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陵영릉 세종,소헌왕후의 합장릉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10월 12일 (음력 9월 28일) ~ 1446년 4월 19일 (음력 3월 24일)
조선 세종의 왕비. 별호는 공비(恭妃), 시호는 선인제성소헌왕후(宣仁齊聖昭憲王后).
청천부원군 안효공 심온(靑川府院君 安孝公 沈溫)의 장녀, 본관은 청송(靑松).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집안이 멸문당한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마찬가지로,
소헌왕후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소헌왕후는 조선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남편 세종대왕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다.
이는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조선 최고의 국모이자 왕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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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연기념물 459호 회양목
寧陵영릉 효종의 릉
효종과 비 인선왕후 장씨의 영릉(寧陵)이다.
효종은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차남으로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비빈·종실 및 남녀 양반 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했다.
이듬 해 강화가 성립되자, 형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갔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형 곁에서 형을 적극 보호했다.
청나라가 산하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고 자기를 대신 가게 해달라고 고집해 동행을 막았다.
그 뒤 서역(西域) 등을 공격할 때 세자와 동행해 그를 보호하였다.
청나라에서 많은 고생을 겪다가 8년 만인 1645년 2월에 소현세자가 먼저 돌아왔고, 그는 청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해 4월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자 5월에 돌아와서 9월 27일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영릉은 위치가 좌우로 나란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라
앞쪽에 인선왕후릉을 모셨고 뒤로는 효종릉을 나란히 모신 동원상하릉 형식의 쌍릉이다.
본래 영릉은 효종 승하후 현 위치가 아닌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소재의 태조 건원릉(建元陵) 서쪽의 위치에 조성했다.
석물(石物)에 틈이 생겨 누수의 염려가 있다고 하여 여주 세종의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천장시 릉을 열어보았으나 그동안의 우려와는 다르게 물이 들어온 흔적은 발견 못하였으나
영릉은 천장하였고 천장에 연루된 자들은 무두 면직을 당하였다.
천장 다음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의 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릉을 조영하였다.
두 봉분의 위치가 특이한 것은 풍수설로 볼 때 왕성한 산 혈맥의 생기를 모두 받게 하려다 보니
현재와 같은 특이한 위치 조성이 되었다고 한다.
효종의 릉에만 곡장이 설치되어 있어 쌍릉의 형식임을 알 수 있지만,
기타 나머지 석물은 모두 각각 별도로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두 봉분 모두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으로 호위하고 있다.
寧陵영릉 /효종의 릉 앞쪽의 인선왕후의 릉
인선왕후(仁宣王后)
1619년 2월 9일(1618년 음력 12월 25일) ~ 1674년 3월 19일(음력 2월 23일)
조선의 왕후, 효종의 정비(正妃), 현종의 어머니.
신풍부원군 우의정 장유의 딸로, 본관은 덕수. 정식 시호는 효숙경렬명헌인선왕후(孝肅敬烈明獻仁宣王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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