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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영의정 문간공 건암 김양택(文簡公 健庵 金陽澤)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2. 27.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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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 건암 김양택(文簡公 健庵 金陽澤)

안산시 향토유적 제25호.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건건동 138-2

문간공 건암 김양택(文簡公 健庵 金陽澤,1712(숙종38)~1777(정조1))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서(士舒), 호는 건암(健庵). 김장생(金長生)의 5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숙종의 장인 김만기(金萬基)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문청공(文淸公) 김진규(金鎭圭)이고,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연일정씨로 정소하(鄭昭河)의 따님이며, 배위는 남양홍씨로 정랑 홍우집(洪禹集)의 따님이다

 

​1741년(영조 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43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헌납과 부제학을 거쳐 원손사부(元孫師傅), 대사성,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1767년(영조43)에 우의정에 오르고 1776년(영조52)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사후인 1784년(정조8) 아들 김하재(金夏材, 1745~1784)가 역신(逆臣)으로 몰려 장살 당하자 벼슬을 추탈당하였으나, 뒤에 다시 복관되어 영돈녕부사가 됐다.

 

김양택 선생은 1743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과 홍문관대제학을 거쳐 1776년 영의정에까지 올라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 영조대왕의 묘지명을 찬하였다.

 

그런데 대제학은 당대 학문과 인품이 가장 깊다고 인정받는 사람이 오른다는, 벼슬의 꽃이라 불리는 관직으로 광산김씨 가문에서는 통틀어 7명을 배출하였다. 김양택의 경우 할아버지인 문충공 서석 김만기(文忠公 瑞石 金萬基,1633~1687)와 아버지인 문청공 죽천 김진규(文淸公 竹泉 金鎭圭,1658~1716)에 이어서 건암 김양택(健庵 金陽澤,1712~1777)으로 이어진 3대째 대제학을 지내어 명망이 아주 높았다.

 

김양택(金陽澤)의 묘에는 그와 그의 아들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양택이 죽자 묏자리를 현 삼천리에 정했는데, 묘를 만들며 「회다지 소리」[시신을 땅에 묻고 흙과 회를 섞어 다질 때 부르는 노래]를 하던 선소리꾼이 소리를 하면서 “양택의 맑은 물을 가재가 흐려놓는다.”는 뜻 모를 소리를 하였다.

 

사람들은 그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무심코 넘겼는데, 훗날 아들인 김하재(金夏材)와 관련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제야 그때 「회다지 소리」를 하던 선소리꾼이 “양택의 맑은 물을 가재가 흐려놓는다.”라고 한 소리 중에서 가재가 아들 김하재(金夏材)를 이르는 말이었음을 알고 놀랐다고 한다.

 

​저서로는 ‘건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역에는 비갈, 상석,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이 있다. 비갈은 1780년 오석(烏石)으로 건립됐다. 비갈의 비문은 이조판서이자 대제학인 강항유로(江漢遺老) 황경원(黃景源,1709~1787)이 지었고, 글씨는 손자인 김두공(金斗恭)이 썼다. 특히 비문의 앞면은 석봉 한호(石峯 韓濩)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안산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비석에 새겨진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를 볼 수 있다.

有明朝鮮領議政 謚文簡健菴金公陽澤士舒之墓  貞敬夫人南陽洪氏祔左

유명조선영의정 시문간건암김공양택사야지묘  정경부인남양홍씨부좌

영조19년(1743) 문과에 올라 세자시강원설서로 관직을 시작한 김양택은, 문학을 거쳐 강동현감이 되었다가 홍문관부수찬으로 내직에 들어왔는데, 어느날 소론의 거두 좌의정 정석오(鄭錫五)를 논박하는 상소를 올려 문제를 이르켰다. 파쟁을 싫어한 영조는 소론의 공격을 받게 된 김양택을 산청현감으로 좌천시켜 몸을 피하게 하였다.

이후 김양택은 수찬·필선·좌승지·영변부사·대사간·대사성·황해도관찰사 등을 거쳐, 원손보양관에 올라 뒤에 정조임금에 오른 세손을 극진히 가르쳤다. 이어 홍문관부제학·풍덕부사 등을 역임하고, 영조34년(1758) 홍문·예문 양관 대제학에 지성균관사를 겸하고, 이듬해 세손시강원의 우유선(右諭善)에 올라 거듭 왕세손을 보살핀 뒤, 다시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 세손우부빈객·이조참판 겸 대사성·공조판서·한성부판윤·병조·이조판서·판의금부사 겸 수어사·우참찬 등을 역임하고, 영조43년(1767) 우의정을 거처 곧 좌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무렵 그의 스승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을 비판하던 소론의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명재 윤증(明齋 尹拯) 부자의 관작을 삭탈할 것을 주장했다가 오히려 소론의 거센 반격으로 파직당하는 곤경에 빠졌다. 그러나 곧 영돈녕부사로 복직한 김양택은, 영조52년(1776) 3월 왕이 죽고 세손이 즉위, 정조시대가 열리니, 새 임금은 세손시절 그에게 정성을 쏟았던 김양택의 공을 잊을 수가 없어 그를 영의정에 기용, 국정의 정상에 세웠다. 영의정에 오른지 넉달만인 그해 6월에 전혀 뜻밖의 일이 벌어져 김양택은 죽음의 문턱에 서게 되고 말았다. 느닷없이 그의 셋째 아들 이조참판 김하재(金夏材)가 어떤 영문에서였던지 새 임금 정조의 실덕을 꼬집은 메모쪽지를 승지 이재학(李在學)에게 쥐어준 일이 불거져 대역부도죄로 처형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에 아버지 된 입장에서 연좌에 엮여 투옥된 채 왕의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지경에 빠졌다. 그러나 정조의 특별 배려로 국문도 없이 풀려난 김양택은, 곧 영돈녕부사로 복직하였다.

