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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대지국사 목암 한찬영(木菴 韓粲英)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2. 8.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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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보물 제16호.

충북 충주시 엄정면 비석2길 35-21, (괴동리 360-1)

마을 진입로 코너의 석비마을 자랑비

석비마을 자랑비라고 하게엔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게 각자가 되어있으니...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화강암 석재로서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부를 좌우로 귀접이하였는데,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대지국사 목암 한찬영(大智國師 木菴 韓粲英,1328~1390)

제액은「대지국사비명」이라 전서하였고 다시 비제를

有明 朝鮮國 忠州 億政 禪師高高麗國王師諡大智國師碑銘幷書

유명 조선국 충주 억정 선사고고려국왕사시대지국사비명병서

「嘉靖大夫 藝文春秋館學士 都評議使司事兼 成均司成 臣朴宜中 奉敎撰

「가정대부예문춘추관학사도평의사사사겸성균사성신박의중 봉교찬」이라 하였다.

보물 제16호

억정사지 대지국사비(億政寺址 大智國師碑)

 

 

대지국사(大智國師)는 양주한씨(楊州韓氏)로 휘는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속성은 한씨이며 고려 충숙왕(忠肅王) 15년(1328) 정월 8일에 탄생하여 1341년 충혜왕(忠惠王) 2년 14세 때에 중흥사에 들어가 원증국사에게서 5년 동안 수법하였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에 승과에 장원급제하였다. 또 고려 조계산 제14대 조사인 정혜국사(定慧國師)의 가지산 총림에 나아갔으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수자화상(守慈和尙)의 훈도를 받기도 하였다.

여러절의 주지를 거친후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양가도승록대사가 되었다. 그후 석남사, 월남사, 신광사, 운문사 등이 주지를 거친뒤 내원에 불려 들어가 정지원명 무애국일선사의 호를 받고 우왕초에 가지사(迦智寺)의 주지로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가 되었다. 우왕(禑王) 9년(1383)에 왕사(王師)가 되고 창왕(昌王) 때도 왕사로 있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억정사에서 입적하였다.

공양왕이 내린 시호는 지감(知鑑), 탑호는 혜월원명(慧月圓明)이며, 1393년 조선 태조2년에 시호를 대지(大智,) 탑호를 지감원명(知鑑圓明)으로 고쳤다.

대지국사비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대사성 박의중(朴宜中,1337~1403)이 짓고 승려인 선진(旋軫)이 쓰고 또 전액도 하였으며, 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1393년(태조 2)에 세우고 승려 혜공(惠公)이 각자(刻字)하였다.

 

비의 형식은 매우 간략한 것이며 대석도 윗면에 2단의 신좌를 새긴 장방형일 뿐이고 개석이 없이 신석도 윗변 좌우를 크게 귀접하였을 뿐이다. 전통적 수비요식이 쇄퇴하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걸친 과도기적 소작이므로 조형상 특색을 갖추는 여유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비문은 신석의 4면에 해서로 음각되어있고 말미에는 문승들 뿐아니라 속문도의 이름도 보이는데 판문하시중 홍영통(判門下侍中 洪永通), 문하시중 이색(門下侍中 李穡), 시중 심덕부(侍中 沈德符), 판개성 우인열(判開城府事 禹仁烈), 정당문학 박형(正堂文學 朴形)  20여명의 이름이 나란히 기록되어 있고 건비관사원과 충주목사의 이름도 새겨져 비를 세우기 위한 광범한 체제가 형성되었던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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