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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오창 박동량(梧窓 朴東亮),금계군 증 좌의정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금양위 문정공 분서 박미(錦陽尉 文貞公 汾西 朴瀰), 정안옹주(貞安翁主)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7. 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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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계군 증 좌의정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 오창 박동량(梧窓 朴東亮)

금양위 문정공 분서 박미(錦陽尉 文貞公 汾西 朴瀰)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2

 

 

금계군 기재 박동량(錦溪君 寄齋 朴東亮),  오창 박동량(梧窓 朴東亮)

금계군 증 좌의정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1569~1635)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자룡(子龍), 호는 기재(寄齋), 오창(梧窓), 봉주(鳳洲)이다.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 박응복(朴應福), 어머니는 나주목사 임구령(林九齡)의 따님이다.

1590년(선조 23) 22세에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선조 25) 병조좌랑이 되어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다.

1593년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25세의 젊은 나이에 승정원우부승지로 발탁되었고,

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594년(선조 27) 26세에 도승지에 올랐다.

이러한 파격적인 승진을 사헌부가 비판하기도 하였다.

 

1596년(선조 29) 이조참의 재임 중 명나라에 동지사(冬至使)로 다녀오고,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황해도 수안까지 호종하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 금계군(錦溪君)에 책록된 후

1605년(선조 38) 의정부우참찬에 올랐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선조가 죽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간 수묘(守墓)하였다.

1611년(광해군 3) 판의금부사가 된 후

광해군 때와 인조반정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유배와 복관(復官)을 반복하였다.

저서로 『기재사초(寄齋史草)』, 『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으로 좌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산22-2 군자동 비앞골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박동량 묘는 원래 원평부(原平府)[지금의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가 

1641(인조 19)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시흥시 군자봉 동쪽 능선에 자리하는데, 그 아래에 아들 박미(朴彌) 묘가 있다.

묘비의 비문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5대손 강화부유수 박사익(朴師益)이 썼다.

신도비의 비문은 1641(인조 19) 작성되었지만, 비문을 후손들이 간직하고 있다가 

1725(영조 1) 5대손인 강화유수 박사익에 의해서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글씨는 송시열(宋時烈)이 썼으며, 

형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전자(篆字)하였다. 

비문의 추기(追記)는 그의 현손(玄孫) 박필주(朴弼周)가 짓고, 글씨는 5대손 박사익이 썼다. 

비신의 위쪽에

行右參贊 錦溪君 贈領議政 謚忠翼 朴公神道碑銘

'행우참찬 금계군 증영의정 시충익 박공신도비명'이라고 전액(篆額)되어 있다.

1993년 신도비 비각과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는 1988 5 31일 시흥시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뒤에 아들 박미(朴瀰)와 박의(朴漪)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김상용(金尙容), 김상헌(金尙憲) 형제와 친교가 두터웠다. 

저서로는 기재사초(寄齋史草)·기재잡기(寄齋雜記)·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有明朝鮮國忠勳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崇祿大夫行議政府右參贊兼同知經筵事知春秋館事

유명조선국충훈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숭록대부행의정부우참찬겸동지경연사지춘추관사

判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錦溪君朴公諱東亮之墓  貞敬夫人驪興閔氏祔

판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금계군박공휘동량지묘  정경부인여흥민씨부

有明朝鮮忠勳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判義禁府事錦溪君朴公東亮之墓 貞敬夫人閔氏祔

유명조선충훈정량효절협책호성공신 판의금부사금계군박공동량지묘 정경부인민씨부

금계군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 묘역후경

 

 

 

 

 

 

 

 

 

금양위 문정공 분서 박미(錦陽尉 文貞公 汾西 朴瀰),   정안옹주(貞安翁主)

有明朝鮮錦陽君朴公瀰之墓 貞安翁主祔

유명조선금양군박공미지묘 정안옹주부

 

금양위 문정공 분서 박미(錦陽尉 文貞公 汾西 朴瀰,1592선조25~1645인조23)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척신(戚臣).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이다.

자는 중연(仲淵), 호는 분서(汾西)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아버지는 참찬(參贊)박동량(朴東亮)이고, 어머니는 승지 민선(閔善)의 따님이다.

박의(朴漪)·박유(朴濰)·박자(朴澬)의 형이며,

부인 정안옹주(貞安翁主)는 선조(宣祖)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딸이다.

