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驪州李氏歷代人物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51번지
시조 인용교위공(始祖 仁勇校脚公) 이인덕(李仁德)배위는 김씨(金氏)
고려 예종(容宗)년간 (1106-1122)? - 고려 의종(穀宗)년간(1147 -1170)?
공의 선계(先系)와 부모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예종조 초 당시 황려현(黃驪編)인 지금의 여주(驪州)지방 토호(土豪)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시대호구단자(高驪時代戶口單子)로 학계에 널리 알려진
여주이씨(驪州李氏)의 <개성부호적(開城府,戶籍)>에 의하면
공의 증손인 종랑장공(中郎將公) 이교(李喬)의 생년이 1187년(고려 明宗17년)
곧 정미생(丁未生)으로 확실히 밝혀져 있어 중랑장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세대간격을 거슬러 계산한다면 공의 재세년도는 어느 정도 추청이 가능하다. 또 그 호적에는 친당(親黨)의 사조(四祖)는 물론 외가(外家)와 처계(妻系)의 조상까지 그 이름과 관향(貫鄕) 관직(官職) 등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당시 향리층(擺吏層)에 속했던 가계(家系)와 신분적인 관계를 이해할 수 있어 공의 재세기간(在世期間)을50년에서 60년간으로 추정한다면 대개 인종조(仁宗: 1123- 1146)를 거쳐 의종조에 이르는 시기에 향리직에 종사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따라서 공의 유일한 이력에 해당하는 인용교위(仁勇校謄)의 무산계(武散階) 직책도 이 시기에 역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무산계의 직책은 고러 초기 이래 주로 노령의 군인, 지방의 향리, 탐라(耽羅)의 왕족, 여진(女眞)의 추장을 대상으로 나라에서 전지(田地)를 지급하면서 예우를 했는데 특히 지방향리에게는 상당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그것은 향리의 힘을 빌어 지방을 다스리려는 중앙정부의 의도에 따라 그 책임과 부담을 보상한다는 배려 때문이었다. 그린 만치 당시의 향리는 관료들의 단순한 심부름꾼이 아니라 지방 농민의 통솔자요, 지방 군대의 지휘자였으며 그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공이 비록 무산계 정구품(正九品)의 하급 장교인 인용교위의 직책에 머물렀다 하여도 황려현 에서의 공의 위치와 실권은 매우 컷을 것이다.
공의 배위는 김씨(金氏)로 삼원(三元)의 따님이다. 아들은 부호장(副,戶長) 이원걸(李元傑)이고
손자는 호장군윤(戶長軍尹) 이효온(李孝溫)인데 모두 공의 향리직을 계승한 실질적인 직책이라 할것이다.
대대로 여주지방의 호족(豪族)인 공의 가문은 증손 이교(李喬)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경부의 관원이 되어 진출하므로서 이후 개경(開京)의 명벌(命關)이 되었다.
공의 묘는 아직도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나 가전(家傳)에 여강[驪江] 상류의 대촌(大村) 가운데 있다는 일설이 있고, 여주군 추읍산I(鄒邑山) 기습 여흥평(驪興坪) 위쪽의 무시곡(無時谷)이 그 곳이라는 다른 일설도 있다.
'무시곡설'은 그곳에 고려 때부터 있어온 큰 무덤 하나를 여주이씨 시조산(始祖山)이라 일컬어 왔는데 후대에 이르러 산 아래에 거주하는 이씨가문의 노속(奴屬)들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 자취를 없앨 양으로 비석(碑石)과 석물을 근처의 개천 바닥에 쳐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아래에 있는 무논(氷畓)속에 비석이 묻혀 있을 것이란 가정 아래 수년전에 후손들이 탐색 발굴 작업을 한 일도 있으나 실패했다.
1987년에 수원시(水原市) 광교산(光敎山)에 공의 단향비(壇享碑)를 세워 향사하고 있다.