 

김양택은 몸이 허약하여 거동이 매끄럽지 못해 임금이 매우 안타까워했다. 갓 즉위한 정조가 김양택을 영의정으로 기용할때, 사람들은 “김공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진실로 영의정의 지위에 보임 될만하다. 지금 주상께서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을 얻었다”고 했다. 영조가 병이 깊어 병석에 눕자 그의 외손자이면서도 세손을 해치려 기를 쓰던 정후겸(鄭厚謙)에게, 대소 신료들이 몰려 들어 아첨을 떨었으나, 오직 김양택 만은 끝내 정후겸을 찾지 않았다. 이일을 두고 정조는 “지난날에 정후겸(鄭厚謙)을 찾지 않은 이는 오로지 경 한사람 뿐이었다”며 고마워했다.

김양택은 몸이 약해 옷을 가누지 못하는 듯하였으나, 마음은 단정하여 지조가 굳었다. 사람을 새김에는 변화가 없었고, 벼슬에 임해서는 검약한 생활을 지켜 재물을 모아 전답을 마련하지 않았다. 독서를 즐겨 늙어서도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듬해 8월 착잡한 심경에 병세가 깊어 세상을 등지니 나이 66세였다.

김양택의 부음을 들은 정조는 매우 슬퍼하며 조제(弔祭)의 에를 다하고 문간공(文簡公)으로 시호를 내렸다. 경기도 안산 반월면 건건리 김양택의 묘역에는, 대제학 황경원(黃景源)이 짓고 김양택의 손자 두공(斗恭)이 글씨를 쓴 묘갈이 있다.

김양택은 정랑 홍우집(洪禹集)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김노재(金魯材)는 그의 형인 김성택(金星澤)의 양자로 보내졌는데, 그도 역시 아들을 얻지 못해 4촌 형 군수 양재의 아들 김두항(金斗恒)을 양자로 삼았다. 김두항은 원주판관을 지냈다.

2남 김초재(金楚材)가 김양택의 뒤를 이었는데, 그는 군수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역시 아들이 없어 4촌인 군수 김명재(金命材)의 아들 김두공을 양자로 두었었다. 대역부도죄로 처형 된 3남 김하재는 우의정을 지낸 문헌공 노포 이휘지(文憲公 老圃 李徽之,1715~1785) 의 사위로, 화려한 배경을 바탕삼아 대사간·대사헌·이조참판 등 요직을 차지했었으나, 처신이 신중하질 못해 장살되고 아들과 딸도 연좌에 엮여 종이 되었고 부인까지 남해의 흑산도로 여종이 되고 말았다. 이때 가문이 통째로 문을 닫을 뻔 했는데, 정조의 배려로 다른 형제들은 화를 피할 수 있었으나 이조참판 김하재(金夏材)의 직계는 온전할 수가 없었고  손자인 김두공(金斗恭)도 이에 연루되어 사사되고  처자식까지 화가 미쳤다.

// 대제학 영의정 문간공 건암 김양택(文簡公 健庵 金陽澤) 가계//

      5대조 문원공 사계 김장생(文元公 沙溪 金長生, 1548~1631)

    고조부 참판 김반(金槃)

    증조부 부사 김익겸(金益兼,1614~1636)

할아버지 대제학 문충공 서석 김만기(文忠公 瑞石 金萬基,1633~1687) 숙종의 장인

   할머니 정경부인 청주한씨, 옥천군수 증 좌찬성 한유량(韓有良)의 따님

   아버지 대제학 문청공 죽천 김진규(文淸公 竹泉 金鎭圭,1658~1716)

   어머니 증 정경부인 연일정씨, 정소하(鄭昭河)의 따님

               형님 김성택(金星澤)

               대제학 영의정 문간공 건암 김양택(文簡公 健庵 金陽澤,1712~1777)

               배위 정경부인 남양홍씨, 정랑 홍우집(洪禹集)의 따님

                       장남 김노재(金魯材), 출계 김성택(金星澤)

                       차남 군수 김초재(金楚材)

                               손자 김두공(金斗恭)

                       삼남 이조참판 김하재(金夏材, 1745~1784)-逆臣 戕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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