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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순천도호부사 강태수(姜台壽), 부사용 강복(姜復), 장단부사 취죽 강극성(保醉竹  姜克誠), 장단부사 보만당 강극성(保晩堂 姜克誠)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6. 28.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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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 순천도호부사 강태수(姜台壽)

경기 시흥시 하산동 산2

順天都護府使姜公之墓

순천도호부사강공지묘

順天都護府使晉州姜公台壽之墓 配淑夫人延日鄭氏祔左

순천도호부사진주강공태수지묘 배숙부인연일정씨부좌

순천도호부사 강태수(姜台壽,1479년(성종10)~1526년(중종21) = 4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삼(子三)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손자이고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의 양아들이다.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1478~1543)과 절친한 사이였다.

1511년(중종6) 33세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 봉상시주부에 임명되었고,

공조, 예조정랑에 올랐으며, 교서관교리, 훈련원판관, 봉상시첨정, 광흥창수, 예빈시부정을 역임하였다.

생부 강학손(姜鶴孫)이 일찍이 관노비를 사점(私占)하였다가 전라도 영광으로 귀양갔었는데,

그가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이 일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양부 강귀손(姜龜孫)의 도움으로 벼슬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3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언제나 조심하고 게으르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민첩하였고 자기가 맡은 일은 반드시 해결했다.

생부모가 연로하다고 지방 수령관을 자원하여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고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높았다.

얼마 뒤에 생부 강학손의 상을 당하고 다음해에 생모 신씨의 상을 당하자,

전라도 영광에서 여묘살이를 오랫동안 하다가 몸의 건강을 해쳐서,

1526년(중종21) 상중(喪中)에 몸이 쇠약해져서 죽으니, 나이가 48세였다.

 

 

어려서부터 김안국(金安國)과 같이 자라면서 함께 공부했는데, 

서로 형제 같이 친하게 지냈다. 

일찍이 두 사람은 아들딸을 혼인시키자고 약속했는데, 

나중에 그 약속대로 강태수의 아들 강복(姜復)과 김안국의 외동딸이 혼인하였다.

강태수의 자질은 이미 남보다 빼어났는데, 

일찍이 가풍(家風)을 이어받아 문학에 힘써 마침내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백부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에게 양자로 갔는데, 

양부 강귀손이 졸하자 양모를 더욱 잘 섬겼으며, 

여러 형제자매와 재산을 분배하는 데에도 적자(嫡子)라고 자처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나누어 주어, 

양부의 뜻을 그대로 따랐다. 친구와 사귀는 데에도 신의(信義)를 매우 중시하였다.

전라도 영광에서 졸하여, 경기도 안산(安山) 직곶리(職串里)의 선영에 장사지냈는데, 

친구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순천도호부사 강태수(姜台壽) 묘역후경

 

 

 

 

 

충좌위 부사용 강복(姜復)

忠佐衛副司勇晉州姜公復之墓 配安人義城金氏祔左

충좌위부사용진주강공복지묘 배안인의성김씨부좌

 

 

 

 

 

 

예문관직제학 장단부사 보만당 강극성(保晩堂 姜克誠)

장단부사 취죽 강극성(保醉竹  姜克誠)

贈通政大夫藝文館直提學 晉州姜公克誠之墓 配淑夫人昌寧成氏祔左

증통정대부예문관직제학 진주강공극성지묘 배숙부인창녕성씨부좌

 

강극성(姜克誠)[1526중종21~1576선조9]  본관은 진주,

조선 중기 명종(明宗)~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백실(伯實), 호는 취죽(醉竹), 보만당(保晩堂)이다.

음력 513일 죽취일(竹醉日)에 태어났다고 하여 호를 취죽(醉竹)이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우의정강귀손(姜龜孫)의 증손자이다.

아버지는 사용 강복(姜復), 어머니는 의정부좌참찬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의 따님이다.

