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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공 용주 조경 (文簡公 龍洲 趙絅), 한양조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4. 10. 29.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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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보는 조선왕조실록과

한양조씨 교공이 엮은 용주공 연보,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문간공 도비명 등을 참고하여 정리함,

동일 사안에 대하여 연대가 다른 것은 공적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을 우선함.

1586 선조(宣祖) 19106 한양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현 명륜동)에서

아버지 찬성공 조익남(贊成公翼男)과 어머니 문화유씨 와의 사이에서

24녀 중 장남으로 출생.

자 일장(日章),  號 용주(龍洲).주봉(柱峯).

1590( 5) 학문(學問)을 시작.

1592( 7)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을 따라 홍천을 거쳐 거창으로 피난.

1593( 8) 할머니 전주이씨 거창에서 별세.

1595(10) 소학(小學)을 읽음.

1596(11) 할아버지 조현(趙玹), 임실(任實) 현감에 임명,

공조좌으로 전임, 직산(稷山) 현감 부임.

1598(13) 어머니 문화 유씨 거창에서 별세.

1600(15) 새 어머니(繼母) 진천(鎭川) 송씨 모심

1602(17) 안동김씨(安東金氏, 吏判 孝獻公 瓚<1543~1599>의 따님)와 결혼

1603(18) 장녀  (후에 縣監 (이유정)李惟楨에 출가) 출생.

1604(19) 할아버지 직산 현감 사임.

1606(21) 할아버지 64세로 별세.

1608(23) 차녀(후에 正郞 李惇臨에 출가) 출생.

1609(24)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대제학(大提學)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가르침을 받고 사기(史記)를 읽음.

1612(27) 사마시(司馬試) 급제, 성균관(成均館) 입학.

1613(28) 아버지 거창에서 별세, 포천으로 장례모심.

구 유복자(遺腹子)로 출생.

부친 찬성공이 돌아가시기 전 우환 중에 홍시를 찾았으나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은 생전에 감을 잡숫지 않았고

가신 후에도 공의 양위분 제사에는 지금까지 감을 쓰지 않고 있음.

1616(16)부친상 3년간의 여막(廬幕)생활을 마치고 성균관에 복학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폭정에 동조, 국사가 어지러워지자

이이첨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여러 번 직언(直言)하였음에도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그와의 연()을 끊고

과거도 안 볼 결심으로 성균관을 나와 거창에 은거(隱居).

1617(32) 포천에 성묘(省墓).

1618(33) 3(후에 生員 李井徵에 출가) 출생.

1621(36) 거창 장발촌에서 아드님(威鳳, 應敎公) 출생.

1623(38) 인조반정 후 초야(草野)의 지조와 재주가 있는 학사(學士)들을 발탁할 때

유일(遺逸)로서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縣監)

경상도사 (慶尙都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음.

1624(39) 이괄(李适)의 난()에 임금을 모시고 공주(公州)까지 갔다가

환도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을 거쳐 목천(木川) 현감(縣監) 부임.

1626(4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 정언(正言).헌납(獻納) 제수

1627(42) 사서(司書)로 있을 때 금()나라 군사가 침입(胡亂)하여

호패법(戶牌法)으로 민심이 혼란하여지자 문학(文學) 김육(金堉)과 더불어

이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여 호패법을 폐지하게 되었음.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세자(世子)는 육지에서 군사를 무마케 하였는데 이 세자를 모셨음.

1629(44)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황해도 지방의 민정(民情)을 살핌.

1631(46) 지례(知禮) 현감(縣監) 부임.

1632(47) 조카 위명(威明, 松泉公) 거창에서 출생.

1634(49) 사간(司諫)을 배수하고 정온(鄭蘊)의 무죄를 상소.

1635(50) 집의(執義), 문천군수(文川郡守), 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호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감.

1636(51)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이 이대하(李大廈)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비리(非理) 등에 대하여 상소.

병자호란으로 호적(胡賊)이 한양까지 침입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 당하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 항전(抗戰)을 독려.

1637(52)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 송파 나루)에서 청() 태종(太宗)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볼모로 끌려가고서야 환궁(還宮).

