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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검 자헌대부 지중추원사 양성이씨

구름에 달

by 碧巖 2016. 2. 3.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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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4일 오늘날씨 매우추움 철원최저 영하24도, 서울 영하18도, 체감온도 영하 30도, ???

 

이사검 선생 묘

포천시 향토유적 제38

소 재 지 : 포천시 창수면 가양리 213-1

규 모 : 묘역20mx20m

 

본관은 양성(陽城).

증조할아버지는 첨의평리 이나해(李那海)이고

할아버지는 시중 이춘부(李春富)이다.

아버지는 개성 유후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이고, 어머니는 찬성사 홍상재(洪尙載)의 딸이다.

부인은 서보(徐補)의 딸인 이천 서씨(利川徐氏)로 슬하에 13녀를 두었다.

아들은 이조 좌랑 이휘(李徽)이다.

첫째 딸은 예문관 직제학 김맹헌(金孟獻)에게,

둘째 딸은 사직 장오(張俣)에게,

셋째 딸은 이조 좌랑 신영손(辛永孫)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이사검은 조선조의 무신,

본관은 양성 시호는 공소,

고려의 강릉도절제사 자헌대부 정절공 이옥의 아들이다.

1405(태종5) 무과에 급제 사직을 지내고 1408(태종8)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세자를 보좌, 상호군에 승진하였고

1429(세종11) 좌군검총제, 1430(세종12) 경상좌도처치사(慶尙左道處置使)

왜인들의 사변을 우려 성을 축조함에는 연호군(煙戶軍)으로 할 것을 품의하였다.

1434(세종16) 중추원부사, 1435(세종17) 동지중추원사로

명나라에 정조사로 가 북방 변경의 경보를 알리고 칙서를 받아왔다.

1437(세종19) 경상좌도도절제사를 거쳐 1439(세종21) 동지중추원사로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비변책을 건의, 병조에서 시행케 하였다.

1443(세종25) 인순부윤(仁順府尹)이 된 후 하삼도목장(下三道牧場)을 순찰,

1444(세종26) 공조참판이 되고 내퇴마 외퇴마를 줄이지 않게 건의하였다.

이어서 경창부윤(慶昌府尹)이 되었고 1445년 자헌대부 지중추원사에 오르고

이듬해 1446(세종28) 82966세로 졸하였다.

이사검이 사망하자 조정에서 하루 동안 조회를 철폐하고 조부(弔賻)와 치제(致祭)를 하였다.

시호는 공소(恭昭)이다.

공소(恭昭),         집사(執事)함이 견고한 것을 공()이라 하고,

                     용의(容儀)가 공미(恭美)한 것을 소()라 하여 지은 것이다.

 

 

 

 

이사검묘비석 전면,후면.

자헌대부지중추원사 증시공소공이사검지묘

이천서씨 묘비석 전면,후면

 

무인석

이사검(李思儉)[1381~1446]은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직무에 종사하매 게으름이 없었다.

1405(태종 5) 무과에 급제하여 사직(司直)에 임명되었고,

1408(태종 8) 세자 양녕 대군(讓寧大君)이 경축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다.

이때 양녕 대군의 난잡한 행동을 충고하여 미움을 받았다.

1418(태종 18)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 대군(忠寧大君)[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자 태종의 명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그 후 여러 번 승진하여 상호군에 이르렀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평산(平山)에 거주하였다.

 

1419(세종 1) 왜구가 비인현(比仁縣)에 쳐들어와 병선(兵船)을 불사르는 등 노략질을 저지르자

황해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어 진압하였다.

같은 해 조전 절제사(助戰節制使)로 황해도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중

왜구가 식량을 요구하면서 교묘하게 싸움을 하지 않는 술책을 써오자

이들을 강력하게 물리치지 않은 죄로 옹진(甕津)에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복귀하였다.

 

1426(세종 8) 상호군으로 함길도에 가서 명나라에 바칠 매를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이듬해 상호군으로 진응사(進鷹使)가 되어 매를 가지고 명나라로 가다가 요동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매가 죽어 버렸다.

그러자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죽은 매를 가지고 북경의 궁궐에 가서

중국 황제에게 조선 왕의 예를 그르쳤음을 대신 사죄하였다.

명나라 황제가 이를 칭찬하고 기특하게 여겨 장군모(將軍帽)를 하사하였다.

 

1429(세종 11) 좌군 첨총제·경상 좌도 처치사를 지내고 공조 참판이 되었다.

1432(세종 14) 판의금부사가 되고, 1434(세종 16) 중추원부사에 올랐으며,

이듬해 동지중추부사로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8(세종 20) 성절(聖節)을 하례하고 돌아오라는 명을 받았으며, 같은 해 왜구에 대한 방비책을 건의하였다.

그 내용은 왜관을 옮길 것, 진관 설치를 조정할 것, 병선(兵船)을 증강할 것, 병기(兵器)의 검열을 철저히 할 것 등이었다.

 1439(세종 21) 이후 사복시 제조를 겸임하며

태안(泰安)과 거제(巨濟)에 목장 설치를 건의하는 등 국가의 마정(馬政)을 총괄하였다.

 

 

이사검 묘역 후면에서

 

 

공소공 이사검의 부친 개성 유후 정절공(靖節公) 이옥(李沃) 묘역

 

 

<정절공 이옥 묘비>

고려강릉도절제사시정절양성이공옥지묘 배정부인남양홍씨 부(찬성사 홍상재(洪尙載)의 딸)

 

 

공소공 이사검의 子 공조참의송죽헌양성이공휘 휘지단 숙부인한산이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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