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공 변응정 추모비(忠壯公 邊應井 追慕碑)
세종시 전동면 청람리 112-6, 개미고개
원주변씨 해남현감 충장공 변응정 추모비
贈資憲大夫兵曹判書 行通訓大夫海南縣監 原州邊公諱應井追慕碑
증자헌대부병조판서 행통훈대부해남현감 원주변공휘응정추모비
충장공 변응정 부조묘(忠壯公 邊應井 不祧廟)
사당 세종시 전동면 청람리 201-1
충장공 부조묘(忠壯公 不祧廟)
충장공 변응정 부조묘 충장사
충장공 변응정(忠壯公 邊應井, 1557~1592)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문숙(文淑).
원양군(原陽君) 변사겸(邊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經歷) 변윤계(邊胤季)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변열(邊悅)이며, 어머니는 병사 이흔(李昕)의 딸이다.
문예에 능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무예에 열중하여 1585년 29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 선전관 등을 거쳐 해남현감으로 재직 중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또 대군으로 침입한 적의 본토가 비어 있을 것을 들어
이를 공략하면 왜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 일본 정벌을 상소하였다.
금산에서 조헌(趙憲)과 합류하여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행군에 차질이 생겨 조헌이 전사한 뒤에 도착하여
김제군수 정담(鄭湛)과 합류하여 육박전으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나,
밤에 적의 야습을 받아 김제군수 정담(鄭湛,1548~1592), 의병장 황박(黃樸) 등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전라수군절도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왜적은 변응정(邊應井) 등의 충의에 탄복하여
조선군들의 시신을 한곳에 모아 큰 무덤을 만들고
‘조조선국충간의담(早朝鮮國忠肝義膽, 조선군의 충의를 기리다)’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싸움에 나서기에 앞서 동생에게 글을 보내
‘주욕(主辱: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사(臣死: 신하로서 죽음이 마땅함)’라 하여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노모와 작별하는 뜻을 고하며 입던 옷과 머리카락·손톱을 함께 보내
죽은 뒤 이것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당부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과 송시열(宋時烈)의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에는
웅령(熊嶺)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잘못된 것으로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였다.
후에 정문(旌門: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본인의 집앞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충장(忠壯)의 시호가 내려졌다.
칠백의총(七百義塚)이 모셔진 금산(錦山)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原州邊氏先祖追慕壇
원주변씨선조추모단
//원주변씨 해남현감 충장공 변응정(忠壯公 邊應井) 가계//
7대조부 영삼사사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렬(大隱 邊安烈)
6대조부 중군총제 변이(邊頤)
5대조부 원평군 무송당 변상회(原平君 撫松堂 邉尙會)
고조부 월곶첨사 변환(邊煥)
증조부 원양군 변사겸(原陽君 邊士謙)
조부 경력 변윤계(邊胤季)
백부 공조판서 양정공 남호 변협(襄靖公 南湖 邊協, 1528~1590)
사촌 한성부윤 연천군 양혜공 변응성(淵川君 襄惠公 邊應星, 1552~1616)
아버지 고성현령 증 공조참판 변열(邊悅)
어머니 숙인 철성이씨, 병마사 이흔(李昕)의 따님
충장공 변응정(忠壯公 邊應井, 1557~1592), 묘소: 남양주시 이패동 산6
배위 정부인 전주이씨, 현감 이식(李軾)의 따님
자 중추부동지사 변충범(邊忠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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