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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청룡사지 위전비(靑龍寺址 位田碑), 청룡사지 석종형승탑(石鐘形僧塔)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2. 4.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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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청룡사지 위전비(靑龍寺址 位田碑)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

충주 청룡사지(靑龍寺址)

청룡사지는 충주시 소태면 청계산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로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절터 내에 국보 제197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普覺國師塔),

보물 제656호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앞 사자 석등(普覺國師塔 前 獅子石燈),

충주 청룡사 위전비(位田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普覺國師塔碑) 등의 유물이 있으며,

보각국사탑은

조선시대의 석조 부도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될 만큼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

 

청룡사와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보각국사 혼수(混修, 1320~1392) 스님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초에 활동하던 고승으로서

태고 보우선사(太古 普愚禪師,1301~1382)의 법통을 이어받았다.

혼수(混修)는 1320년(고려 충숙왕7)에 태어나 1392년에 입적한 승려이다.

12세에 출가해 승려가 되었으며, 1341년(고려 충혜왕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1348년(고려 충목왕 4) 금강산에 들어가 2년간 수행하였고,

이후 선원사(禪源寺)에서 능엄경(楞嚴經)을 연구하였다.

1374년(고려 공민왕23) 내불당(內佛堂: 왕실 사찰)에서 공민왕에게 불법를 가르쳤으며,

이후 송광사(松廣寺)에서 주지를 지냈다.

1383년(고려 우왕9) 임금의 스승이 되는

고승에게 내리던 최고의 법계(法階)인 국사(國師)로 추대되었으며,

1392년(태조 1) 청룡사(靑龍寺)에서 입적하였다.

혼수가 입적하자 태조는 혼수의 승탑을 건립하라는 왕명과 함께

‘보각(普覺)’이라는 시호(諡號)와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탑호(塔號)를 내렸다.

충주 청룡사 위전비(靑龍寺 位田碑)

충북 향토문화재 제242호

숙종 18년(1692년)에 세워졌으며 2m가 넘는 크기의 4면비로

당시 청룡사의 운명과 관련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신도들이 전답을 기증한 내용을 적은 비이다.

청룡사는 고려말기에 창건되어 보각국사 혼수(混修,1320~1392) 스님이 머물면서

번성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이후의 사실은 이 비로서 짐작할 수 있다.

비에는 1692년 숙종 18년에 통정대부 숭휘(崇徽)를 대표자로

당상관인 통정대부 6명과

가선대부 2명 등 비에는 시주한 신도들의 이름과 품목 및 수량이 적혀 있으며

2~3차에 걸쳐 추가로 기록한 부분도 있어 절은 몇 차례 걸쳐 보수·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이 비의 받침들은 거북모양이고, 가첨석이 있는데 옥개석의 일부가 손실되어 있으나

그 마루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주변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당시의 사찰운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라 한다.

 

충주 청룡사지 석종형승탑(石鐘形僧塔)

충북 문화재자료 제54호

이 부도는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석종형 부도로서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을 놓고 화강암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 윗부분은 복발 모양으로 조성하여 정상부에 3단의 돌기부분을 조각하였고,

탑신의 전면부에 문자를 음각한 흔적이 보이는데,

마멸이 심하여 눈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우나

'고운당 사리탑(孤雲堂 舍利塔)'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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