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靖陵
제11대 중종(1488~1544)의 능인 정릉은 비공개 지역으로선릉과는 달리 사람들의 방문이 많지 않은 곳에 있다.
중종은 격변기의 왕으로 성종 19년(1488)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1506년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13세인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성희안으로, 평소 연산군의 방탕과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는데 이것이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연산군은 당시 이조참판 겸 부총관이었던 성희안을 종9품 무관인 부사용으로 강등시켰으니,
졸지에 장군에서 일등병으로 강등당한 것이다.
그 후 성희안은 박원종을 만나 반정을 모의한다.
1506년 9월 1일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한 그들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성종의 계비로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 씨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대비의 교지를 받은 반정 세력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다.
다음 날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경복궁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사태의 심각함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줬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한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을 잘 알고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해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했지만,
과격한 개혁 정치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당파 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났고,
삼포왜란과 더불어 북방 국경 지대의 야인들이 번번이 국경을 침략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반정 직후 104명의 정국공신이 책봉되었고,
반정의 핵심인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은 중종 초반의 국정을 주도했다.
중종 4년(1509)에는 이들이 삼정승을 장악하면서 정점에 도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국공신의 과도한 책봉이었다.
100명이 넘는 인원에게 상을 주니 공로도 없는 사람이나 연산군에게 협력했던 사람도 다수 포함되었는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중 제일용납안한 인물이 조광조다. 당시 반정 중신으로서 조광조의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인 조광조는 개국 공신 조온의 5대손이다.
그는 중종 10년(1515) 34세의 다소 늦은 나이로 중앙 조정에 등장했지만,
유례없이 빠른 승진을 거듭하면서 조선 왕조에 누적된 여러 현안을 개혁하고자 했다.
하지만 겨우 4년 만에 '기묘사화'로 일거에 숙청되는 비운의 인물이기도 하다.
조광조를 비롯한 삼사 인물은 대부분 30대 신진 관원으로,
현실 세계의 복잡한 변수를 융통성 있게 처신하기보다 원칙과 이상에 입각해 엄정하게 비판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이 강력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중종의 확고한 신임이었다.
특히 중종은 조광조를 철저히 신봉해 등용한 지 2년 반 만에 당상관으로 올리는 등 파격적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급격히 무너졌는데 조광조가 강조한 현량과의 부작용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화가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조광조 등이 개혁의 일환으로 내건 삭훈이었다.
조광조, 이성동 등은 중종반정 공신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으므로
왕권 강화를 위해 기존 세력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묘안으로 삭훈을 밀어붙였다.
문제는 이 안이 워낙 급진적이라 대신들은 물론 중종조차 강력히 반대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조광조는 귀양을 가거나 죽더라도 달게 받아들이겠으니 조속히 윤허해 달라고 주청했다.
결국 기묘사림은 중종의 윤허를 얻어냈고
정국공신 중 76명(72퍼센트)의 공신호가 삭제되고 토지와 노비마저 환수당했다.
기묘사림은 이 조처로 결정적인 승기를 잡은 듯했다.
그런데 고작 나흘 뒤 전격적으로 사화가 일어났다. 기묘사림의 결정적 승리가 아니라 결정적 패배가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반전이 일어난 까닭은 조광조 등 신진 세력이 중종의 신뢰는 얻었지만
정국공신을 중심으로 한 대신들의 마음을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기득권 세력들은 현량과로 기묘사림이 대거 진출해 입지가 불안한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이어진 삭훈으로 현실적 기반이 무너지자 자구책을 강구했다.
신하들의 자구책이란 중종으로서는 악몽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왕이 된 과정과 유사한 반정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종의 급선무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중종으로서는 개혁도 중요하지만 왕위를 보존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이들과 타협안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주요 대신들이 정국이 요동치는 원인을 근원적으로 제거해 국정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역설하자
중종은 지체 없이 사화를 재가했다.
중종의 재가가 떨어지자마자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림의 주요 인물은 전격적으로 하옥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당파를 만들어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은 천거하고 그렇지 않은 부류는 배척했으며,
서로 연합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혔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광조는 한 달 후 사사되고, 사림 세력은 유배되고, 조광조에 동정적이던 정광필과 김전 등은 좌천되었다.
반면에 삭훈당한 정국공신은 원래대로 회복되면서 사화는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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