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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창녕인 문정공 남명 조식(文貞公 南冥 曺植)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8. 1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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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공 남명 조식 (文貞公 南冥 曺植)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 72

사적 305호

 

문정공 남명조식 묘소(文貞公 南冥 曺植)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조언형(曺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 유력한 사족 충순위 이국(李菊)의 따님으로 7남 4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들로는 둘째인 남명 조식(南冥 曺植)과 막내인 조환(曺桓)만이 계를 이었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한양에 거주하였다.

한양에서 이웃에 살던 숭덕재 이윤경(崇德齋 李潤慶,판서),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영의정) 형제와 일재 이항(一齋 李恒)등과 절친하게 지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대곡 성운(大谷 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형제에 종유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가 세상을 뜨고 숙부 조언경(曺彦卿)이 귀양가는 현실을 크게 탄식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생원·진사시의 초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실패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闍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 남평조씨)가 김해 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과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心經)』과 『대학(大學)』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대곡 성운(大谷 成運),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등과 더불어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지자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 을사사화로 이림(李霖), 규암 송인수(圭庵 宋麟壽), 성우(成遇), 경재 곽순(警齋 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 생활을 청산, 고향인 토골에 계복당(鷄伏堂) 뇌룡사(雷龍舍)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또한, 옥계 노진(玉溪 盧禛), 개암 강익(介庵 姜翼), 김희삼(金希參) 등이 종유하였으며, 덕계 오건(德溪 吳健), 옥동 문익성(玉洞 文益成),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가 처음으로 문하에 출입하였다.

1553년 조정에서 내린 사도시주부의 관직을 사양했을 때 이황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와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면서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기를 원하였고,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듬해인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하는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국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심금을 울리기 위해 격한 표현을 썼지만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과부라 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으나 대신과 언관의 구원으로 무사했으며,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즈음 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영무성 하응도(寧無成 河應圖), 각재 하항(覺齋 河沆), 송암 박제현(松嵓 朴齊賢) 등 후일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의 토골에서 진주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산청·함양·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조식을 찿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약포 정탁(藥圃 鄭琢), 성암 김효원(省庵 金孝元),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 이정(李楨), 김면(金沔), 운강 조원(雲岡 趙瑗) 등이었고, 영모 정구(永慕 鄭逑), 월담 최황(月潭 崔滉),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부사 성여신(浮查 成汝信)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문정대비가 죽고 그의 동생 윤원형(尹元衡)이 실각하여 척신정치가 막을 내리던 1566년(명종 21), 정치쇄신과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대곡 성운(大谷 成運), 일재 이항(一齋 李恒)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징소되어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받자, 6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은숙배 후 임금을 면대하고 물음에 응했는데 명종의 성의와 대신의 경륜이 부족함을 알고 곧 사직, 하향하였다.

특히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戊辰封事)』에서는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마지않았다.

조식(曺植)의 사후 바로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南冥集)』과 『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0』·『신명사도(神明舍圖)』·『파한잡기(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南冥歌)』『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가 전한다. 1615년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澂士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

징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문정공남명조선생지묘

友人昌寧成渾撰                  後學安東權昌鉉謹書

우인창녕성혼찬                  후학안동권창현근서

 

망주석의 세호가...

1572년 대곡 성운이 찬한 초기 묘갈비

澂士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諡文貞公南冥曺先生之墓

징사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 시문정공남명조선생지묘

大谷 成運 撰        濯溪 全致遠 書

대곡 성운 짓고      탁계 전치원 쓰다

문정공 남명 조식(文貞公 南冥 曺植)의 후배위 숙부인 은진송씨

//창녕조씨 문정공 남명 조식(文貞公 南冥 曺植)가계//

중시조 형부원외랑 조서(曺瑞), 고려 태조 외손

  6대조 소감 조대장(曺大莊)

고조부 영동정 조은(曺殷)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

    조부 봉사 조영(曺永)

아버지 승문원 판교 단천군수 조언형(曺彦亨, 1469~1526)

어머니 인주이씨, 충순위 이국(李菊)의 따님

            동생 조환(曺桓)

                    조카 현감 경모재 조의민(敬慕齋 曺義民, 1545~1605)

                                종손자 양주목사 송재 조계명(松齋 曺繼明, 1568~1641)

            문정공 남명 조식(文貞公 南冥 曺植)

            배위 증 정경부인 남평조씨, 충순위 조수(曺琇)의 따님 

                     長子 조차산(曺次山, 1536~1544)

                     사위 상산인 만호 광주목사 김행(金行)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顒),망우 곽재우(忘憂 郭再祐)

            後配 숙부인 은진송씨, 사인 송린(宋璘)의 따님

                     1男 예안현감 조차석(曺次石, 1552~1616)

                               손자 찰방 조진명(曺晉明)

                     2칠원현감 모정 조차마(慕亭 曺次磨, 1557~1639)

                               손자 조경명(曺敬明), 조익명(曺益明), 조복명(曺復明)

                     3호군 조차정(曺次矴, 1560~1645)

                               손자 생원 조준명(曺浚明)

                               손자 선무랑 조극명(曺克明)

                     사위 함안인 조신도(趙信道)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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