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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동악 이안눌 신도비(東岳 李安訥 神道碑),대사헌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

구름에 달

by 碧巖 2024. 8. 19.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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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산24-3

(7월 20일 한여름 묘역이 정리가 안되어 있어서 추후 다시....)

24년 11월16일 다시 답사를

동악 이안눌 신도비(東岳 李安訥 神道碑)

충청남도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 247-2

 

贈左贊成諡文惠公 東岳 李先生 神道碑銘

증좌찬성시문혜공 동악 이선생 신도비명

1712년 숙종38년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1570~1652) 짓고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1606~1672)이 글씨를 써

문곡 김수항(文谷 金壽恒,1629~1689)이 두전(頭篆)을 썼으며,

1712년 비를 건립하면서 이집(李濈)이 추기(追記)를 하였다.

 

 

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원정(李元禎)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형(李泂)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로 대호군(大護軍) 이양(李崵)의 딸이다. 재종숙부인 사헌부감찰 이필(이泌)에게 입양됐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이안눌은 18세에 진사시에 수석 합격한다. 그러나 동료들의 모함을 받자 관직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오직 문학 공부에 열중했다. 이 시기에 동년배인 석주 권필(石洲 權韠,1569~1612)과 선배인 월정 윤근수(月汀 尹根壽,1537~1616), 오봉 이호민(五峯 李好閔,1553~1634) 등과 교우를 맺었다. 이들의 모임을 동악시단(東岳詩壇)이라고 한다.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 32) 다시 과거 시험을 봐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후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었다. 1601년(선조 3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에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했다. 공조로 옮겼다가 주시관(主試官)으로 호서와 관서지방에 나갔다가 다시 예조에 들어온 후 단천군수가 됐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를 거쳐 1610년 담양부사가 됐다. 부사가 된지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됐고 호조참의 겸 승문원부제조로 임명됐다. 그 후에 다시 동부승지에서좌부승지가 됐으나 사직한다. 이후에 강화부사가 된다.

그 후에 어머니의 삼년상을 마치고, 인조반정으로 예조참판에 임명됐으나 그를 비방하는 말들이 생겨나자 사직했다. 이듬해에 이괄(李适,1587~1624)의 난을 방관했다는 죄로 귀양을 갔다가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됐고 다시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됐다.

1631년에는 함경도관찰사가 됐고 다음해에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순찰사에 제수됐다.

조정에서 청렴하며 근면한 관리를 뽑혀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어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제수됐다. 같은 해(1636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든 몸을 이끌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 병세가 악화돼 졸 하였다.

그은 작품 창작에 최선을 다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두보(杜甫)의 시를 만 번이나 읽었다고 한며 시를 지을 때에 하나의 글자도 가볍게 쓰지 않았다고 전한다. 특히, 당시(唐詩)에 뛰어나 이태백(李太白)에 비유됐고 서예 또한 뛰어났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문가(聞歌)」가 특히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고답적 표현을 버리고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생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한편,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東萊四月十五日)」은 전쟁의 상처를 형상화한 내용으로 사실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내용은 왜적이 동래에 쳐들어왔을 때 관민이 함께 막으려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연을 담고 있다.

이러한 시를 통해 그가 체험한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이 가져다준 참상을 그려볼 수 있다.

또한, 명나라로 사행가면서 지은 시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적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저서로는 『동악집(東岳集)』 26권이 있다.

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됐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임좌병향(壬坐丙向)

묘소의 좌향을 석재로 ...

 

有明朝鮮國崇政大夫 行禮曹判書兼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贈資憲大夫議政府左贊成兼

유명조선국숭정대부 행예조판서겸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 증자헌대부의정부좌찬성겸

知經筵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諡文惠東岳李公安訥之墓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 시문혜동악이공안눌지묘

임좌병향(壬坐丙向)

 

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 묘소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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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의 5대손 대사헌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

향로석이 상석을 받치고 있는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 묘역석물

//덕수이씨 대사헌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 가계//

  5대조 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1571~1637) 

고조부 대사간 대산 이합(臺山 李柙,1624~1680)

증조부 한성판윤 정익공 이광하(貞翼公 李光夏)

  조부 좌의정 충헌공 취촌 이집(忠憲公 醉村 李㙫,1664~1733)

  조모 정경부인 풍산홍씨, 판결사 홍만회(洪萬恢)의 따님

  조모 정경부인 안동김씨, 군수 김수빈(金壽賓)의 따님, 선원 김상용 손자

 부친 이조판서 충정공 탄옹 이주진(忠靖公 炭翁 李周鎭,1691,숙종17~1749,영조25)

 모친 정경부인 여흥민씨, 우의정 문충공 민진원(文忠公 閔鎭遠)의 따님

         형님 좌의정 충목공 첨재 이은(忠穆公 瞻齋 李溵,1722~1781)

         동생 돈녕부도정 부계 이서(鄜溪 李漵,1728~1794),  초명 이한(李澣)

         대사헌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1725영조1~1779정조3)

         배위 정부인 달성서씨, 문정공 보만재 서명빈(文靖公 保晩齋 徐命彬)의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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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석물없는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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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째 제일 하단의 묘소...

 

 

//덕수이씨 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 가계//

  5대조 온양군사 이추(李抽)

고조부 증 영의정 연헌공 이의무(蓮軒公 李宜茂,1449~1507)

증조부 좌의정 문헌공 용재 이행(文獻公 容齋 李荇,1478~1534)

조부 승위부위 이원정(李元禎)

생부 진사 증 이조참판 이형(李泂) 진사장원

생모 정부인 경주이씨, 대호군 이양(李崵)의 따님=

양부 사헌부감찰 증 좌찬성 이필(李泌,1538~1592), 풍성부원군 이기(李芑)의 손자

양모 정경부인 능성구씨,

     문혜공 동악 이안눌(文惠公 東岳 李安訥,1571~1637)

     배위 여산송씨, 장령 송승희(宋承禧)의 따님

         자 대사간 대산 이합(臺山 李柙,1624~1680),생부 병조참판 지전 이경헌(芝田 李景憲,1585~1651)

               손자 한성판윤 정익공 이광하(貞翼公 李光夏)

                      증손자 우의정 충헌공 취촌 이집(忠憲公 醉村 李㙫,1664~1733)

                         현손 이조,병조,예조판서 충정공 탄옹 이주진(忠靖公 炭翁 李周鎭,1691~1749)

                            5대손 대사헌 함광헌 이미(含光軒 李瀰,1725~1779)

              손자 진사 이익하(李翊夏)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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