여주이씨시조공 고려인용교위(仁勇校脚公) 휘 인덕(諱 仁德) 之碑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 산51번지
2세 부호장공(副戶長公) 휘 이원걸(諱 李元傑) [열조비] 配位 朴氏
3세 호장군윤공(戶長軍尹公) 휘 이효온(諱 李孝溫)[열조비]配位 慶州李氏
4세 금오위중랑장공(金吾衛中郎將公) 휘 이교(諱 李誘)[열조비] 配位 驪興閔氏
5세 증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 행 상서호부공(尙書戶部公) 휘 이수해(諱 李秀海)配位 驪興閔氏
6세 증가정대부 중추원부사 행 검교군기감공(檢校軍器監公) 휘 이겸(諱 李謙) [열조비] 配位 樂浪郡夫人 慶州崔氏
7세조 사온령공(司畿令公) 이윤방(李允芳)
1310년I고려 忠宜2]-?. 자와 호는 미상이다.
시조공 이인덕(李仁德)의 후손으로 중랑장공(中郎將公) 이교(李喬)의 증손이고,
상서공(尙書公) 이수해(이秀海)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군기감공(軍器監公) 이겸(李謙), 어머니는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경주최씨(慶州崔),
공은 4형제의 첫째아들로 송경(橋京) 덕산리(德山里)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
1321년(忠肅8) 2월에 통사랑(通社郎)의 자급(資級)을 받은데 이어
사온서(司醞署)에서 실직(實職)으로 직장동정(直覺同正)과 서령동정(署令同正)을 역임하였다.
몰년(沒年)은 미상이나 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에 추증(追贈)되였다.
수원부(水原府)의 북쪽 광교상(光敎山) 천동(泉洞)에 장사 지냈다.
배위는 영양이씨(永陽李氏)로서 승봉랑(承奉郎) 통례문지후(通禮門坻候)를 지낸 이인(李咽)의 딸이다.
공에 대해서는 고문서(古文書) 자료로서
1372(恭懲21)에 작성된 부인 영양이씨(永陽李氏)가 호주로 된 호적이 남아있다.
부인이 호주로 등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남편이 죽었다는 의미이다.
고려시대에는 대게 아들이 장성한 경우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생존해 있다면
아들이 호주가 되지 않고 어머니가 호주를 상속한 관례가 많았다.
이 경우에도 부군인 이윤방이 죽은 후 장남 이진(李球)의 나이가 44세나 되었으나
호주는 그의 어머니인 영양이씨가 6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호주를 상속했던 것이다.
호적에 의하면 이때 여주이씨 문중은 고려의 수도인 송경(松京)
즉 개성의 북부(北部) 오관리(五冠里)에 살고 었었음도 알 수 있다.
공의 슬하에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낸 진(珎)이고
차남은 호조참판(戶曹參判) 지(止)이며
3남은 고려공민왕 때에 진사와 문과에 합격하여 한림원(翰林院) 학사(學士)에 오른 고(皐)이고
4남은 오위(伍衛) 을승(乙升)이다.
소사(召史)로서 나타낸 딸 2명이 있었는데 1343년과 1349년에 출생하였다.
공의 묘소는 중년(中年)에 실전(失傳)되었다가
1613년(光海5)에 8대손 부사공(府使公) 우승(友勝)과 9대손 현포공(玄圃公) 덕언(德言)이
광교산(光敎山) 천동(泉洞)에서 글자가 새겨져 있는 석인(石人) 한쌍을 발견했는데
하나는 공의 성휘(姓諱)이고 다른 하나는 영양이씨(永陽李氏)라 새겨져 있었으므로
이에 무덤을 찾아 옛 그대로 봉분을 조성한 다음
1614년(光海6)에 9대손 익헌공(翼獻公) 상의(尙毅)가 새로 표석(表石)을 세웠다.
