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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추원재(追遠齋),문충공 점필재 김종직(文忠公 佔畢齋 金宗直)

구름에 달

by 碧巖 2021. 8. 8.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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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원재(追遠齋)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경남 밀양시 부북면 추원재길 58, (제대리 701)

 

추원재(追遠齋)는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문강공 강호산인 김숙자(文康公 江湖散人 金叔滋, 13891456) 선생이 터를 잡고

그의 아들인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文忠公 佔畢齋 金宗直,14311492) 선생이 평생을 보낸 집터이다.

 

강호산인 김숙자(江湖散 人金叔滋) 선생은

12세 때부터 야은 길재(冶隱 吉再)에게 글을 배우고

30세인 세종 1(1419) 문과에 급제한 뒤 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16세기 성리학을 보급하고 사림이 확립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그의 아들인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으로 하여금 계보를 잇게 하였으며,

김종직은 현재 성리학의 거두(巨頭)로 인정받고 있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파손된 것을 순조 10(1810) 사림과 그의 후손들이 다시 고쳐 세운 것이다.

 

점필재 김종직선생(佔畢齋 金宗直先生)상과    문충공점필재김종직선생연보비(文忠公佔畢齋金宗直先生年譜碑)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文忠公 佔畢齋 金宗直)

1431(세종13)~1492(성종23)

본관 선산(善山) 字는 계온(季昷)·효관(孝盥), 號는 점필재.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문강공 강호산인 김숙자(文康公 江湖散人 金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따님이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가문은 고려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강호산인 김숙자(江湖散人 金叔滋,)는 고려말, 조선초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썼던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제자로,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은

길재와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학통을 계승한 셈이다.

1446년(세종28) 16세에 과거에서 백룡부 (白龍賦)를 지어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의 주목을 받았으나 낙방했다.

그뒤 형 김종석(金宗碩) 등과 함께 황악산(黃嶽山) 능여사(能如寺)에 가서 독서에 힘써 학문을 크게 성취했다.

1451년(문종1) 21세에 울진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이며 종직의 문인인 매계 조위(梅溪 曺偉)의 누나와 결혼했다.

 

1453년(단종1) 태학에 들어가 주역(周易)을 읽으며 주자학의 원류를 탐구하여 동료들의 경복(敬服)을 받았다.

이해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459년(세조5) 29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 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등을 지었다.

1464년 세조가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했다.

 

1467년 수찬(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1) 예문관수찬지제교(藝文館修撰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노모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했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에 여러 제자를 가르켰으니

이들이 한훤당 김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一蠹 鄭汝昌),

동원 이승언(東園 李承彦), 소총 홍유손(篠叢 洪裕孫), 탁영 김일손(濯纓 金馹孫) 등이다.

 

1482년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弘文館應敎知製敎) 겸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이 무렵부터 제자들이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오르면서 사림파(士林派)를 형성, 훈구파(勳舊派)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1485년 55세에 사복첨정(司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따님으로

37살이 어린 18세의 남평문씨(南平文氏)와 재혼하였다.

1489년에는 공조참판, 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1492년 62세로 졸하여 부남(府南)의 무량원(無量院) 서산(西山)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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