조정에서는 청과의 화친에 반대한 공과 정온(鄭蘊)

척화10(斥和十臣)에 대한 논죄(論罪)가 있었으나

도승지(都承旨) 이경석(李景奭)의 계주(啓奏)로 무사.

1638(53) 흥해(興海) 부사(府使)로 나감.

1640(55) 인조가 불렀으나 어머니 병환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10조소(十條疏)를 올림

동생 구(糸侯)가 한양에서 27세로 요절(夭折).

1643(58)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재임 중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13)임명.

일본 통신사행(通信使行)1413년 시작. 사행(使行)의 목적은 조선측은 우호유지,

청조(淸朝) 견제(牽制), 국정(國情)의 탐색(探索)이었고

일본측은 가강(家康)의 탄생 축하와 일광묘(日光廟)의 증축이었음.

통신사행(通信使行) 477명은 427일 부산을 출발, 118일 귀국하였음.

일인(日人)들이 크게 환대하며 온갖 기교하고 음탕한 희롱을 베풀어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고

관청에서도 선물공세를 폈으나 모두 물리쳐 일인들이 그 결백에 탄복하였음.

특히 일왕(日王)과 덕천정권(德川政權)

공의 탁월한 학문(學問)과 시문(詩文)에 감동하였고

공은 기행문인 동사록(東槎錄)을 남겼음.

일본의 여성 사학자 오다끼 기요꼬(大瀧晴子)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특이하게 청백했던 인상을 느낀 의 행적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84년 가을 공의 11세손 학윤(學允)씨의 초청을 받고 34일간 문간공 묘소,

별묘別廟), 용연서원 (龍淵書院) 등을 참배하였음.

1644(59)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김제(金提) 군수(郡守)를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나아갔음.

공은 홀로 된 계수(季嫂), 어린 조카(松泉公, 威明 12)와 차마 떨어질 수 없어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함께 임지로 갔으나

이때 평소 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던 판관(判官)

딸린 식구가 많다는 것을 방백(方伯, 觀察使)에게 일러 바쳐

구설(口舌)을 피해 부임한지 18일만에 사직하고 아산으로 갔음.

1645(60) 대사간(大司諫), 대사헌(大司憲) 제수.

1646(61)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참판(刑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도승지(都承旨), 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배수하고 사양소(辭讓疏)를 올렸으나 윤허를 못받음.

1647(62) 형조판서(刑曹判書)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음.

예조판서(禮曹判書) 겸 내의제조재성청당상(內醫提調裁省廳堂上),

김자점이 죄()로 정승에서 파직되자

공이 복상(卜相, 정승될 사람을 가려뽑아서 추천)되었으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됨.

1649(64) 인조 승하, 효종 즉위. 예조판서(禮曹判書)로 국장도감(國葬都監)

장릉(長陵, 인조의 능)의 지문(誌文)을 찬술(撰述).

1650(65) 장릉지문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았으므로

()나라의 압력과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의주(義州)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 과천에서 별세.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간 인평대군(麟坪大君)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다시는 조정에 서용(敍用)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어주라는 황제의 허락을 전해 왔음.

1651(66) 백마산성 유배에서 귀환. 신묘 삼권보(辛卯 三卷譜)의 서문을 씀.

1653(68) 봉친(奉親)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郡守)로 나감.

1655(70) 기로소(耆老所)에 듬.

1656(71) 효종이 여러차례 월봉(月俸)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祿俸)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음.

조카 위명(威明)을 데리고 파주 양경공(良敬公) 묘소 성묘.

1659(74)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여 효종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음.

1661(76)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문을 올림.

옥책문(玉冊文, 이나 王后尊號를 올릴 때 을 칭송하는 글)지을 것을 하명 받음.

1666(81) 66년간 지성으로 모셨던 계모 진천 송씨 별세.

1669(84) 현종(顯宗) 1025일 졸(). 조정 2일간 휴정(休廷)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기록

청문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에 청나라에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 후, 청의 서용금지.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郡守)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나이 80세에 상()을 당하였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수행.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는데

이때 나이 84세로 졸()하였다.

조경의 문장은 고상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고문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 일 때문에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림을 받아 간사하다고까지 지목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간사스럽고 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금상(今上) 병진년(丙辰年) 현종(顯宗)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1676(숙종 2)36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어

104일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고

1695(숙종 21)711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다.