嘉靖大夫同知中樞院事李公允芳 貞夫人永陽李氏 之墓
가정대부동지중추원사이공윤방 정부인영양이씨 지묘
8세 학사공[學士公] 이 고[李 皐]
1338년(고려 忠肅復位6)-1420년(조선 世奈2). 자는 미상이고, 호는 망천(忘川)이다. 시조공(始祖公) 인덕(仁德)의 7대손이며, 음통사랑사온서령동정(司醞署令同正)으로 가정 지중추원사[嘉靖 知中樞院事]를 추증(追贈)받은 윤방(允芳)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영주이씨(永州李氏)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틀 지낸 인의 따님이다. 공은 1362년(恭愍王11)에 진사(進士)가 되고 1369년[恭愍王18]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1374년(恭愍王23)에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집현전 제학(集賢殿 提學), 대사성(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土),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틀 역임하였다.
고려가 쇠망[衰亡)해 가자 1390년(공양왕2)에 고려조의 관직을 모두 사퇴하고 수원(水原)에 은거했는데 이때 공의 나이가 53세였다. 이곳애서 은거생활을 할 때 공양왕은 중사(中使)틀 보내어 공이 즐기는 일과 안부를 물었는데 공이 이에 대한 답으로 올린 글 가운데서 사는 곳의 좋은 경치를 강조하여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말이 있었다. 그 후에 조선조의 이태조(李太祖)가 공이 살던 곳의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게하여 이것을 보고 탑산(塔山)음 팔달산이라 사명(賜名)하였다. 다시 정조(正祖)가 이곳에 화성(華城)을 쌓고 정조께서 그 남루(南樓)에 올라가서 팔달산에 고려 효자인 공이 살던 곳이라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남문을 팔달문(八達門)이라고 하였다.
또 유허(遺墟)에 학사대(學士臺)를 세워 유적을 표하게 하고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공의 묘에 치제(致祭)하게했다.
공은 83세로 별세했는데 조선조에 벼슬을 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53세 때 은거로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기록도 있다. 고려가 망하자 완전히 은퇴했다는 것에 대하여는 이성계(李成桂)가 새 왕조에 벼슬하려 나오라고 여러번 불렀지만 끝내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고 이른바 ‘누징불기(累徵不起)'라는 기록이 대표적이다. 또한 수원유생(水原儒生) 윤성렬(尹聲烈) 등의 통문(通文)과 역시 수원유생 박주양(朴周陽) 등의 청원소(請願疏)는 물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과 그 밖의 문중 전래의 기록들에도 모두 벼슬하러 나가지 않은 것으로 되어있다. 이 기록은 공이 고려가 쇠망하자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수원 광교천(光敎川)에 낚시를 하면서 세상의 영육을 잊었기 때문에 이곳을 망천(忘川)이라 하였고, 이로 인하여 공의 호를 망천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공을 포함하여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8명의 학사를 팔학사(八學士)라 하고 그 중에서 공은 송상 조견(松山 趙狷), 둔촌 이집[遁材 李集]과 가까이 살면서 때때로 소를 타고 왕래하였는데 이를 삼학사(三學士)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공의 후손인 이운행(李運行)에게 임금이 조용(調用)을 명하는 기사가 있는데 옛 처사 이고(李皐)의 후손(故處士李皐之後)이라고 문자가 있다. 처사(處士)란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있는 덕 높은 선비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공이 조선조에서 내린 벼슬을 받고 행공(行公)을 했다면 이러한 관찬(官撰)의 공식기록에서 굳이 처사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들을 유추해보면 공이 조선조에 벼슬하지 아니한 것은 거의 확실한듯하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태조실록(太祖責錄)에 의하면 공에게 삼사좌승(三司左丞) 경기우도안렴사(京畿右道按簾使)등의 관직을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개국 초기에 전조유신(前朝遺臣)들을 회유하기 위해 내린 관직을 꼭 본인의 행공(行公)과 연결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공이 조선조에 벼슬 했는지의 여부가 큰 문제가 아니다. 당시에 고의 학덕이나 명망은 수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는 현재 수원에 남아 있는 유적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학사정(學士井)과 권선리(勳善里)에 대한 유적이다. 학사정은 팔달산 동남쪽 산기슭에 있는데 정조대왕이 직접 명명한 것이라 전하며, 지금은 영산(靈山) 약수터라 부르고 있으며 지금은 수원 남부 전역의 행정구역의 명칭이 권선구(勸善區)로 되어 있다. 다음은 팔달산에 대한 유래이다. 공이 은거하는 곳을 이태조가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하여 이것을 보고 팔달산이라 명명했으며, 정조가 화성(華城)을 축조하고 남문을 팔달문이라고 하여 공의 덕을 기린 것이다.
