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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학봉 김성일 고가, 의성김씨학봉종택 義城金氏鶴峰宗宅

구름에 달

by 碧巖 2021. 8. 22.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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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김씨 학봉종택 (義城金氏 鶴峰宗宅)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112호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2830-6, (금계리 856-2)

학봉 김성일 구택(鶴峰 金誠一 舊宅) 금계마을

 

문충공 학봉 김성일 구택(文忠公 鶴峰 金誠一 舊宅),

학봉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고 하여,

1762년 학봉의 8세손인 김광찬(金光燦)이  이 곳에서 100m 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邵溪書堂)이 있는 자리에

종택을 신축하여 옮겨 살고 종택이 있던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4년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 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은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였다.

 

학봉 종택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종가이다.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1568년 3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와 호조의 낭관을 거쳐

1576년(선조9)에는 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간, 홍문관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1579년(선조12)에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史)로 나가 6진 등 국경지대를 살펴보았고,

1583년(선조16)에 다시 황해도 순무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590년에는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은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통신정사(通信正使) 우송당 황윤길(友松堂 黃允吉)등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1591년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현지의 분위기를 볼 때 일본이 침공해올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황윤길 외에 다른 수행원들도 일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보고를 믿는 우를 범했다.

 

이듬해인 1592년 우송당 황윤길(友松堂 黃允吉)의 보고대로 일본이 침공해오자

선조 임금은 김성일의 처벌을 명했으나

김성일은 그와 동문수학했던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다.

김성일은 초유사에 임명되어 함양, 죽산 등지에서 격문을 띄웠으며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의 도움을 받아 의병을 일으켜 경상도 지역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어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가 되어 관내 각지를 순행하며 독전하다가 이듬해 진주공관에서 순직했다.

 

종택 건물은 일(一)자형의 안채와 사당, 문간채, 풍뢰헌, 운장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봉종택은 1995년 12월 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학봉 기념관

 

촉석루중 삼장사(矗石樓中 三壯士)

촉석루 위에 마주 앉은 세 장사

한 잔 술 비장한 웃음으로 남강 물에 맹세하네.

남강 물 쉬지 않고 도도히 흘러가듯

저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우리의 넋도 죽지 않으리

 

 

촉석루중 삼장사(矗石樓中 三壯士) 는 누구인가?

문충공 학봉 김성일 (文忠公 鶴峰 金誠一)

      충의공 대소헌 조종도(忠毅公 大笑軒 趙宗道) ,

증참의 송암 이로 (贈參議 松巖 李魯)

 

 

촉석루중 삼장사(矗石樓中 三壯士) 는 누구인가?

문열공 건재 김천일(文烈公 健齋 金千鎰)

충의공 삼계 최경회(忠毅公 三溪 崔慶會)

효열공 준봉 고종후(孝烈公 隼峰 高從厚)

 

학봉 선생 구택(鶴峰 先生 舊宅)

 

안동 독립운동 대표마을 - 금계마을

임진왜란 때 왜군을 맞아 장렬히 싸우다 순국한 학봉 김성일(金誠一,1538~1593년) 집안.

이 집안의 애국 정산은

그 직계 후손들과 정신적 자식인 제자들에게 어김없이 전해진다.

학봉의 퇴계 학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이자,

학봉의 11대 종손인 서산 김흥락(西山 金興洛)은 항일독립운둥에 참여하였으며,

정부에서 훈장을 받은 제자만 60명이나 배출했고,

학봉의 직계 후손들 중에서도 무려 11명이 훈장을 받았다.

 

그런 반면에

학봉의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 ~ 1946년)은 안동에서 악명높은 파락호였다.

당시 학봉 집안은 사방 십리 땅을 전부 소유했을 만큼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데,

종손이 노름에 빠져 그 많은 가산을 모조리 탕진 것이다.

음주가무와 노름으로 수백억대의 가산을 탕진한 당대의 파락호, 난봉꾼 행세를 하며

빼돌린 돈을 만주의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딸의 장롱 구입용 혼수자금까지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해 버리는 바람에

딸은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울면서 가져갔다는 일화도 있는 독립투사였다.

풍뢰헌(風雷軒)

학봉 종택의 당호인 풍뢰헌은

손자인 단곡 김시추(端谷 金是樞)의 당호로서 1990년 중건하였다고 한다.

풍뢰란 주역에 나오는 익쾌의

‘바람이 세차면 우레도 빠르고 우레가 거세면 바람도 억세다.’는

상보상생에 따라 인세의 천선과 개과에 있어서도 마땅히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성인의 뜻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운장각

운장각(雲章閣)은 김성일의 유물관이다.

‘운장’이란 말은

‘저 넓디넓은 은하수(倬彼雲漢),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爲章于天)’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운장각에는 경연일기, 해사록 등 학봉의 친필 원고와 사기(史記), 고려사 절의 등

조선시대 초기에 간행된 고서 56종 261점, 교지 · 유서류 고문서 17종 242점 등

보물로 지정된 것 외에도 학봉의 안경, 벼루를 비롯한 유품과 후손들의 서적, 고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학봉 선생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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