 

포천시 호국로 도로변 만세교2리의 용주조경선생묘소 안내석

 

한바위교를 지나서

 

한바위교 너머 신도비각이 보이고

 

길가의 신도비 표지석

 

용주 조경의 신도비

 

 

 

신도비를 지나 마을 안길로 200m 정도를 가면 포천시 향토유적 제42호 용주조경선생묘소 표지석이 있다.

 

바로 마을 안쪽에 위치한 용주선생의 재실 영모재

 

 

 

영모재의 대문에는 추원문이란 현판이 있네요.

 

 

 

마을옆으로 오르다보니  안내 표지석이 또 보이네요.

 

묘역의 전경

 

 

 

 

 

 

 

 

 

 

 

 

 

 

 

 

 

 

 

 

 

 

 

 

 

 

 

 

 

 

 

 

 

 

 

 

 

 

 

위성에서 본 묘역 전경

문간공 용주 조경 (文簡公 龍洲 趙絅), 

문과 장원 급제한 문형  좌천·강등·하옥돼도 직간한 청백리 

 문간공 휘 경()은 한양조씨의 13세조로 자는 일장(日章), 호는 용주(龍洲)주봉(柱峯)이다.

1586(선조 19) 106일 한양 숭교방 흥덕동에서 출생하였다.

처음에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후에는 모계(茅溪) 문위(文緯)의 문인(門人)으로

1612(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光海朝)의 난세(亂世)에 과거와 벼슬을 단념하고 1616년 거창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고창(高敞)현감(縣監)과 경상(慶尙)도사(都事)에 계속하여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다가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평정된 후

형조(刑曹) 좌랑(佐郞)과 목천(木川, 현 천안) 현감(縣監)을 지냈다. 

162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서 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조정에서 화·(·) 양론이 분분할 때,

지평(持平)으로 강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강경하게 논박하였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조(吏曹) 정랑(正郞), 해서(海西)호남(湖南) 지방의 암행어사(暗行御史)를 거쳐,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였고,

이듬해에는 집의(執義)로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나라 군사를 격퇴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시인 16432월부터 11월까지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오사카(大阪)와 에도(江戶)에서

왕명(王命)을 전하면서 일인(日人)들의 간교한 환대를 물리치고 일왕(日王)과 도쿠가와(德川)정권을 탁월한 시문(詩文)으로 감동시켰다.

 1645년부터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홍문관예문관 대제학(大提學), 형조판서(刑曹判書),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좌참찬(左參贊), 좌찬성(左贊成)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이조판서 재임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인재등용에 공정을 기하여 명망을 얻었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1650(효종 1)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신묘삼권보(辛卯三卷譜)의 서문을 썼다.

1655년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1661(현종 2)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예송[禮訟,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의 복상기간을 두고

율곡학파인 서인과 퇴계학파인 남인간의 정권 주도권을 둘러싼 이념논쟁]에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변호하다가 대간(臺諫)의 논박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166925일 별세하였다.

()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 1584-1650)와의 사이에 13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한바위 녹문산에 합장하였다. 별묘(別廟)는 신북면 가채리에 있다.

 

문정공(文正公) 미수() 허목(許穆)이 묘지명(墓誌銘)신도비명(神道碑銘)시장(諡狀)을 지었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흥해의 곡강서원(曲江書院)에 배향되었다.

글씨에 뛰어났고 용주집(龍洲集)과 일본 견문록인 동사록(?)을 남겼으며

포천인의 빛나는 발자취를 전하는 사찬(私撰) 군읍지인 최초의견성지(堅城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676(숙종 2)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1695년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기고 자랑하거나 사치하지 않은 현모양처의 본보기

정경부인 안동김씨 할머니(1584.10.6-1650.11.21)

이조판서를 지낸 효헌공[孝獻公, 휘 찬(), 1543-1599, 자 숙진(叔珍),  호 눌암(訥菴)]

13녀 중 막내 따님이다.

안동 김씨는 본래 신라 경순왕의 후예로 중시조는 고려 충렬왕 때 일본을 정벌한 2차 여() 연합군[금포옥대(錦袍玉帶)로 유명한

3세조 휘 양기(良琪)가 바로 이 부대의 부원수였음]의 원수였던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 장군이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혈전(血戰)의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진주목사,

()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충무공(忠武公)]장군도 바로 그 후손이다.