조대(釣臺)와 학사대(學士臺)에 관한 기록이다. 조대는 공이 낚시질 하면서 이곳에 흐르는 물을 망천(忘川)이라고 했는데 팔달산 동남쪽 기슭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반석(盤石)에 '조대' 라는 글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그리고 학사대(學士臺)는 정조대왕이 화성을 쌓을 때 공의 유적지를 답사하고 그 유허에 학사대를 세우고 포장(襃獎)하니 지금 화녕전(華寧殿) 뒤편에 있었다. 또 세종조(世宗祖)에 공에게 효자(孝子)의 정려를 내리고, 고려효자 한림학사이고지비(高麗孝子輪林學士李皐之碑)라는 큰 비석을 권선리 마을 입구에 세우게 했는데, 이것 역시 중요한 유적이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학사정' '권선리' ‘팔달산' '조대' '학사대' '정려비' 등 수원의 유서 깊은 곳에는 모두 공의 흔적이 깃들지 않은 곳이 없다.
그리고 특히 주목을 끄는 조선조에서 다섯 번이나 왕이 치제(致祭)를 한 사실이다. 첫번째는 1795년(正祖19년) 윤(閨) 2월 11일에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 능에 왔다가 친히 제문을 짓고 예관(禮官)으로 부사직(副司直) 조진관(趙鎭寬)에게 명하여 제사를 드리게 했다. 두번째는 1804년(純祖4) 10원 1일에 지제고(知製誥) 홍석주(洪奭周)에게 제문을 짓게하고, 예조정랑(禮曹正郎) 이돈현(李敦賢)을 보내어 제사 드렸으며, 세번째는 1810년(純祖10) 10월15일에 순조가 재차 제사를 올리면서 친히 제문을 짓고 예조정랑(禮曺正郎) 조영걸(趙永傑)에게 명하여 제사 드리게 했으며, 네번째는 1845년(憲宗11) 4월 24일에 헌종의 치제인데 지제고 김기찬(金基纘)이 제문을 짓고 예조정랑 전계오(田裁五)를 보내어 제사 드렸으며, 다섯번째로는 1868년(高宗5) 3월 12일에 왕이 친히 제문을 짓고 예조정랑 김국현[金國賢]을 보내어 제사 드렸다.
이와 같이 공에 대한 제사가 정조 후에 주로 이루어진 것은 정조가 아버지 능인 융릉(隆陵)에 왔다가 그곳의 유적지와 공의 명성을 듣고 행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의 제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팔달산이란 이름은 태조께서 내리신 이름이라, 이 안에 은거하는 이 있어 홀로 생활하셨구나, 수양산(首陽山)의 고사리 여기에 자라고, 이원(李愿)의 반곡(盤谷)처럼 토지도 비옥하구나, 장자(莊子)가 낚시 드리울 때 천금(千金)의 예물을 돌아보지 않음과 같고, 위야(魏野)가 은거하던 곳을 임금이 그림을 그려 올리게 하여 살피신 것과도 같구나. 이곳이 대(臺)를 세우니 좌우산천은 띠처럼 둘러 있고, 성(城)의 망루(望樓)와 촌락은 큰 도회지(都會地)가 되었구나. 이곳 주인은 지금도 살아 계신 듯하여 그 옛날 감회가 깊어 수레 멈추고 제사 드리노라
"[山名八達 聖人攸錫. 中有逸民 獨據宿. 蘿長首陽 土肥盤谷. 莊鈞不顧 魏居省識. 卽地建臺 拱挹建帶. 樓櫓閭井 一大都會. 主翁於此 悅苦神胥. 曠感者深 爲停鸞輿]" "(산명팔달 성인유석. 중유일민 독매오숙. 미장수양 토비반곡. 장균불고 위거성식. 즉지건대 공읍건대. 루로려정 일대도회. 주옹어차 황고신서. 광감자심 위정란여.)"
