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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운암서원(雲巖書院),충개공 백암 김제(忠介公 白岩 金濟),문정공 물재 손순효(文貞公 勿齋 孫舜孝),백계 김희(伯溪 金喜)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12. 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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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운암서원(雲巖書院)

경북 울진군 기성면 기성로 77 (구산리 381)

 

울진 운암서원(雲巖書院)

1826년(순조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충개공 백암 김제(忠介公 白岩 金濟, 1362~ ? )와

문정공 물제 손순효(文貞公 勿齊 孫舜孝, 1427~149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 위패를 모셨으며,

1833년 순조33년에 유림의 주도로 온정면 노은동으로 이건하였다.

그후 1868년 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878년 고종 15년 유생들의 주창으로 현 위치인 구산리로 이건하고

백계 김희(伯溪 金喜, 1563~1592) 선생을 추배하였다.

서원내에 소재한 해단(海壇)은 선산인으로

고려말 평해군수를 지낸 충개공(忠介公) 백암 김제(白岩 金濟)선생의 치제단(致祭壇)으로

1789년 정조13년에 평해 유림에서 제단을 설치하여 불사이군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주요 유물로는 김제의 책판 80여 장이 소장되어 있고, 재산으로는 전답 2,000평 등이 있다.

운암서원(雲巖書院)                   수일당(隨日堂)

충개공 백암 김제(忠介公 白巖 金濟, 1362~ ?)

본관은 선산(善山), 호는 백암(白岩), 시호(諡號)는 충개(忠介)이다

고려말 평해군수 재직시 태조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키자

고려의 망국(亡國)을 통분히 생각하고 시 한 수를 써서 벽에 걸어둔 채

일엽편주(一葉片舟)를 타고 동해(東海)로 행방을 감춘 고려의 충신이며,

두문동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명으로

당시 남긴 시이다.

呼船東問魯連津

호선동문노련진===동해의 저 배야 노중련의 나루터가 어디냐.​

五百年今一介臣

오백년금일개신===오백년 고려조의 한 사람 신하로다.​

可使孤魂能不死

가사고혼능불사===​외로운 내 영혼 죽지 않고 있다면​

願隨紅日照中垠

원수홍일조중은===붉은 해 따라 단심을 비추고 싶구나.

충절사(忠節祠)

문정공 물재 손순효(文貞公 勿齋 孫舜孝, 1427~1497), 문정공 칠휴거사 손순효(文貞公 七休居士 孫舜孝)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 칠휴거사(七休居士).

손영(孫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유례(孫有禮)이고,

아버지는 군수 손밀(孫密)이며, 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따님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년(단종 1)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 문과 중시에 정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이어 경창부승에 발탁되고,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17조의 시무책을 올려 채택되어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가 있다 하여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경기도관찰사·대사헌·한성부판윤·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연해안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이어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고령으로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中庸)』·『대학(大學)』·『역경(易經)』 등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 화죽(畵竹)에 능하였다.

『세조실록(世祖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찬서(撰書)로는 식료찬요(食療撰要)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해단(海壇)

 

 

백계 김희(伯溪 金喜, 1563~1592)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백계(栢溪).

고려 말 충신 백암 김제(金濟)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김예복(金禮復)이고, 어머니는 단양우씨이며, 부인은 안강노씨이다.

백계 김희(伯溪 金喜)는 의성군 비안면 서부 2리 출생으로 품성이 맑고 곧았으며, 지조도 굽힘이 없었다.

일상생활에 있어 항상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였으므로 남들이 흉보지 못하였다.

문장도 박학다식하였고 간간이 병서도 익혀 원근에서 모두들 우러러 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인근 마을에 격문을 돌려 모병(募兵)에 나섰고,

의병장이 되어 이웃한 경상도 상주 단밀 지역에서 왜적과 싸우다 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하였다.

호조정랑(戶曹正郎) 증직을 받았다.

공백암김선생 치제단(公白巖金先生 致祭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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