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 宣陵 사적 제199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尹氏)의 능
선릉은 제9대 성종(1457~1494)과 계비 정현왕후(1462~1530) 윤 씨의 능
동원이강릉으로, 각기 다른 능침을 갖고 있지만 홍살문, 정자각은 하나다.
앞에서 보면 좌측이 성종의 능, 우측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두 달 만에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즉위하고 성종은 자을산군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예종도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예종의 원자인 제안대군은 9세이고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병석이라 13세 나이에 왕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태조의 비범함을 닮았다고 알려진 성종은 7년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친정을 시작했다.
성종처럼 운이 좋은 왕은 별로 없다.
우선 어느 모로 보나 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지만 한명회의 사위가 된 후 조선의 왕까지 될 수 있었다.
또한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국내적으로 태평이 구가되던 때에 왕위에 있었다.
학자들이 성종을 조선왕조 대표적 왕으로 꼽는 이유는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성종은 홍문관을 설치하고 『경국대전』, 『동국통감』, 『대전속록』,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 중심인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신진 사림 세력을 등용했다.
그의 조치는 성과를 거두어 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조선 중기 이후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기에,
그가 성종이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해 조선 초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한다.
성종이 학문에 열중한 이유는 왕위에 오르기 전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지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왕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았다.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
13세에 왕위에 올라 20세에 친정을 하기까지 매일 두세 차례의 경연에 빠지지 않았다.
7년여 동안 성종의 월 평균 경연 일수는 25일이 넘었고 아침과 낮은 물론 저녁과 밤에 경연을 실시하기도 했다. 성종의 이 같은 강행군에 신하들과 할머니 정희왕후도 걱정할 정도였다.
『경국대전』의 반포, 집현전의 후신인 홍문관 설치,
사림파의 등용 등은 성종의 노력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학문을 좋아하고 풍류도 즐겼지만 성종의 개인사는 매우 굴곡져 있다.
그는 집권기 내내 훈구파들의 득세를 제압하지 못했고,
조선 왕실 역사상 처음 왕비를 내쫓아 아들 연산군에 의해 피의 보복이 이루어지는 단서를 고스란히 제공했다.
성종은 왕비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파주 순릉에 안장하고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 씨를 계비로 삼았다.
윤 씨는 질투로 왕비의 체통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성종 10년(1479) 폐출되었다가 사약을 받는다.
윤 씨가 사사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 숙의, 정 숙의,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해 그녀를 배척한 것도 큰 이유다.
어쨌든 이 일은 조선 왕조에 가장 어두운 시기를 초래하는 '갑자사화'의 원인이 된다.
선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조선 왕릉 석물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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