위의 제문을 살펴보면 “수원 시사(水原市史)”에도 그대로 실려 있는데 수원이라 하면 의례히 공을 연상할 정도로 후대에까지 명성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순조 때 두번 제사 중 첫 치제문 하나만 더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팔달산 아래에 공의 집이 있구나, 선왕(先王)의 글에 수양산과 반곡에 비유 했구나, 땅은 사람으로 인하여 유명해지고, 사람은 땅으로 인하여 드러났구나, 그 사람은 어떠한 사람이기에 길이 은거하기를 맹세했네, 옛날 일민(逸民)으로 유명한 이일(夷逸). 주장(朱張)과도 같구나, 어찌 문헌이 없다고 하오리오, 임금으로 해서 명성이 더욱 드러났네, 이제 묘역(墓域)을 둘러보고 청주(淸酒)로 강신(降神)하도다. 글을 지어 권유(勸侑)하니 은거하여 즐기며 노니는 곳이구나.
"[八達之山 其下有宅. 寧考恩言 首陽盤谷. 地以人重 人以地顯. 其人伊何 永失嘉遯. 苦古逸民 夷逸朱張. 豈無文獻 得聖名彰. 睠玆堂斧 酹以淸罇. 請以侑之 百駒衡門]" "(팔달지산 기하유택. 녕고은언 수양반곡. 지인인중 인이지현. 기인이하 영실가둔. 고고일민 이일주장. 기무문헌 득성명창. 권자당부 뢰이청준. 청이유지 백구형문)" 이 제문도 위의 정조때의 제문과 내용이 유사한대 두 제문에서 나타내고 있는 주지(主旨)는 두 임금을 섬기기가 싫어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다가 굶어 죽은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절의(節義)에 비유 공의 자취를 찬양하였고 이원(李愿)이 반곡(盤谷)으로 돌아가 숨어버린 뜻과 이일(夷逸)·주장(朱張)의 일민(逸民) 생활처럼 공의 고려유신으로서의 처신과 생활을 마음껏 찬탄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공이 별세한 일을 특별히 기록하였고 "공은 성품이 강직하며, 조행(操行)이 뛰어나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처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에 이르렀으며, 노쇠하여 수원에 물러나 있다가 별세했다"고 기록하였다. 초야에서 별세했으나 조경에서 이를 알고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공의 결의와 명망이 얼마나 높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下光敎洞) 갈곡(葛谷) 사온서령공(司醞署令公) 무덤 아래 모졌고, 묘갈명(墓喝銘)은 12대손 참판(參判) 봉익(鳳翼)이 지었다.
배위의 성씨는 미상이나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태(迨)와 이조참판(吏曺參判)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한 심(審)이다.
(참고문헌) 여주이씨세보. 여주이씨역대인물지.
8세 학사공[學士公] 이 고[李 皐]
1338년[고려 忠肅復位6]~1420년[조선 世宗2]. 자는 미상이고, 호는 망천[忘川]이다. 시조공[始祖公] 인덕[仁德]의 7세손이며, 음통사랑 사온서령동정[司醞署令同正]으로 가정 지중추원사[嘉靖 知中樞院事]를 추증[追贈]받은 윤방[允芳]의 셋째아들이다. 어머니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영주이씨[永州李氏]로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낸 인[咽]의 따님이다. 공은 1362년[恭愍王11]에 진사[進士]가 되고 1369년[恭愍王18]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1374년[恭愍王23]에 문과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이후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대사성[大司成], 한림학사[翰林學士],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여주이씨역대인물지
高麗翰林院學士李皐之墓
고려한림원학사이고지묘
9세조 참판공(參判公) 이 심(李 審) 配位 貞夫人 豊山洪氏
1379년(禮王5)-? 자와 호는 미상. 사온서령공(司醞署令公) 윤방(允芳)의 손자,
학사공(學士公) 고(皐)의 아들이다. 어머니의 성씨는 미상이다.
