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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월송정(越松亭), 기우자 이행(騎牛子 李行) 백암거사 이행, 문정공 근재 안축(文貞公 謹齋 安軸)

구름에 달

by 碧巖 2023. 12. 9.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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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 월송정(蔚珍 越松亭)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로 517 (월송리 362-2)

소를 타는 즐거움                               기우자(騎牛子)의 길

소를 타는 즐거움                                                     양촌 권근(陽村 權近) 지음

나는 일찍이 산수를 유람하면서 오직 마음에 얽매임이 없어야 그 참된 낙을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내 친구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은 평해(平海)에 집을 두고 살았다. 매양 달밤이면 술을 가지고

소를 타며 산수 간에서 놀았다. 평해는 명승지로 이름난 곳인데 그 유람의 즐거움을 이공(李公)은

옛사람도 알지 못한 묘미까지 터득하고 있다. 무릇 주위를 기울여 만물을 볼 때 빠르게 서두르면

소홀함이 있고 찬찬히 살피면 그 오묘한 겄까지 다 얻을 수가 있다.

말(馬)은 빠르고 소(牛)는 더딘 것이라, 소를 타는 것은 곧 더디고자 함이다.

생각해 보니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는데 산이 높고 물은 맑아 아래 위가 한 빛이라 내려다보고

쳐다보아도 끝 간 데가 없다. 뜬 구름에 만사를 견주고 맑은 바람에 소리높이 읊조리며 소가 가는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술을 마시면 가슴속에는 서두르지 않고도 저절로 그 낙이 있을 것이다.

이 어찌 사사로이 번거로움에 매인 자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옛사람인들 또한 이런 낙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赤壁)놀이가 거의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배를 타는 위험은 소 등의 안전함만

같지 않다.  술이 없고 안주가 없어 돌아가 아내와 상의하는 일은 스스로 술을 지니는 쉬움만 못하다.

계수나무의 노(棹)와 목란의 상앗대(槳)는 번거롭지 않는가 배를 버리고 산으로 오르는 것은

수고롭지 않는가  소를 타는 즐거움을 그 누가 알았으랴 성인(聖人)의 문하에 미칠 수가 있었다면

그것을 보고 깊이 찬탄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이 기우설(騎牛說)은 내가 삼십여년 전 소싯적에 지었다.

                                                                                                  1404년(태종4년) 겨울 10월에 적다.

기우자(騎牛子)의 길      여산부원군 문절공 기우자 이행(驪山府院君 文節公 騎牛子 李行,1352~1432)

이곳은 고려 말에 대제학으로 끝까지 충절을 지켜 후세에 추앙을 받은 기우자 이행(騎牛子 李行) 선생이 향리에 돌아올 때마다 달 밝은 밤에 소를 타고 거닐면서 나라 걱정하던 유서 깊은 길이다. 젊은 시절부터 절친한 벗인 당대의 문호 양촌 권근(陽村 權近,1352~1409) 선생이 선생을 위헤 소를 타는 참된 즐거움과 고상한 뜻을 아로새긴 기우설(騎牛說)을 국문으로 옮겨 비를 세우고 그 징표로 삼았다. 그 시대의 전설적인 그림 월하기우도(月下騎牛圖)에 선생이 소를 타고 소요하던 거룩한 자태를 신선처럼 묘사한 것을 두고도 사모함을 금할 수 없다. 또 저 월송정 다락에 선생의 시판과 나란히 걸린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1383~1453)의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을 소리높여 읊으며 선생이 소를 탄 풍표와 절의를 깨끗한 소나무와 달에 비겨 찬양하기도 한다. 본회에서는 이러한 자취와 정서를 바탕으로 선생의 외가문중인 평해황씨 대종회의 협찬을 얻어 이 길에 이름을 붙이고 향토 문화의 아름다운 표상을 지켜가는데 뜻을 모으게 되었다. 선생의 관향은 여주(驪州)이고 자는 주도(周道)이며 호는 기우자(騎牛子), 백암거사(白巖居士), 일가도인(一可道人)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충주목사를 지낸 동은 이천백(東隱 李天白)이고, 어머니는 군부인 황씨로 충절공 황서(忠節公 黃瑞)의 따님이다. 1361년 선생의 10세 때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모자가 함께 개경에서 나라실(飛良谷)마을로 내려와 정착한 후 이 고장 사람이 되었다. 소년기를 여기에서 보냈고 문과급제 후에는 여러 요직을 거쳐 이조판서 등 높은 벼슬에 올랐는데 사람들은 수려한 백암산의 정기를 받은 것이라 하였다. 신왕조가 들어선 후 역성혁명을 거부한 죄목으로 모진 형벌을 받고 귀양살이 한 곳도 울진과 평해이며 사후에 세종대왕께서 그 생애를 기려 문절(文節)의 시호와 좌찬성의 증직 그리고 여산부원군(驪山府院君)으로 봉하여 추모하게 된 것도 이 고을의 명예를 크게 높인 일이다. 이에 월송정과 함께 이 길이 소중한 문화유산의 하니로 오래도록 자랑스럽게