윤춘년(尹春年)의 문인(門人)이다.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4대손으로

1546(명종1)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고,

1555년(명종 10) 이량(李樑)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1556년(명종 11) 중시(重試)에 다시 급제하여 홍문관부수찬에 올랐다.

그 후 사헌부장령, 사간원사간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563년(명종 18)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除授)되었다.

1565년 명종20년 효녕대군(孝寧大君) 5대손이고,

국구(國舅) 심강(沈鋼)의 처남인 이조판서 이량(李樑) 일파로 몰려서 출외되었다가

1574년 선조7년에 직첩을 돌려받고 제용감정에 올랐다가 외직인 장단도호부사(長湍都護府使)에 나갔다가

1576년 향년 51세로 갑자기 졸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인 강복(姜復)을 잃자, 외조부 좌찬성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이 데려다가 길렀는데,

영리하고 재능이 있어서 글을 가르치면 하루에 수천 개의 글자를 외워서 신동(神童)이라고 일컬어졌다.

30세 무렵 왕후의 외삼촌 이량(李樑)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

명종이 글을 읽는 선비들에게 선온(宣醞: 궁중 술)을 하사하고 당일로 시(詩)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모두 주춤하고 있는데, 그는 취기(醉氣)를 띤 채 즉석에서 시를 지어 올리니,

명종이 그 시에 감탄하여 양마(良馬) 1필을 내려주었다.

당시 그가 지은 시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전파되어 모두 애송(愛誦)할 만큼 유명하였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이 지은 묘표(墓表)에서,

“그는 시재(詩才)가 뛰어나 장래가 촉망되었는데,

외척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고 하였다.

장단부사 보만당 강극성(保晩堂 姜克誠) 묘역후경

 

//진주강씨 좌찬성 문량공 사숙재 강희맹(文良公 私淑齋 姜希孟) 가계//

고조부 정당문학 강군보(姜君寶)

증조부 문하찬성사 공목공 강시(恭穆公 姜蓍,1339~1400)

   조부 동북면순무사 통정 강회백(通亭 姜淮伯,1357~1402,태종2)

   생부 진양부원군 대민공 완역재 강석덕(戴愍公 玩易齋 姜碩德,1395~1459)

   양부 감찰 강순덕(姜順德), 찬성사 이숙번(李叔蕃,1373~1440)의 사위

   모친 증 정경부인 청송심씨. 영의정 안효공 심온(安孝公 沈溫,1375~1418)의 따님

          형님 인순부윤 강희안(姜希顔,1418~1464)

         좌찬성 문량공 사숙재 강희맹(文良公 私淑齋 姜希孟,1424~1483=60)

         배위 정경부인 순흥안씨, 관찰사 한백당 안숭효(寒栢堂 安崇孝)의 따님

                장남 우의정 숙헌공 강구손(肅憲公 姜龜孫,1450~1505),

                배위 정경부인 은진송씨, 군자감정 송요년(宋遥年)의 따님

                     손자 순천도호부사 강태수(姜台壽,1479~1526),생부 팔용정 강학손(八龍亭 姜鶴孫)

                     배위 연일정씨, 홍문관직제학 산행와 정회(山行窩 鄭淮)

                             증손 충좌위 부사용 강복(姜復,1508~1529)

                                    현손 장단부사 보만당 강극성(保晩堂 姜克誠,1526~1576)

                                             5대손 강원도사 강선경(姜先慶)

                                                   6대손 청천군 강진창(菁川君 姜晉昌)

                      손자 안동부사 강이의(姜二儀)

              차남 장예원사평팔용정 강학손(八龍亭 姜鶴孫,1455~1523)출계인수부윤강희안(姜希顔)

              장녀 창녕인 평안공 일로당 성세명(平安公 佚老堂 成世明,1447~1510)

              차녀 안동인 부평도호부사 증 대사헌 김성동(金誠童,1452~1495)

              삼녀 고령인 인천부사 신렴(申濂)

              사녀 안동인 감찰 권만형(權萬衡)

              삼남 강오손(姜鰲孫)

              사남 강종손(姜螽孫)

벽암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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