공은 1408년(太宗8)에 진사(進士)가 되고, 이 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1410년(太宗10)에 참외사관(參外史官)이 되고,
1414년(太宗14)에는 정언(正言) 예조정랑(禮曹正郎)이 되었다.
1419년[世宗1]에 사간원 우헌랍(司諫阮 右獻納)이 되었다.
이 때 공이 무과(武科)의 시관(試官)으로 시험을 주관 하러갔다가
훈련관의 예(禮)를 다투어 날이 저물어서야하였는데 왕이 이것을 알고 모두 파면시켰다.
1424년(世奈6)에 지평(持平)이 되고, 1427년(世宗9)년에 봉상소윤(奉常少尹)이 되었다.
이 때 관원들이 순번을 정해 놓고 정치의 득실을 임금에게 아뢰는 '윤대(輪對)'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공은이 윤대를 통해서 세종대왕과 가까이에서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이 때 아뢴 내용 중에 "왕은 무슨 일이든지 끝을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해야 한다" 는 것과
"인심을 화목하게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해야 한다"는 것에 치중하여 언급을 많이 했는데
세종실록(世宗實錄)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430년(世宗12)에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가 되고, 다음 해에 지사간원사(知司諒院事)가 되었다.
1433년(世宗15)에 성균사성(成均司成)을 사직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437년(世宗19)에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가 되고,
1439년(世宗21)에 한산군수(韓山郡守)로 부임했다가 1441년(世宗23)에 병으로 사직한 후
5년간 고향으로 물러나 정양(靜養)을 했다.
1445년(世宗27)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처
다음해 6월에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寮使)가 되었다.
이 때 가뭄으로 백성들이 살기가 어렵게 되자 상소(上疏)하여
국고(國庫)의 곡식을 내어 이들을 구제하도록 했다.
1447년[世宗27] 7월에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되고 이 해 8월에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으며,
10월에 69세의 나이로 사직했으나 이를 윤허해 주지 않았다.
1454년(端宗2)에는 공이 나이가 많고 나라에 끼친 공적이 훌륭하다 하여
공의 아들·손자·아우·조카·사위 중에서
한사람에게 자신의 소원에 가자(加資)하여 임용 하도록 하는 특전이 있었다.
이와 같이 공은 진사에서 한림, 집의, 강원도 관찰사, 인순부윤, 보문각제학, 이조참판 등의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청렴한 지조와 지공무사(至公無私)로 훌륭한 공직자상을 세었다 하여
조정에서 청백리(淸白吏) 선록(選錄하고 후일에는 정난원종공신(靖亂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공은 성품이 청근(淸謹)하고 학문이 매우 높으며 행실이 뛰어났다.
조정에서의 활동 사항은 "왕조실록"에도 수십회나 등장할 만큼 왕성하여 일일이 들 수 없지만
특히 당시 정연지(鄭麟趾)가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공이 참판으로 있으면서
문물제도의 잘못을 왕에게 과감하게 아뢰어 개혁한 일은 공의 사환생활에서 큰 실적이라 할만하다.
공의 친구인 최장겸(崔壯謙)이 시를 지어 공에게 보냈는데
"공의 부자(父子)를 함께 부자(夫子)라 일컬으니 공과 같은 분은 세상에 드물도다.
(父子稱夫子 如公罕古今)(부자칭부자 여공한고금)" 라는 시가 남아 전한다.
이를 보더라도 당시에 공이 얼마나 존경스러운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묘는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하광교동(下光敎洞) 학사공(學士公) 영하에 모셨고,
묘갈명(墓碣銘)은 11대손 대사헌(大司憲) 수항(壽抗)이 지었다.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로 직제학(直提學) 보(保)의 따님이다.
묘는 사온서령공(司醴署令公) 무덤 뒤편에 있다.
4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음죽공(陰竹公) 백견(伯堅)과 설헌공(雪軒公) 중견(仲堅), 숙견(叔堅), 견(堅)이다.
(참고문헌) 여주이씨제보. 여주이씨역대인물지.
