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 추양사(秋陽祠)
충남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677



志山金福漢先生 抗日事蹟碑
지산김복한선생 항일사적비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1860~1924)
본관은 안동.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1892년(고종 29)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와 대사성을 거쳐 승지 등을 역임했다.
적극적인 실천유학의 자세를 취하였고, 한말 의병의 최초 기의자(起義者)이다.
1894년 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895년 8월에 일본이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난 후,
11월 김홍집(金弘集,1842~1896)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자
복암 이설(復庵 李偰,1850~1906), 안병찬(安炳讚,1854~1929) 등과 함께
홍주목사 이승우(李勝宇,1841~1914)를 권유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부 관찰사 이승우(李勝宇)가 일제와 내통함으로써 일본군에 잡혀 투옥되었다.
고종의 특지로 석방된 뒤,
성균관장과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복암 이설(復庵 李偰)과 함께
이완용(李完用,1858~1926) 등 을사오적의 참수(斬首)를 청하는 소를 올려 투옥되었다.
1906년에도 민종식(閔宗植,1861~1917)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7년 의병은닉과 민심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는 도중에
일본순검에게 무수히 구타당해 그 후유증으로
평생 동안 식사와 용변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해야 했다.
그뒤 일제의 감시 속에 두문불출하다가
1919년 3·1운동 뒤 영남의 면우 곽종석(傘宇 郭鍾錫,1846~1919)과 함께
호서의 유림을 대표하여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를 보냈다.
이 일로 체포되었으나, 90여 일 만에 중병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부터는 인지사(仁智社)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썼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추양사(秋陽祠)



志山金先生紀義碑
지산김선생 기의비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




朝鮮國大司成 志山金先生諱福漢之墓 配淑夫人延安李氏祔左
조선국대사성 지산김선생휘복한지묘 배숙부인연안이씨부좌




지산 묘역에서 추양사

//신안동김씨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 가계//
부친 김봉진(金鳳鎭,1826~1865)
모친 연안이씨, 이규(李圭)의 따님
지산 김복한(志山 金福漢,1860~1924)
배위 숙부인 연안이씨, 이의익(李毅翼)의 따님
배위 숙부인 청주이씨, 이주찬(李周讚)의 따님
장남 김은동(金殷東,1888~1945)
차남 김노동(金魯東,1899~1958) 계 김복한 친동생 김교한
삼남 제헌국회의원, 반민특위조사위원 김명동(金明東,1903~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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