효헌공은 1568년 문과 급제, 대사헌, 대사간, 대사성, 경기도 관찰사,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우참찬(右參贊)까지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밑에서 체찰부사(體察副使)를 역임하고 양호조도사(兩湖調度使)로 전란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접반사(接伴使)로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하였다.

문장가이면서 경제문제에 밝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명신(名臣)이었다.

문간공 신도비명에 의하면 할머니는 아름답고 순하며 부지런하고 삼가서 시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고

자랑하거나 사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임금이 싫어해도 바른 길로 직간(直諫)하기를 좋아하고

평생을 청렴강직한 삶으로 일관하였기에 여러 차례 월봉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어려웠을 내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찬성공의 유복자(遺腹子)인 시동생 구[1613-1641, () 이참(吏參)]가 요절하여

동서(同壻) 경주(慶州) 이씨(李氏)와 한 집 살림을 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가 김제 군수, 전주 부윤(1644)으로 나갔을 때 동반가족이 많다는 아전(衙前)들의 구설로

관직을 사임하였을 때에도 조카인 위명(威明)을 친자식처럼 양육하고 훈도하셨던 것으로 보아

할머니의 엄하면서도 후덕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형 응교공[應敎公, 휘 위봉(威鳳, 호 녹문(鹿門)과 본래부터 정분이 두터웠는데

귀하게 드러남에 이르러서도 조석으로 명령을 받들기를 소년 때와 같이 하였으며

종형께서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연석(宴席)에 가지 않으며 음악을 듣지 않으셨다.

이 때부터 응교공과 11살 아래인 송천공[松泉公, 휘 위명(威明)] 4촌 형제간의 돈독했던 우애와 의리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송천공파에서 지은 가채리의 재실(齋室)두 분의 아호(雅號)를 따서 녹송재(鹿松齋)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병자호란 후에는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찬술(撰述)하면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아니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사표(謝表)에 청나라 태종의 조문(弔文)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한 까닭과

병자호란 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에 대한 처벌 요구 등으로

할아버지는 1650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의주의 백마산성에 유배되었고

할머니는 과천에서 별세하였는데 임금의 특명으로 경기 감영(監營)에서 부의(賻儀)와 물자를 내려

성복(成服)과 매장(埋葬)의 예()를 치르게 하였다.

할아버지는 적소(謫所)에서 풀려나서야 비통한 마음으로

선조인 찬성공, 이판공, 이참공의 성묘 겸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볼 수 있었다.

문간공은 늘 조정에서 드러난 분으로 귀하기는 구경[九卿, 삼정승(三政丞)과 육판서(六判書)]을 넘었으되

할머니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뒷 날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위해 지은 제문에 이르기를

"내가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나아간 이후로 군현의 수령으로 나간 것이 몇 차례 되었으나

부인은 역시 온전한 옷 한 벌이 없었소.

이것이 비록 부인의 재주가 졸렬한 데에서 말미암은 바이기는 하지만,

역시 성품이 검소하고 부지런하며, 나의 뜻을 잘 따라 주어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소.

또 외람되게도 임금의 은혜를 입음에 미쳐서는 이조판서를 맡게 되었는데

뇌물 꾸러미가 감히 우리 집의 대문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고

일찍이 처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나에게 와서 간청함이 없었오.

나는 지금 이후에야 부인이 안에서 도와주는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알겠소." 하셨다.

63세에 할머니와 사별하신 후  20년간이나 홀로 지내신 것도 오늘날과는 시대상이 많이 달랐겠지만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분과 며느님인 초계(草溪) 정씨(鄭氏) 할머니의 어려우셨음을 짐작케 한다.

할머니는 13녀를 낳으셨으니  아드님은 응교공이고

세 분의 사위는 위솔(衛率) 이유정(李惟楨),

정랑(正郞) 이돈림(李惇臨),

생원(生員) 이정징(李正徵)이다. 1584년 갑신생(甲申生),

1650년 경인졸(庚寅卒)로 수() 67()였다.

 

 

벽암 두릉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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