1379년(고려 우왕 5)~
본관은 여흥(驪興). 겸(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방(允芳)이고, 아버지는 대사성 고(皐)이며,
부인은 홍보(洪保)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1417년(태종 17) 좌정언(左正言) 제수,
1444년(세종 26)까지 좌헌납(左獻納), 지평(持平), 사성 겸 종학박사(司成兼宗學博士),
집의(執義), 우사간(右司諫), 한산군사(漢山郡事)를 두루 역임하였다.
1445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병조참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가선대부에 오르면서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고,
1447년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 중앙으로 돌아와 이조참판에 발탁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부윤에 체직되었고, 1455년(세조 1) 부윤으로서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458년경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고 졸하였다.
嘉靖大夫吏曹參判驪州李審墓
가정대부이조참판여주이심묘
10세조 음죽공(隆竹公) 이백견(李伯堅) 配位 淑夫人 碧珍李氏
1408년(太宗8) - ? 자와 호는 미상이고,
학사공(學士公) 이고(李皐)의 손자이며, 참판공(參判公) 이심(李審)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정부인(貞夫人) 풍산홍씨(豊山洪氏)로 직제학[直提學1 홍보(洪保)의 따님이다.
공은 음직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 음죽현감(陰竹縣監)을 지냈다.
문헌의 인멸로 공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지만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세종대왕과 관계되는 기록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442년(世宗24) 9월 24일에 바람과 비가 몰아쳐서 사람과 가축이 얼어 죽게 되었는데
세종대왕이 관찰사와 찰방(察訪)인 공에게 명령을 내려 이를 구제하게 했고,
또한 1444년(世宗26)에 궁이 경기정역 찰방(京畿程驛 察訪)으로 있을 때
마침 세종대왕이 눈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는데 초정(椒井) 약수로 치료하게 되었다.
이 때 세종대왕이 충청도 관찰사와 공에게 유시(諭示)를 내려
초수(椒水) 올리는 일을 극진히 하도록 했다.
공의 벼슬은 높지 않았지만 이와 같이 세종대왕이
친히 명령을 내려 어려운 일을 부탁한 기록들을 보면 그 신망 받은 바를 짐작할 수 있다.
공의 충효의 가문에서 태어나 인품이 출중하였다.
일찍이 가정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교훈을 받아 덕행(德行)이 높았으나
마침내 뜻을 펴지 못하고 음죽현감으로 좌절하고 말았다.
묘소는 경기도 수원시 하광교동(下光敎洞) 학사공(學士公) 무덤 남쪽 산기슭에 있다.
배위는 숙부인(淑夫人) 벽진이씨(碧珍李氏)로
현감(縣監)을 거쳐 증 이조참의(贈吏曹參議)인 이신지(李愼之)의 따님이며,
아들은 집의공[執義公] 이현손(李賢孫)이다.
陰竹縣監李伯堅之墓
음죽현감이백견지묘
묘역 전경 하단에서
묘역 전경 상단에서
묘역 전경 상단에서......멀리 영동고속도로가
//여주이씨 한림학사 망천 이고(忘川 李皐) 가계//
시조7대조 인용교위 이인덕(李仁德)
6대조 부호장 이원걸(李元傑)
5대조 호장 이효온(李孝溫)
고조부 중랑장 이교(李誘)
증조부 호부상서 이수해(諱李秀海)
조부 군기감 이겸(李謙)
부친 사온령 이윤방(李允芳)
모친 정부인 영양이씨, 승봉랑 통례문지후 이인(李咽)의 따님
형님 판사복시사 이진(李珎)
형님 호조참판 이지(李止)
동생 오위 이을승(李乙升)
한림학사 망천 이고(忘川 李皐,1341~1420세종2)
자 이조참판 보문각제학 이심(李審)
손자 음죽현감 이백견(李伯堅)
증손자 집의 이현손(李賢孫)
현손 음죽현감 이영효(李永孝)
5대손 박천군수 이학(李鶴,1481성종12~1537중종32)
6대손 통정대부 황주목사 이승종(李承宗,1510중종5~ ?), 무과
7대손 통정대부 영흥부사 이추(李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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