가꾸어지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9년 10월 일                              문절공 기우자 이행선생 숭모사업회

문정공 근재 안축 유적비(文貞公 謹齋 安軸 遺蹟碑)

高麗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 安謹齋先生遺蹟碑

고려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 안근재선생유적비

高麗三重大匡都僉議贊成事 興寧府院君謹齋先生 文貞公府君遺蹟碑序

고려삼중대광도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근재선생 문정공부군유적비서

흥녕부원군 문정공 근재 안축(興寧府院君 文貞公 謹齋 安軸)

본관은 순흥. 자는 당지(當之), 호는 근재(謹齋).

고향 죽계(竹溪)를 세력기반으로 하여

중앙으로 진출한 신흥유학자(新興儒學者)로 재능과 학문이 뛰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사록(全州司錄)과 사헌규정을 지내고

1324년(충숙왕 11) 원의 제과(制科)에도 급제해 개주판관(蓋州判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 성균학정(成均學正)을 거쳐 충혜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었다.

이때 충군애민(忠軍愛民)의 뜻이 담긴 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를 남겼다.

1332년(충숙왕 복위 1) 판전교, 지전법사 재직시 파면당했다가

전법판서로 복직되었으나 내시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다시 전법판서, 감찰대부에 등용되었으며,

1344년(충목왕 즉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를 지내고

판정치도감사(判整治都監事)가 되어 양전 행정에 참여했다.

문인공 묵헌 민지(文仁公 默軒 閔漬, 1248~1326)가 지은 본국편년강목(本國編年綱目)을

문충공 익재 이제현(文忠公 益齋 李齊賢, 1287~1367) 등과 다시 편찬했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었고 문집에 〈근재집〉이 있다.

흥녕군에 봉해진 뒤 죽어 순흥의 소수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울진 월송정(蔚珍 越松亭)

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정로 517(월송리 362-2)

 

월송정(越松亭)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동해를 바라보고 있으며 고려시대 때 처음 만들어졌다.

울진군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효소왕 때

네명의 화랑(四仙)인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의 유람지 중 한곳 이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朴元宗, 1467~1510)이 연산군 때 창건 하였다고 하나,

고려의 학자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 1282~1348)의 취운정기(翠雲亭記, 1331)에 의하면

1312년 (고려 충선왕4년)에 이미 기록이 남아있어 훨씬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알 수 있다.

원래 월송정은 현재의 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450m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언젠가 없어진 것을 1980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팔작기와집의 2층 누각(樓閣)으로 지었다.

월송(越松,月松)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는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부친인 이곡(李穀, 1298~1351)이 지은

동유기(東遊記, 1349)의 기록이 가장 오래 되었다.

동유기에는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 있는데,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또는 신라시대에 네명의 화랑(四仙)이 이곳에서 노닐며 쉬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중국 월(越)나라 소나무(松)를 가져와 심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밝은 달(月)이 떠올라 소나무(松)그림자가 비추었다는 이야기 등 여러 설이 전해온다.

특히 조선 성종(成宗)이 화가(畵家)에게 전국의 활터에 세운 정자(射亭)중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을 그려 오게 하였는데, 이때 월송정리 뽑혔다는 이야기도 전해오며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찿았던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安軸時안축시

옛사람 간곳없고 산천은 의구한데

천년전 옛자취 송정오직 남았구나

겨우사리 다정한 듯 서로엉켜 아니풀고

형제래가 마음맞아 좁쌀방아 찧는구나

화랑들은 신선처럼 학을구워 즐겨해도

조부들의 도끼로야 용잡을뜻 생각말라

머리털 반백되어 예놀던곳 다시오니

넓은바다 푸른솔은 옛모습 지녔고려

         백암거사찬(白巖居士贊)            여산부원군 문절공 백암거사 이행(驪山府院君 文節公 白巖居士 李行)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

越松亭復建金剛會同志功績紀念碑

월송정복건금강회동지공적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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