본심의 밝음이 백사(百邪)를 각멸(却滅)하신지라 이루신바 이러틋 위연(偉然)하시엿나이다

.

왜적을 필보(必報)의 수(讎)로 아심은 선생의 마음이시요. 사생(死生)을 초개(草芥)처럼 아심은 선생의 마음이시요 이역풍상(異域風霜)에서 혼자 방황하실 때 누가 보는 바도 아니엇마는, 조차(造次)라도 노치 아니하심은 선생의 마음이시라 이 마음을 저바리지 못하야 저 고생을 달게 여기심이 아니오니까.

 

화이(華夷)의 논(論)과, 존명(尊明)의 설(設)에 이르러는 민족의식(民族意識)이 료별(了別)되기 전이라 수백년간 전습(傳襲)도 잇스려니와 적을 배퇴(排退)하기에 급(急)하던 때라 논(論)을 화이(華夷)에 쓰러왓스니, 문자 비록 구(舊)를 승(承)하나 적을 치는 반면 국가에 대한 충(忠)이 매츠니 우리는 선생의 충(衷)을 깁히 헤치여 피막(皮膜)을 넘어 그 내함(內含)한 민족적 충성을 세발(洗發)코저 하나이다.

 

구(九)는 후조(後凋) 선생의 제자로서 일즉부터 선생을 모앙(慕仰)하야 만사일생(萬死一生) 가운데도 항상 붓들고 나아감이 잇섯스니 이는 곳 유시(幼時)부터 박히어진 구세필보(九世必報)의 대의라 이제 백수잔년(白首殘年)으로 고국에 도라와 선생의 구앙(舊仰)을 차즈니 감회 엇지 새롭지 아니 하오릿가 일주(一炷)의 향(香)으로써 무한한 심사를 하소하노니 영령은 압길을 가르치소서.

고유문비건립 취지문

국맥(國脈)과 국혼(國魂)이 유구한 일원(日月)로 더부러 이어짐은 선열의 멸사진충(滅私盡忠)의 공덕이며

윤리도덕이 존재함은 선성인(先聖人)의 교훈의 덕혜(德惠)이다.

우리나라는 광복후 남북이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의 뜻을 쫓아 통일정부를 세웠으면

천추의 민족의 한인 6.25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悲劇)과

오늘날과 같은 인륜 도덕의 붕괴와 국가경제파탄(國家經濟破綻)이 있었겠는가.

오호 만시지탄(晩時之歎)이라. 선생께서 의암(毅菴) 선생을 추모하시며 올린

친필고유문비를 건립함은 구구절절 맺힌 선생의 우국충정을 영원히 기리고자 함이요.

후세들은 선생의 친필을 대하므로서 더욱 선생을 추앙하며

여천지무궁(與天地無窮)토록 나라의 번영을 위하여 충을 다하게 하고자 함이다.

                                        춘천문화원장 이대근 근고                                   단기 4331년 12월22일 건립

 

∎번역문∎백범 김구선생 친필 고유문(1946년) – 춘천 의암 기념관

대한민국 28年(1946년) 8月 17日, 김구는 삼가 류인석(柳麟錫)선생 영령께 고하나이다.

유학(儒學)이 쇄퇴한지 오래라, 공부하는 이들이 자구(字句)에 얶매어 실제 활용을 생각하지 아니하여,

성(性)을 높이고 심(心)을 낮추어 정작 힘쓸 자리는 버리고 유유하게 고담준론(高談峻論)만 일삼아

마침내 혼자만 깨달아 아무런 결실이 없어 황당함에 이르매, 모든 일이 이에서 무너졌나이다.

 

근래에 이르러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선생이 나시어 비로소 본심이 천리라는

즉 심즉리(心卽理)로서 제자들을 가르쳐, 분위기가 일변하여 절의(節義) 당당한 이들을 배출하니

선생이 곧 그 한분이시라. 선생이 가장 나중이시니만큼 선배들보다 더 심한 어려움과 위기를 당하셨지만,

왜적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일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굳으시매,

몸은 험한 형편에 처하되 그 뜻은 해와 별같이 비치어 지금까지 후배들로 하여금 우러러 바라보게 하셨나이다.

 

이같이 하오심이 무엇이리까. 오직 내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심으로 아나이다.

그런즉 선생 일생의 그 절의는 실로 배운 바를 몸으로 증명하시고 남음이 있을 줄 아나이다.

누구나 왜적을 원수로 보지 않으리오만, 눈앞의 생계가 구차하여 이를 보지 못하고

마침내 더러운 곳으로 떨어짐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시중에 가득하거늘,

선생 홀로 본심으로 살고 본심으로 죽으리라 하시매

본심의 밝음이 온갖 삿된 것을 물리쳐 없애신지라, 이루신바 이렇듯 우뚝하셨나이다.

 

외적을 복수해야할 원수로 아심이 선생의 마음이시고, 생사를 초개처럼 아심이 선생의 마음이려니,

멀리 다른 나라에서 바람서리 맞으면서 혼자 다니실 때 그 누가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놓지 아니하심이 선생의 마음이시라, 이 마음을 저버리지 못하여 저 고생을 달게 여기심이 아니옵니까.

 

중화와 오랑케를 구분하는 화이(華夷)의 논(論)과,

명나라를 섬기는 존명(尊明)의 설(設)에 이르러는 민족의식이 분별되기 이전이라

수 백년간 내려온 전통도 있으려니와 왜적을 물리치기 급하던 때라 논리를 화이에서 끌어왔으니,

그 문자는 비록 옛것을 이었으나 왜적을 치고 국가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맺은 것이니

우리는 선생의 본 마음을 깊이 헤쳐 겉 포장을 넘어 그 내포한 민족적 충성을 따라 배우고자 하나이다.

 

김구는 후조 고능선(後凋 高能善) 선생의 제자로 일찍부터 선생을 흠모하여

일평생 모든 일에 항상 붙들고 나아가는 정신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어릴 적부터 뇌리에 박힌 후손이 반드시 복수한다는 구세필보(九世必報)의 대의(大義)라.

이제 백발로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묘소를 찿으니 감회 어찌 새롭지 않으오리까.

한줄기 향으로 무한한 심사를 삼가 아뢰니 영령은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

 

의암 류인석 영정

 

대한 13도 의군  의암 류인석 도총재

순국 100주년 기념 어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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