1603년(선조36) 12세 때 선발되어,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금양위(錦陽尉)에 봉해졌다.

1605년(선조38) 친공신(親功臣) 적장자(嫡長子)의 자격으로

2품계를 초자(超資)하여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1613년(광해군5) 폐모(廢母)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을 때,

아버지가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친교가 깊다고 하여 화를 입었는데,

그도 ‘폐모론(廢母論)’의 정청(政廳)에 불참하였다고 하여

김류(金瑬) 등과 함께 십사(十邪)로 몰려서 삭탈관직(削奪官職)당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직후 1625년(인조3) 회맹공신(會盟功臣)을 책봉할 때,

구공신(舊功臣)의 적장자(嫡長子)로 가자(加資) 되었으며,

혜민서(惠民署)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1638년(인조16) 동지사(冬至使) 겸(兼)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고,

뒤에 금양군(錦陽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645년(인조23) 1월 15일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54세였다.

저서에 『분서집(汾西集)』이 있다.

 

 

분서 박미(汾西 朴瀰)는 서예에 능하였는데,

유필로서 참판 박이서 비(朴彛敍 碑), 영흥부사 이수준 묘갈(李壽俊 墓碣) 등이 있다.

금양위 분서 박미(錦陽尉 汾西 朴瀰,1592~1645)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선조의 부마였으나, 금중(禁中)에 출입하되 매우 화려한 것은 그 마음에 든 것이 없었고

집에 있을 때에는 의복· 거마(車馬) 따위를 쓰는 것이 한미한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다.

또 손님이 찾아오면 청아(淸雅)하게 앉아서 초연(超然)하였다.

젊었을 때에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1556~1618)에게서 배워

그 언행을 보고 자신을 단속한 것이 많았다.

신풍부원군 계곡 장유(谿谷 張維,1588~1638), 기암 정홍명(畸庵 鄭弘溟,1582~1650) 등과 교유하였다.

문예(文藝)에 천부의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는 뜻을 어기지 않도록 힘썼고,

또 형제에게 우애가 돈독하였으므로, 그 친애하는 모습을 보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안산군(安山郡) 유향(酉向)의 언덕에 있는데,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반남박씨 금계군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 가계//

고조부 상주목사 증 이조판서 박임종(朴林宗)

증조부 이조정랑 증 좌찬성 박조년(朴兆年)

    조부 사간 증 영의정 박소(朴紹)

    백부 왕자사부 박응천(朴應川)

    중부 영돈녕부사 반성부원군 박응순(朴應順)

    중부 대사헌 박응남(朴應男)

    숙부 도정 박응인(朴應寅)

아버지 사헌부대사헌 박응복(朴應福)

어머니 정부인 선산임씨, 나주목사 임구령(林九齡)의 따님

           형님 예조참의 박동열(朴東說)

           금계군 증 좌의정 충익공 기재 박동량(錦溪君 忠翼公 寄齋 朴東亮,1569~1635)

           배위 정경부인 여흥민씨, 좌승지 민선(閔善)의 따님

                   장남 금양위 문정공 분서 박미(錦陽尉 文貞公 汾西 朴瀰,1592~1645)

                   배위 정안옹주(貞安翁主), 선조(宣祖,1552~1608)와 인빈김씨의 따님

                           손자 강화부경력 박세교(朴世橋,1611~1662)

                           배위 전의이씨, 종친부전부 이석기(李碩基)의 따님

                                   증손자 금은군 박태두(錦恩君 朴泰斗, 1637 ~ ?)

                                   증손자 홍문관교리 박태만(弘文館校理 朴泰萬, 1642 ~ 1689)

                                   증손자 군수 박태성(郡守 朴泰成, 1643 ~ ?)

                                   증손자 박태화(朴泰華, 1648 ~ ?)

                                   증손자 좌랑 박태한(佐郞 朴泰韓, 1649 ~ ?)

                                   증손자 박태길(朴泰吉, 1654 ~ ?) -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의 증조부

                                   증손자 박태발(朴泰發, 1657 ~ ?)

                  차남 사헌부장령 중봉 박의(中峯 朴漪,1600~1644)

                          손자 박세래(朴世來)

                          손자 좌의정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

                  삼남 박유(朴濰)

                  사남 박자(朴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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