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건릉, 正祖大王 健陵, 이산(李祘)
재위 1776년(영조28)~1800년
諡號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
정조대왕 건릉, 正祖大王 健陵, 이산(李祘)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7~1800년.
이름은 산(祘). 字는 형운(亨運), 號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다.
정치적으로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을 펼쳐 사림 붕당세력이 아닌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을 설치해 군문을 정비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며,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정조(正祖)
조선 제22대 왕, 대한제국 추존 황제.
이산(李祘). 字는 형운(亨運), 號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건릉은 제22대 정조(1752~1800)와 효의왕후(1753~1821) 김 씨의 합장릉이다.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 씨의 둘째 아들로
8세 때인 영조 35년(1759)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출생과 관련해 남다른 이적이 많다.
사도세자는 정조가 태어나기 얼마 전 신룡이 여의주를 물고 침실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태어나기 하루 전에는 큰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잔뜩 끼더니 몇십 마리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 모습을 도성 사람들이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정조는 사도세자가 꿈 내용을 그린 그림을 동궁(창덕궁) 벽에 걸어놓은 뒤 태어났다.
정조는 신하들의 스승이라 불릴 정도로 학식과 덕망을 지닌 호학 군주로 일컬어진다.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했지만
정조는 초창기 불안했던 입지가 강화되어 영조의 후사가 되는 것은 문제없었다.
그러나 영조 51년(1775) 노병이 깊어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명령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방해해 조정이 크게 긴장하기도 했다.
홍인한은 세손의 외척으로 정조에 힘을 모아줄 수 있는 위치였으나,
세손인 정조가 그를 탐포하고 무지하다고 멀리하자 원한을 품고 세손의 적당이 된 것이다.
1776년 영조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곧바로 어머니 혜빈을 혜경궁으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장묘를 영릉으로 격을 높이고
생부의 존호는 장헌세자로,
묘소는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격상했다.
왕통에 관한 정리를 마친 뒤에는 홍인한, 정후겸 등을 사사하고 70여 명을 처벌해 분란의 소지를 사전에 제거했다.
정조가 즉위와 동시에 공을 들인 것은 본궁을 경희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고 규장각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이는 조정의 37세 이하 문신들 가운데 재주 있는 자들을 뽑아 공부하게 한 다음 시험을 통해 성과를 확인해 임용,
승진의 자료로 삼은 것으로 규장각에서 주관했다.
20년간 10회 시행해 100여 명을 배출했는데 무반의 요직인 선전관 강시(講試)제도도 함께 시행했다.
大韓 正祖宣皇帝健陵 孝懿宣皇后祔左
대한 정조선황제건릉 효의선황후부좌
정조는 선왕 영조 때부터 시작된 궁성 밖 행차뿐만 아니라
역대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으로 나와 많은 백성을 직접 만났다.
100회 이상 기록한 행차는 단순한 참배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민원을 접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또한 누구든 억울한 일은 무엇이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도록 능행 중에 접수했는데
『일성록』과 실록에 실린 상언, 격쟁만 5,000건을 넘는다.
과거 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해 폐단을 없앴으며,
만년에는 각 도에서 행해지는 소과도 혁신하고자 주나라의 고사를 빌려 빈흥과(賓興科)로 이름을 고쳐 시행했다.
이는 국왕이 직접 출제한 것을 현지에서 개봉,
게시하고 답안지를 거둔 뒤 규장각에 가지고 와서 국왕의 주관 아래 채점해 합격자를 발표하도록 한 것이다.
정조의 한은 아버지가 당쟁의 여파로 뒤주에서 사망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정조는 당쟁에 극도의 혐오감을 보이며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 이래의 기본 정책인 탕평책을 계승했다.
그럼에도 노론이 끝까지 당론을 고수해 벽파(僻派)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時派)를 형성해,
당쟁은 종래의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신권(臣權)을 주장하는 노론 중에서도 진보주의적인 젊은이들은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정조는 이에 주목하고 북학파의 박지원의 제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을 등용했다.
정조 대의 시기를 조선 시대의 문예 부흥기로 일컫기도 한다.
문예 부흥이 가능했던 배경은 병자호란 이후 17세기 후반에 입각한 조선 중화 의식 등이 고취되면서
조선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한 예치의 실현이라는 자긍심이 생겨난 데 있다.
정조는 조선 시대 27명의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180권 100책에 달하는 『홍재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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