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관찰사 인수부윤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
경기 시흥시 하산동 산2
嘉善大夫仁壽府尹 仁齋晉州姜公諱希顔之墓 配貞夫人固城李氏 配貞夫人彦陽金氏三位合祔
가선대부인수부윤 인재진주강공휘희안지묘 배정부인고성이씨 배정부인언양김씨삼위합부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 1417~1464)
강희안 1418년(태종 18)~1465년(세조10)은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대민공 강석덕(碩德)의 아들이며, 좌찬성 강희맹(希孟)의 형으로 세종의 이질(姨姪)이다.
강희안의 친가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고려 말~조선 초기에 여러 대에 걸쳐 재상(宰相)급의 고위 관료들을 계속 배출한 명문가의 하나였다.
그의 증조부 강시(姜蓍)는 공양왕(恭讓王)의 사돈으로 관직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조부 강회백(姜淮伯)은 고려 말에 정당문학(政堂文學)과 대사헌(大司憲),
조선 초에는 동북면 순무사(東北面巡撫使) 등을 역임하였다.
또 아버지 강석덕(姜碩德)은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친동생 강희맹(姜希孟)은 좌찬성(左贊成)에까지 올랐으며,
종형(從兄)인 강맹경(姜孟卿)은 세조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강희안의 어머니는 청송심씨(靑松沈氏)로 세종(世宗)의 장인인 심온(沈溫)의 따님이며,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동생이다.
따라서 강희안은 세종의 조카가 되고,
문종(文宗)·세조(世祖)·안평대군(安平大君) 등과는 외종(外從) 관계가 되는 왕실의 인척이었다.
이상과 같은 강희안의 친가와 외가의 가문 배경은
그가 순탄한 관직 생활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강희안은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지통례문사(知通禮門事) 이곡(李谷)의 딸이었는데 슬하에 자식이 없이 일찍 사망하였다.
이에 강희안은 전(前) 주부(主簿) 김중행(金仲行)의 딸과 혼인했는데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낳았으므로,
후에 동생 강희맹의 둘째 아들 팔용정 강학손(八龍亭 姜鶴孫)을 후사로 삼아 대를 잇게 하였다.
1438(세종 2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1(세종 23)년에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돈녕부 주부가 되었다.
1443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다.
1444(세종 26)년에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의사청에 나아가 언문(諺文)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였고,
1445(세종 27)년에는 최항 등과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였다.
1447년에 이조정랑이 되었고,
같은 해에 집현전직제학 최항,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등과 <동국정운>을 완성하였다.
1450년 왕이 위독하자 부지돈녕(副知敦寧)의 직에 있으면서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經文)을 썼다.
1454(단종 2)년에 집현전직제학에 올랐고, 1455년(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1456년에 단종 복위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심문을 받았으나 화를 면하였다.
후일에 다시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 이종검(李宗儉)이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지만 왕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1460(세조 5)년 호조참의 겸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1462(세조 7)년에 인순부윤(仁順府尹)으로서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표(表), 전(箋)을 받들고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3년에 중추원 부사 (中樞院 副使)가 되었다.
1464(세조9)년에 사망하였는데 세조가 관곽(棺槨)을 부의(賻儀)로 내려주었다.
그는 시와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리었으며,
특히 전서(篆書), 예서(隷書)와 팔분(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시는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이 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문집이 없다.
그의 그림은 송나라의 유용(劉墉), 곽희(郭熙),
글씨는 진(晋) 나라의 왕희지(王羲之)와 원(元) 나라의 조맹부(趙孟頫)에 비견되기도 하였다.
기록상에 전하는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를 묵화로 즐겨 그렸으며
영모화(翎毛畵) 산수화, 인물화에도 모두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여인도(麗人圖)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 청천강(菁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라 할 수 있다.
1454(단종 2)년에 산천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팔도(八道) 및 서울의 지도를 제작하는데 참여하였다.
1445년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민영창후사(體天牧民永昌後嗣)의 여덟자 옥새를 만들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하여 쓰게 하였다.
세조때에 임신자(壬申字)를 녹여서 새로 글자를 주조할 때 그가 글씨를 썼으며 이를 을해자(乙亥字)라고 하였다.
그는 글씨 쓰기를 꺼려 그의 필적이 세상에 전하는 것이 드물다.
성격은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러운 것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일찍이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한때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원예에 관한 전문서적인 <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여기에는 꽃을 가꾸는 일을 그의 경륜(經綸)의 뜻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의 그림으로는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와 산수인물도(山水人物圖),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고사도교도(高士渡橋圖),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이 있으며
글씨로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와 윤공간공형묘비(尹恭簡公炯墓碑)가 남아있다.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의 묘소는
1987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에서 현재의 이곳으로 이안하였다고 한다.
上 仁壽府尹 姜公希顔之墓 下 貞夫人金氏之墓
상 인수부윤 강공희안지묘 하 정부인김씨지묘
세월속의 석물을 한곁에....
좌찬성 문량공 사숙재 강희맹(文良公 私淑齋 姜希孟)의 형님 인수부윤 강희안(姜希顔) 묘역후경
좌찬성 문량공 사숙재 강희맹(文良公 私淑齋 姜希孟)의 장남 우의정 숙헌공 강구손(肅憲公 姜龜孫)
우의정 숙헌공 강구손(肅憲公 姜龜孫,1450~1505),
강구손(姜龜孫). 세종 32년(1450)∼연산군 11년(1505),
자는 용휴(用休), 시호는 숙헌(肅憲), 본관은 진주,
증조는 동북면도순문사 강회백(姜淮伯), 조부는 지돈령부사 강석덕(姜碩德),
아버지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 어머니는 호조참판 안숭효(安崇孝)의 따님 순흥안씨,
배위는 군자감정 송요년(宋遙年)의 따님 은진 송씨이다.
1479년 성종 1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정이 되고,
1486년 중시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상주목사로 나갔다.
이후 장례원판결사ㆍ부제학ㆍ이조참의ㆍ승정원동부승지ㆍ좌승지ㆍ도승지를 거쳐
1497년 연산군 3년에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1498년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서 추국에 참여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의 처벌을 가벼이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형조판서, 이듬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502년에는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지고
1503년 병조판서로 재임 중 세자책봉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찬성에 올랐다.
1505년 연산군11년 우의정에 올라
명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하등극사로 다시 명나라에 가던 중 등창(-瘡)으로 평안도에서 졸 하였다.
議政府右議政晉原君贈諡肅憲公姜公之墓 貞敬夫人宋氏附葬
의정부우의정진원군증시숙헌공강공지묘 정경부인송씨부장
숙헌공 강귀손(肅憲公 姜龜孫) 묘역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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